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머리에

새로운 정치적 동맹을 형성하기 위한……

 

모두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진 않겠지만, 2008년 가을 이후 칼 폴라니에 대한 관심이 (케인스주의에 대한 재평가와 더불어) 상당히 커진 것은 분명했다. 이른바 자율적인 시장의 폭주가 시작되고, 특히 금융시장자본주의가 비대하게 커지면서, 원래의 약속과 달리 사람들의 삶이 불안하고 피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지탱하지 못하고 폭발하는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런 파괴적인 결과에 맞서 ‘사회를 보호하려는’ 운동이 구성될 수밖에 없고 또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폴라니에 주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폴라니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이 한국의 경박한 지적 풍토 때문이었을까?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여전히 규제 개혁과 시장을 떠드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이야 그렇다 치고,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조절적인 시장을 규제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이를 위해 별다른 방도를 제대로 모색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마치 대처 시절처럼 별다른 ‘대안이 없다TINA’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보호하자는 주장을 말 뜻 그대로의 의미에서 통제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낸시 프레이저의 「삼중 운동?: 폴라니 이후 정치적 위기의 속살을 파헤친다」(『뉴레프트리뷰』, 2014/5)는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는 이런 질문에서 시작한다. “21세기에는 어째서 이중 운동이 없는 것일까? 구조적인 조건으로부터 보자면 분명히 우호적인 상황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로부터 사회와 자연을 보호하고자 하는 반反헤게모니 프로젝트는 어째서 없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대안을 제시하기에 앞서 이 질문에 답하는 몇 가지 가설을 검토한다. “정치적 지도력의 실패”에서 원인을 찾는 첫 번째 가설을 생략하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금융화 속에서 과거에 사회보호의 기둥이었던 조직노동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일국적 틀은 허물어버렸지만 이를 대체할 만한 틀은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지구화 가설’)이다. 하지만 프레이저가 보기에 전자는 “계급관계만을 정치투쟁의 으뜸가는 혹은 유일한 터전으로 보면서 사회적 지위의 여러 관계들을 고찰”하지 못하고 있으며, 후자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 이외에 적절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어 프레이저는 폴라니 식의 이중 운동이라는 틀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현재의 지형을 삼중 운동이라고 부르자고 한다. 이때 고려되는 투쟁은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해서 확산된 여러 해방운동이다. “반인종주의운동, 반제국주의운동, 반전운동, 신좌파, 여성주의 제2세대, 성소수자해방운동, 다문화운동” 등이 그것이며, 이 운동들은 “재분배보다 사회적 인정에 더 초점을 두는 경우가 많았으며, 전후 기간의 복지국가와 발전국가에 제도화되어 있던 여러 형태의 사회보호 장치들에 지극히 비판적일 때가 많았다.” 이런 해방운동들도 총체적인 시장화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시장을 절대악으로 바라보면서 사회보호를 찬양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노동시장의 임금소득은 해방운동의 주요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삼중 운동의 각 항을 차지하는 세 가지 운동은 서로 교차하고 충돌하며, 원리 상 “세 세력들 각각은 다른 둘 중 하나와 동맹을 맺고 나머지 하나와 맞설 수 있다”라고 프레이저는 말한다. 그러니 사태는 복잡하며 사회정의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수용할 것을 요청한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해방의 프로젝트가 “신자유주의와의 위험한 내통 관계를 끊어버리고 사회보호운동과 일정한 원칙에 입각한 새로운 동맹”을 형성하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의 삼중 운동이라는 입론은 신자유주의의 위기 속에서도 왜 대안이 없는지, 혹은 왜 사람들이 대안으로 모이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된다. 물론 우리가 감각적으로 모르고 있던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프레이저 식으로 말하면,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 혹은 넓은 의미의 해방투쟁이라는 단일한 프로젝트를 형성하기 위해 어디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삼중 운동이라는 틀도 현재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생태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혹자는 생태주의운동을 프레이저가 말하는 해방운동에 넣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흐름은 인정을 추구하기보다 자연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을 통해 인간성을 재정립하려는 시도이며, 따라서 또 다른 항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성격은 녹색이 다양한 지향의 수식어로 이용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를 보호하는 투쟁이나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자 하는 투쟁과 갈등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우리가 추구하는 단일한 해방의 프로젝트는 ‘노동 중심성’으로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로도 환경보호로도 혹은 그 어떤 개별 정체성의 인정으로도 환원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것의 정치적 표현도 특정한 정당으로 축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쨌든 동맹의 형태를 띨 것이며, 이 속에 쟁투로서의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말 이름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불안정노동과 민주주의의 위기에 관한 금민의 두 편의 글은 프레이저 식 구분법에 따르면 금융화 가설에 근거한 입론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기본소득 도입 등의 패키지 정책을 대안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겨냥하는 지점은 훨씬 폭넓은 것이며, 다양한 해방운동 및 생태운동과 만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팽창적이다. 이런 접속과 팽창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동맹이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이번 호로 안재성 선생의 ‘식민지 시대 사회운동사’가 끝을 맺는다.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보고 달리는 우리에게 언제나 뒤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글이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아쉽다. 아마 새해부터는 또 다른 형식의 글로 독자를 찾아갈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해서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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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20호(2014년 12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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