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머리에

봄날의 정치적 풍경

기온이 오르면서 약간 나른할 수 있는 봄날이 막 시작되기 때문인지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른 느긋함은 신의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적당히 즐길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지도 않은데 맥이 빠지는 우리의 삶과 정치는 어색함을 넘어 곤혹스러움마저 느끼게 한다.

어느 일요일 오전 전격적으로 발표된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의 ‘합당’소식은 당시로서는 꽤나 놀라운 소식이었다. 물론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른 이합집산이나 그 결과를 끌어낸 행위자들의 재주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안철수 신당은 한국의 정치 지형도에서 매우 좁은 곳, 즉 중도파와 우파 사이에 자리 잡으려는 일종의 모험을 시도했다. 이런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포스트민주주의적 상황의 반향, 즉 정치적 냉소주의 혹은 혐오에 더해 스타 인물에 대한 기대감 등이었다. 하지만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분위기가 아니라 실체가 필요할 때 그 주술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고, 결국 ‘낡은 정치’와 손을 잡게 되었다. 그런데 과정이야 이러했지만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정치에서 좌우로 가장 폭이 넓은 야당이 형성될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이 놀라움의 근원이었다. 이럴 때 당연하게도 왼쪽은 오른쪽으로 넓힐 수 있는 여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으며, 여전히 세력 재편으로 뭔가를 도모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꽤나 컸을 것이다. 하지만 방향을 제대로 잡았으나 아직 이를 제대로 밀고나갈 힘과 계기를 갖지 못한 우리에게도 이 사태가 만만치 않은 도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안철수 신당이 낡은 정치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우리의 여지가 넓어졌다고 잘못 판단하거나 그곳에서 뭔가 한몫해 보겠다고 허영심을 부리는 것 모두 우리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

물론 새로운 당이 지금 보이는 내홍이나 지지부진함만 우리의 맥을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와 우리 주변으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다. 빨간 장미를 상징으로 하면서 여전히 왼쪽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노동당은 이번 선거를 앞두고 ‘사즉생 死卽生’ 의 태도로 선거 방침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 방침의 실행은 정반대인 것으로 보이며, 그나마도 활발하거나 집중된 의사소통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정치적 견해 차이에서만 나온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정치적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실제로 캔버스에 그릴 수 있는 역량 자체가 의문시되었다. 이럴 때 정치적 차이는 각자의 (무)능력을 가리는 무화과 잎사귀일 뿐이다. 그런데 그 능력이라는 게 추상화된 양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시대정신과의 마주침이고 잠재적 주체와의 대화에 관한 것이라면 결국 정치적 견해의 다른 면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민중의 정치’계급’이 아니라 ‘정치’계급이라면 마땅히 정치적 견해와 능력을 일치시키려는 맑은 눈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주 뜻밖의 일은 아니지만, 경기도 도지사 후보로 나선 김상곤의 대중교통 무상화 공약과 김진표의 빈곤층에 대한 ‘기본소득법’ 입법 발의 및 공약은 긴장감, 기대감, 맥 빠짐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정신적 노동을 요구했다. 이런 담론이 선거라는 열린 정치적 공간에 출현함으로써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의제의 일단을 보여 준다는 긍정성이 있지만, 현실성이라는 이유로 매우 ‘약한’ 모델을 제시하거나, 이름만 가져다 모두를 혼동시키는 행태는 사실 매우 못마땅한 일이다. 그렇다고 얼굴만 찡그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우리가 의제로 삼고자 하는 일,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주체와 제대로 만나는 일이 필요할 따름이다.

우리는 지난 2월말에 시작한 ‘기본소득공동행동(준)’이라는 이름의 몸짓과 만남이 이러한 지반과 궤적이 되기를 바란다. 기존에 진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재구성되고, 녹색이라는 아우라에 싸여 있던 사람들이 강당에서, 거리에서, 다양한 장소에서 이들과 만나기 위한 정치적, 사회적 의제로서 기본소득을 대신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에 맞는 보편적 주체를 형성하기 위해, 정치적 참여의 권리와 자유의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의 성장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안녕을 위해, 긍정적인 인간 에너지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를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애쓰는 사람들이 기본소득이라는 지반과 지향으로 모일 때 맥 빠진 정치가 아니라 긴장감 있는 활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시인은 모르고 한 말이지만 우리에게 4월은 분명 ‘잔인한 시간’이다. ‘4·3항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무고한 양민’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는 점에서, 그 사실 자체가 억압당하고 침묵당했다는 점에서 잔인하다.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려는 시점에서, 그 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충돌이었고, 그 방향과 방식 모두 민중적이길 원했던 사람들의 ‘봉기’였다는 것을 이런 저런 이유로 묻어 두거나 사라지게 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잔인한 일일 것이다. 더 나아가 악랄한 선전 때문이건, 신자유주의적인 삶의 조건 때문이건 눈길조차 주기 어려운 현실은 더욱 잔인하다. 이런 점에서 ‘4·3항쟁’의 전개 과정, 성격, 이후의 정리 작업에 대해 간결하게 정리한 양정필의 글과 다양한 ‘제주도 사람들’이 4·3에 관해 나눈 좌담은 잔인한 과거와 결별하고 잔인한 현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지속되는 애도 작업의 하나이다.

우리 사회에서 삼성만큼 현실의 잔인함을 보여 주는 그 어떤 것도 찾기가 쉽지 않다. 안재성과 양희석이 각각 육안과 렌즈를 통해 보여 주는 삼성의 모습은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적의 어떤 면을 보여 준다.

이번 호에는 각각 다른 계기로 새롭게 글을 보내 준 두 사람이 있다. KTGO연협의 임미영 님은 당사자의 경험에서, 우리 잡지 대전지국 통신원인 정정희 님은 참여관찰자의 시선으로 또 다른 잔인함, 하지만 희망과 연대를 말한다. 두 사람에게 감사한다.

창간부터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 모든 필자들에게 열두 번째 호를 맞이하여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며, 꾸준히 함께 해주는 독자들에게는 더 큰 고마움을 전한다.

고마움을 서로 전하는 일은 어찌되었든 살아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행운일 것이다. 얼마 전 노동당 부대표, 하지만 대변인이라는 직함이 더 익숙한 박은지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났다. 여러 공간과 만남 속에서 그의 죽음을 두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물론 유물론자인 우리가 그의 아픔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자신 있게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조금 더 알기 위해 또 다른 아픔을 겪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저 편히 잠들기를 바라는 것이 의례적인 일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해서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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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12호(2014년 4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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