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머리에

오늘을 살아가는 기억을 위하여

너무나 무거운 공기 때문에 어떤 위로나 위안의 말로도 우리의 마음과 상황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굳이 예외 상태 혹은 비상사태가 더 많은 것을 제대로 알려준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지금은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 준다. ‘대한민국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비유 자체가 적절한지는 따로 따져볼 일이지만, 소박한 마음과 바람으로 살기 어려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느새 1년이 지났고, 또 5월이다. 지난 일 년 동안 『좌파』의 지면은 새로운 좌파, 우리 시대의 좌파가 어떤 모양새여야 하고, 어떤 의제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하는지를 말하는 연단이고자 했다. 이 연단에서 우리는 신금융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으로 신자유주의의 운동과 위기를 분석하고, 생태적 전환이 에너지의 전환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전환과 동시에 교차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논구하고, 기존 노동운동이 전투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주체성 속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가능성과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로 새로운 운동을 구성할 필요성을 제기해 왔다.

또한 우리는 새로운 좌파가 기존 진보운동의 시대착오성에 대한 반정립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적, 문화적 지반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이런 생각에서 올바른 의제의 제출만이 아니라 그런 의제가 제대로 교환될 수 있는 전통, 유산, 의미망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앞서 간 혁명가의 삶이나 사회운동의 재서술, 『자본』의 학습, 당대 이론과 담론에 대한 논평 등은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다룬 것이다.

물론 의제와 이론적 전통은 현실의 투쟁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네 삶은 저마다의 크레인 위에, 철탑 위에 매달려 있으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비극도 언제나 남의 일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연단은 삶의 발언대이자 스케치북이기도 하다. ‘현장’에서 글을 보내주거나 인터뷰에 응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이 속에서 각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와 삶의 진실이 공유되기를 원한다.

 

‘기념일 투쟁’이라는 비웃음이 있긴 하지만, ‘사건’의 누적과 유실이 오늘을 규정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문제는 어떻게 기억하느냐이고, 그것은 또한 오늘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1980년 광주도 물론 그 이전의 사건들의 연쇄 속에서 벌어진 것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그 이후 역사의 준거점이자 버팀목이 되었다는 것이다. 광주 이후 우리는 민중을 발견했고, 계급을 검출했으며, 봉기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그 바람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 힘은 87년체제를 만들어내는 데 어떤 역할을 했다. 87년체제 속에서 우리는 이 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다른 한편 이 체제를 밑에서 허물고, 옆에서 구부리는 힘들과도 싸워야 했다. 어쨌든 그 결과가 바로 오늘이다.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모두 시대착오성 속에 그로테스크한 권력이 자리 잡았으며, 사회양극화라는 말로는 부족한 사회의 해체 속에서 민주주의는 형해화되었다. 우리가 지면을 통해서는 1년 동안, 다른 연단 위에서는 더 오랫동안 말하고자 한 것은 혁신의 절박함이었다. 이는 1980년 5월 26일 밤에서 다음날 새벽까지 도청에 있었던 사람들의 심정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다른 말로 하면 당대의 과제에 가장 충실하고자 하는 태도, 그것이 광주의 윤리였다.

100년을 훨씬 넘어서는 메이데이를 맞이하는 심정도 마찬가지이다. 민주노총 전 수석부위원장이자 좌파노동자회 대표 허영구는 메이데이의 기원이 된 노동시간 단축 투쟁, 한국에서 벌어진 노동운동의 좌절과 왜곡, 민주노총의 성립과 자본의 공세라는 역사를 다룬 후 다시금 장시간 노동이 문제가 되는 이 시대의 과제를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사영화 저지, 조합원들의 단결과 연대,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 등의 과제를 제시한다.

이렇게 보면 광주건 메이데이이건 그저 기념일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지평이 아니라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국제주의 전통이 어떻게 형성되고 실천되었는지를 서술한 ‘인터내셔널의 역사’에 관한 글도 마찬가지로 읽어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전통을 되살리고 유산을 재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과제 속에서 제대로 기억하는 것, 그것이 시간을 넘어 앞서 간 영혼들과 마주하는 것이다. 물론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정말 어렵다. 다만 묵묵한 발걸음이 배반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얼마 전에 만들어진 기본소득공동행동으로 기본소득이라는 의제가 좀 더 널리 주목받고 있다. 거꾸로 보면 기본소득공동행동을 가능케 한 것은 더 이상 이런 체제로 소박한 삶을 살아갈 수 없고 소박한 바람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 기본소득에 관한 우리의 논의가 깊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본소득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와 토픽 들에 대한 좀 더 정치한 논의가 필요한 이 시점에서 금민은 ‘사회화 형식’이라는 프레임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정치철학적 논구에서 대안 경제의 상상까지를 다루고자 한다. 이 논의 속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의제의 폭발력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얼마 전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간 박정훈 동지가 편지를 보내 왔다. 건강하다니 다행이며, 마음은 더욱 굳건해진 것 같다. 독자들의 관심과 지지를 바란다.

언제나 그렇지만 잡지 발간 1년을 맞이하면서 모든 필자와 독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좌파』라는 연단은 우리 모두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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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13호(2014년 5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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