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쎄

『녹색평론』이라는 스핑크스

안효상 편집위원,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

마셜 맥루언이나 레지 드브레 같은 미디어 연구자들에 기대지 않고서도, 우리는 시기에 따라 매체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내용과 수용 모두를 규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반 위에서 볼 때 새로운 스마트폰의 출시조차 큰 관심을 끌지 못하는 오늘날, 잡지 형태의 정기간행물이 처한 운명은 부고訃告조차 돌리기 어려운 형편이다. 더구나 한국처럼 제도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경우, 사태는 음울하다 못해 처연할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격월간으로 벌써 20년 이상 발행되고 있는 『녹색평론』의 지속과 활력은 꽤나 기이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발행 규모(매호 5천부), 독자의 수용 정도 및 수용 방식 등을 보면 혹시 정기간행물의 시대가 다시 열렸거나 최소한 지나가지는 않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물론 이 글은 이런 현상에 대해 분석하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대략이나마 이 잡지의 ‘성공’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 혹은 좌파적 담론의 쇠퇴, 환경에 대한 관심, 양적 성장에 사로잡힌 노예 같은 삶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에 대한 바람 등이 당장 떠오르는 정세이며, 이 잡지는 기존 담론의 꺼져가는 불씨가 신선한 공기를 만나면서 터져 나온 역류와 같은 양상이다. 물론 그 역류가 거대하거나 강렬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태의 진전은 계기적으로 신선한 공기를 주입했다. 이런 점에서 꾸준할 수 있었고, 작지만 눈덩이효과 같은 것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규모가 크다 하더라도 게토는 게토일 뿐이며, 산상수훈山上垂訓은 넓은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울림을 얻기 힘들다. 이른바 녹색 담론과 녹색운동이 제한된 범위를 넘어서서 이행의 담론과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 계기의 포착과 지반의 확대가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녹색운동 자체를 확대하는 방식으로도, 담론의 기계적 결합 방식으로도 달성할 수 없는 과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녹색담론과 녹색운동에 그럴 만한 도킹 지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의 『녹색평론』을 검토하려는 것은 이런 지점을 찾음으로써 꽤나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상당히 모호하거나 무력하다는 의미에서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녹색-적색 담론과 정책의 접점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몇 년간의 잡지에 수록된 내용 전부를 검토하는 것은 아니며 몇 가지 주요한 주제도 다루지 못했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두는 것이 좋겠다.)

원문보기
이후 생략, 전체 글은 PDF파일을 다운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