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머리에

사물은 흩어진다. 중심은 지탱되지 않는다.

오늘날 인간의 역사가 필연적으로 진보한다는 계몽사상의 교의가 믿음을 잃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확실한 것은 재난과 위험의 누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2011년 3월 후쿠시마원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전 세계가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합리적이라면 모든 사람의 삶을 커다란 위협으로 몰아넣는 핵발전을 중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3년 후인 2014년 4월 16일 오전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탐욕, 부패, 무능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구조부터 이후 대처까지 ‘국가’가 보여 준 무책임과 무능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대체 우리는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자조적인 대답을 강요했다. 1차 대전 직후에 예이츠가 말한 상황처럼 느껴진다. “사물은 흩어진다. 중심은 지탱되지 않는다.”

물론 수많은 사람은 한편으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마음속 칼을 갈면서 지방선거를 기다렸다. 그런데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대통령을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연출되면서 기묘한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있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와 상황으로서의 포스트민주주의를 확인했다고 해야 하나? 혹은 사람들은 분노만으로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나서지 않고 어떤 희망이나 가능성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움직인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배운 것인가?

이런 시간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리와 성취다. 경찰과 마주하면서 악다구니를 쓰고, 유인물은 발에 밟히고, 우리의 목소리가 번지고, 분노가 숨죽인 눈물로 바뀔 때 진짜로 세상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거시적인 눈으로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세계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거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특정한 시기에 태어나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 온 어떤 체제일 것이고, 다수의 삶을 지키고 체제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으나 또 이런저런 이유로 사라져 간 운동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체제의 종말 언저리에 와 있으며 새로운 운동이 정말로 새로운 체제를 형성하는 요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인간의 노력, 창조성,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은 췌언일지라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더 나빠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더 좋아질 수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면 누가 만들 수 있겠는가?

 

이 책이 나올 때쯤,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열다섯 번째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총회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는 1986년 벨기에 모임에서 만들어진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가 2004년에 이름을 바꾼 것이다. 한국네트워크는 2009년에 만들어졌고, 2010년 브라질 상파울루 총회에서 지구네트워크에 가입했으니 이번이 세 번째 참가다. 한국네트워크와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여럿이 다양한 주제를 발표할 것이다. 또 하나, 이번 총회에서 한국네트워크는 다음 BIEN 총회를 서울에서 열겠다고 제안할 것이다. 서울에서 총회가 열린다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리게 되는 것이며, 긴장, 모순, 위기의 동아시아가 전 세계에 전하는 메시지의 의미가 클 것이다. 한국네트워크는 당면한 사회적, 생태적 전환에서 기본소득이 차지하는 의미와 역할에 대해 그 어느 곳보다 천착해 왔으며 최근에는 기본소득공동행동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는 대중적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울 총회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판단이 유예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7월말에 있을 재보궐선거다. 한국의 정치 리듬으로 보자면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일정’이 있다. 그것은 조합원 직선으로 처음 치러질 민주노총 집행부 선거다. 민주노총이 이른바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판단을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 모두가 끊임없이 혁신을 외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혁신이라는 말이 공허하다는 것도 아마 대부분의 생각일 것이다.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 머릿속에서만 맴돌았기 때문이다. 다수가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민주노총 직선제는 아마 그럴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그 기회를 움켜쥐는 사람만이 혁신을 할 수 있고 미래를 그릴 것이다. 이것이 재림再臨일 수 있을까?

 

정진우 편집위원이 세월호 투쟁으로 구속되었다. 즉각 석방되어야 한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해서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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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15호(2014년 7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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