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머리에

위기와 주체

큰 어려움이나 슬픔을 당한 후 이렇게 말하는 것을 흔히 듣는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기쁨이나 성취는 말할 것도 없고 어려움이나 슬픔조차 우리의 삶의 욕망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옆 자리에 있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슬픔은 삶 자체를 중단시킬 만큼 크다는 것도 분명하다! 우리의 벗 권문석을 떠나보낸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이 터지면서 사유가 잠시 중단되는 시점에도 물질세계의 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얼마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버냉키가 양적 완화의 축소와 이른바 출구전략의 모색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으며, 실물경제의 위기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제는 한국경제라는 말이 무색해진 국내시장 또한 주가 하락과 환율 급등이라는 위험신호를 매일 쏟아내고 있다. 바야흐로 경제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그렇지만 경제 위기 자체가 진보적인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그만큼 분명하다. 우리는 이 점을 역사적 파시즘에서도, 우리 시대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성공(!)에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학적 유물론을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주체의 형성혹은 세력화라는 말이 논의의 지평에 놓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적 양상으로서의 불안정 노동 체제와 금융적 수탈을 지적하면서 우리 시대 좌파의 과제는 비정규불안정노동자를 조직화, 세력화해야 하며, 직접적 사용자와의 투쟁(과 타협)만이 아니라 금융자본주의와 싸울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과제가 특히나 시급한 것은 2008년 가을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가 종식기, 좀 더 완화해서 말한다면 변동기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세력의 이름으로 ‘좌파’를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이때 좌파란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평등’을 급진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정치지형에서 (변질된) 사회민주주의의 왼쪽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이름이자 연대의 방식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금민의 ‘칼럼’을 보라.

하지만 우리의 이런 주장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은근한 무시와 노골적인 적대를 맛보았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태의 원인을 적대자나 무시자들의 무지와 용기 없음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현실에 개입하고자 하는 것이지 ‘조숙한 자코뱅’으로 기억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때 쟁점이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국의 정치 지형과 관련되는 것으로, 사회민주주의의 부재 문제이다. 오늘날 좌파라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사회민주주의의 왼쪽 자리를 말한다.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경험과 현존재 모두가 좌파라는 위치 설정의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것이 부재하기 때문에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한다. 하나는 자본주의의 호황기에나 어울릴 법한 복지 담론의 과잉이며, 다른 하나는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진보세력’이라는 담론과 세력 연합의 정치이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대중 정치의 문제이다. 사실 우리가 제출한 ‘좌파당의 강령 초안’부터 민주노총의 혁신 테제, 알바연대의 활동, 기본소득 지급, 최저임금 1만 원 요구 등은 자세히 뜯어보면 하나하나가 현실적인 논거와 필요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성이 ‘좌파’라는 명칭에 가려 전혀 주목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 좌파라는 이름에는 벤야민의 목록을 빌리자면 “확신, 용기, 유머, 간계, 불굴의 투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논리적으로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서적으로 전혀 그렇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후자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번 호에 실린 박기순의 글과 박정훈의 글이 단초를 제공한다. 각각 분노와 긍정성이라는 다른 토픽을 다루고 있지만 정치에서 정서의 문제에 주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당한 분노”를 형성하는 일과 “사색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 새로운 정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사회민주당 없는 사회민주주의’의 양상을 포함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 지형과 관련해서 필요한 작업은 자유주의 비판을 제대로 하는 일이다. 87년 체제 이전에는 한국 사회가 자유주의의 과소 혹은 부재로 고통 받았다면 87년 체제, 특히 97년 체제에서는 자유주의의 과잉으로 착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서 ‘진보적 자유주의’까지 자유주의는 광범위한 지지 기반과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누리고 있다. 이런 정치적 별자리에서,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유주의를 놓아두고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곁가지만을 건드리는 꼴이 될 것이다. 따라서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비판, 즉 제자리를 찾아주어 진리 내용을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번 호를 준비하는 시간에 갑자기 우리의 벗 권문석이 세상을 떠났다. 이 믿기지 않는 일을 소화하고 그를 애도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그의 홀연한 죽음으로 일어난 감정과 인식의 흘러넘침에 하나의 매듭을 짓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를 위해 몇몇이 각각 그의 삶의 국면들을 그려내고 하나로 모아 보려 했다.

이번 호에는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될 만한 두 편의 글이 실렸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와 기독교의 동형성을 다루면서 예수 정신 혹은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야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전남병 목사의 글이다. 누구는 19세기에 종교 비판이 끝났다고 했지만, 오늘날 실정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그 자체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투쟁의 연대를 위해서도 소중한 일이다. 다른 하나는 ‘잊혀진 공산주의자’인 이주하를 다룬 안재성의 글이다. 과거사 정리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대한 작업이 지난 십여 년 동안 어느 정도 이루어지긴 했지만, 최근 1980년 광주와 관련한 종편의 보도 태도를 보면 ‘역사를 위한 전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럴 때 남북의 권력 모두에게 미움을 받은 이주하 같은 인물과 흐름에 주해를 달고 논평을 하는 작업은 현재로서의 역사라는 점에서 중요한 작업이다. 이 글을 쓴 안재성은 이번 호부터 새롭게 편집위원회에 참여하여 『좌파』를 분야와 관계 모든 면에서 풍성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임성용 시인의 시가 실린 것을 즐거워한다.

초점에 실린 세 편의 글은 사건들에 대한 필자들 고유의 좌파적 개입이라 할 수 있다. 한민성은 초고압 송전탑 건설에 맞서는 밀양 사람들의 투쟁을 ‘지역’이라는 또 다른 지평에 놓음으로써 이 사태를 항의를 넘어서는 민중의 틈입으로 바꾸어 내려고 한다. 전교조의 이현은 박근혜 정부의 교육정책이 몇몇 눈가림에도 불구하고 경쟁과 차별의 신자유주의적 교육을 지속하고 있다고 비판한 다음, 교육운동이 더 넓은 사회적 지평과 연대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허영구는 민주노총의 출범이 노동자계급의 투쟁 의지를 모아 내는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신자유주의적 노동 유연화가 철저하게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의 운동 방식과 한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오늘날에는 그런 의지만으로 부족하며 시대와 정세에 맞는 새로운 선언과 강령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양한 글의 형식과 주제 모두에 관심을 보여 온 오준호는 여전히 진행 중인 ‘터키 사태’를 세속주의 대 이슬람주의라는 편리한 방식이 아니라 좀 더 깊은 역사적 맥락과 사회경제적 뿌리에서 찾고자 한다. 이를 통해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부딪힌 난관과 이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이를 둘러싼 갈등은 ‘문화적’ 맥락과 지평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보여준다.

 

이번 호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진보신당연대회의의 당대회에서 새로운 당명 채택의 건이 부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좁은 범위의 진보 세력과 좌파 이외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일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진지한 일이다. 그런데 진지하게 사고하기 위해서는 행동을 멈추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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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호(2013년 7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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