■ 책 머리에

‘임을 위한 행진곡’과 유령이 된 민주주의

518일에 시작하여 610일에 마감되는 기간은 한동안 1987년 헌법과 민주화를 기념하는 주간이었다. 정부와 민간에서 주최하는 각종 행사와 토론회를 통하여 기억의 공동체를 재형성하는 기간이었다. 우연찮게도 1980년에 일어난 5·18광주민중항쟁은 19876월 항쟁의 승리로 일단락되는 민주주의운동의 시발점이었고 선행 사건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삼 주 동안 비극으로 시작하여 승리로 완성되는 역사적 추체험의 재생을 경험한다. 하지만 오월 중순에서 유월 중순으로 이어지는 공통적 기억의 환기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주춤해졌고 정치공동체 차원의 의미는 퇴색했다. 5·18 기념식에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던 5년이 지나가고 올해 기념식에는 대통령이 등장했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제창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다. 일부 종편과 넷우익이 역사를 왜곡하고 민주화운동을 모독하는 이 시점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시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연찮게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논란의 불씨가 되었으니, 이야기를 이 노래로 풀어 보자.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호명하고 있는 자는 이미 죽은 자, 곧 망자이고, 호명되는 자는 아직 살아 있는 자다. 죽은 자가 깨어나서 산 자여 따르라고 외치는 이 노래의 구조는 우연찮게도 이 시대 민주주의의 현실, 즉 민주주의는 미완성이고 그래서 아직 영면하지 못하고 지상을 배회하는 유령이라는 점을 섬뜩하게 드러낸다. ‘민주정부’ 10년간의 제의祭儀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는 영면하지 못하고 아직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우리의 정치공동체는 5·186·10도 여전히 과거의 일로서 기념하지 못한다. 정치공동체가 함께 기억하는 과거에 대한 제의로서 5·186·10을 기념하기에 무언가 아직 한참 이르다. 죽었어도 채 죽지 못하는 유령을 소환하는 애도의 형식이 오히려 더 적절할 것이다.

우연찮게도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는 그와 같은 애도의 구조를 보인다. 이 노래를 제창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좀 더 심층적인 구조를 드러낸다. 민주주의라는 배회하는 유령을 더 적극적으로 소환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당연히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유령을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면은 우파 정부를 반민주 세력으로 규정하는 퇴행적인 인식으로부터 깨우침을 얻는 대면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른바 ‘민주정부’의 퇴진과 ‘민주대연합’의 실패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1998년 이래로의 신자유주의는 1987년 민주주의의 완성을 지연시켰고, 오늘날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고 공동화空洞化되었다. ‘민주세력’ 스스로가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기초를 허무는 일을 감행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소위 ‘민주세력’은 자신의 근거를 상실했다. 광범위한 비정규불안정노동을 양산한 ‘민주세력’이 반민주적 우파도 함께 생산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은 사회적 전환의 문제와 별도로 이루어질 수 없다. 신자유주의로 굴절되고 내파된 ‘민주주의’를 재생하고 더 앞으로 전진시키려면 먼저 신자유주의를 종식시켜야 한다.

 

이번 호에도 월간 『좌파』가 당면한 말의 싸움과 이론적 고투에 해당하는 글이 실렸다. 먼저 작년 10월부터 ‘철탑 농성’을 이어오고 있는 현대자동차 노동자 최병승 님에게 지면을 통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최병승의 글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무색해진 지 오래된 지금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경험적 평가 속에서 비정규직 투쟁의 ‘독자성’ 확보와 정규직 노동조합의 인식 변화가 노동자 단결 투쟁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광범위한 ‘피해 대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공동의 전선을 형성하지 못하는 현실은 대공장만이 아니다. 최저임금 1만 원 투쟁의 퍼포먼스로 세간의 화제가 된 알바연대 활동의 자기 고민을 다룬 구교현의 글, 콩쥐와 팥쥐가 “한 인물 안의 서로 다른 인격”이라는 해석에 기대어 특유의 경쾌하지만 분명한 필치로 최저임금 인상과 영세자영업자의 포지티브한 관계를 풀어낸 김성일의 글, 장애인활동보조인의 노동조합 결성 과정과 그 의미를 짚은 김홍규의 글, 이 모두 한편으로는 피해 대중의 단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단결의 조건으로서의 각 집단의 투쟁의 의미를 말하고자 한다.

창간호에 실린 금민의 글 「진보에서 좌파로의 전환기에서 강령의 문제」는 대중민주주의와 강령의 관계를 일반적인 수준에서 검토하며 강령 일반에 관한 구조적이고 형태적인 분석틀을 제공했다. 유럽좌파EL의 강령을 분석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종식기의 좌파대안강령은 ‘개혁강령’을 넘어서는 ‘위기-전환강령’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는 그 글에 따르자면, 한국 진보정당들의 강령은 당대의 요구에 뒤떨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태를 넘어서고자, 기획에서는 「좌파당 강령 초안」을 다룬다. 이 글에서 금민은 ‘좌파당’이라는 당명과 당의 성격에 부합되는 ‘위기-전환강령’을 시론적으로 제시한다.

시론에 실린 허영구의 글은 미결정 상태인 민주노총 7기 임원선거를 보면서 민주노총의 민주주의가 죽었다는 사망 선고를 내리고 있으며, 민주노총의 성립 과정과 실질적인 총파업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민주노총이 깨어나고 노동자운동이 바로 서는 길은 위기의 봉합이나 회피가 아니라 ‘직선제’를 통한 대중의 참여밖에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처방과 대안은 민주노총 전 위원장이자 7기 임원선거에 위원장 후보로 출마한 이갑용의 인터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론으로 또 하나의 칼럼을 싣는다. ‘그들만의 학교’인 국제중이 어떻게 공교육을 왜곡하고 망치고 있는지를 현장의 목소리로 들려준 전교조 강경표 님께 감사한다.

이번 호에는 학습을 위한 ‘탐구’ 이외에 ‘에쎄essai’가 들어갔다. ‘시도’라는 의미에서 에쎄는 지배적인 것을 뒤집기 위해 스스로 지배적인 것 밖으로 나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런 점에서 박기순의 「민주주의와 그 적들」은 우리 시대의 신성한 공리인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역설이자 고유성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새로운 정치, 인간의 근원적 평등의 정치를 구성할 수 있는 힘이자 배경이라고 말한다.

끝으로 인천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 임수철 님께 감사한다. 이 글은 민주주의와 비슷하게 어느덧 일종의 공리가 되어 버린 사회복지가 등장한 맥락을 환기함으로써 복지가 가진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박근혜 정부조차 실시하고자 하는 복지가 가진 정치적 한계를 말하면서 근본적인 관점에서 장기적인 복지 정책의 수립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월간 『좌파』의 창간은 관심, 경계, 무시, 곁눈질 그리고 연대의 분위기를 낳았다. 어떻게 보더라도 이는 ‘정치의 실종’이라고 부르는 사태와 이를 뚫고 나가려는 노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교차로가 새로운 길로 이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겸손한 이성과 강한 의지일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해서
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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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2호(2013년 6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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