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는 대안과 함께할 때 만들어진다

이번 4월의 후반에는 몇 가지 ‘일’이 예정되어 있다. 우선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일 년을 맞이한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조금 더 지나면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며칠만 지나면, 혹시 총파업이 계속되면 그 와중에 재보궐선거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기억과 선언과 투표가 있다.

곧 눈앞에서 벌어질 세 사건은 한국이라는 지형 위에서 시대의 흐름이 구체적인 형상을 취하는 일이다. 우선 세월호 참사는 계급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의 가장 취약한 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국가가 ‘공공의 것’이 아니라 특정 계급과 정치계급의 소유물이자 도구라는 것을 가장 그로테스크하게 드러내면서도 스캔들이라는 액세서리를 잊지 않았다. 물론 ‘공분’의 반대편에 일베들의 ‘모욕’을 배치함으로써 이런 국가와 이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시효 만료되었음을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제나 이런 시기에 문제는 대중의 ‘불만’이라는 스칼라 양을 벡터 양으로 바꾸는 일이다.

다음으로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그동안 이루어진 노동에 대한 공격, 그리고 이에 맞서는 ‘전투적’ 지도부의 등장으로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동안 누누이 강조했듯이 현재의 민주노총이라는 틀로 총파업의 ‘동력’을 모으거나 형성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건 지금의 민주노총이 분노를 일으키지도 못하고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분노’ 자체가 변화를 위한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분노가 ‘대안’과 만나거나 대안이 되지 못할 때에는 반동적인 힘이 되거나 최소한 흩어져 버린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리고 현재 대안은 신자유주의에서 나가는 출구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정치 및 주체의 문제와 만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현대 민주주의 혹은 더 최근의 포스트민주주의는 다수의 지향을 반영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의제민주주의의 현대적 모습인 다원주의의 자기 목표인 조절 기제마저 상실했으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자율성을 획득했다. 이것은 현대 국가 자체가 수탈 기구라는 것과 특히 신자유주의 국가의 계급적 성격 모두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정치는 봉쇄된 정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는 일이 될 것인데, 이는 또한 새로운 주체를 요구하는 일이다. 물론 이런 테제에 대해 추상적이라거나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 지금이 ‘정상 상태’라면 이런 테제는 시간성이라는 점에서 추상적이고, 적합성이라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한다면?

4월 말미에 있을 재보궐선거를 ‘진보 재편’의 계기로 삼자는 주장은 그 자체로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계기란 게 주체와 무관한 흐름이 아니라고 할 때 그런 태도는 고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보이고 있는 ‘4자’의 모습은 계기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면에서나 재편을 주도할 도덕적 헤게모니라는 면에서나 그리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정작 제기되고 토론되어야 할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뒷전으로 밀려난다. 누가 진보인가 아닌가가 아니고 우리 시대에 진보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하고, 기성 정치에서 어떻게 하면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구성할 수 있는 헤게모니는 어디서 오는가에 대답해야 한다.

아마 과거에 진보 혹은 좌파는 누구나 이념의 마르틴 루터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87년체제 속에서 실제로는 정치의 필리프 멜란히톤, 그것도 작은 멜란히톤들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운동의 토마스 뮌처가 아닐까? 물론 훨씬 노련한 뮌처이겠지만 말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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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24호(2015년 04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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