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단

사회운동 민주주의를 정초하기 위하여

/ 금민 편집위원장

1. 무근거성

민주주의는 다의적이며, 때로는 정반대의 뜻조차 함축한다. 어떤 이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단지 보통선거와 같은 절차로 축소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사회적 권리를 포괄하는 주권의 의미로 확장하기도 한다. 어떤 때 그것은 정치체제, 곧 실정적 국가 제도를 뜻하지만, 어떤 때 그것은 형성된 정치체제나 제도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형성하는 원천을 지시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와 같은 불확정성이야말로 대립적인 여러 정치적 입장과 사회사상이 민주주의를 모두 표방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가장 넓게 사용된 정치적 개념이다. 여러 대립적인 정치사상에서 민주주의의 상이한 용례를 살펴보자면, 그것은 그야말로 텅 빈 기표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불평과 비난도 다의적으로 사용되어 온 민주주의 개념만큼 긴 역사, 멀리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 비판은 자유민주주의와 의회주의라는 특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표층에 머무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한 매우 제한된 비판에서도 민주주의의 무근거성이라는 심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무근거성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유일한 근거다. 민주주의적 정당성은 다수결이라는 형식의 외부에 놓이는 다른 심급의 정당성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성은 형식으로부터 나오며 내용적 정당성과 무관하다. 수적 다수가 반드시 진리나 정의의 근거가 아니라는 자명한 사실은 민주주의가 진리나 정의와 구별되는 별도의 심급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그래서 민주주의, 정의, 진리 등은 정당성이 수립되는 각기 다른 방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진리, 정의는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그런데 이 점이야말로 민주주의 비판의 가장 오랜 핵심이었으며 거꾸로 민주주의 옹호의 딜레마이기도 했다.

플라톤의 비판(『국가』 제8권)은 민주주의에 대한 진리정치적 비판의 고전에 해당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와 진리가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단순히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민주주의와 진리가 합치될 수 없다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즐겁고 무정부 상태이며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평등한 사람들에게도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일종의 평등을 배분하는”(8권, 558c) 통치 형태로서의 민주주의는 진리와 의견의 차이를 무화시키며, 무자격의 지배와 정치교육의 부재로 필연적으로 향락의 주체만을 생산한다. 플라톤의 비판은 정치 체제로서 민주주의가 생산하는 주체의 문제에 주목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진리정치가 합치될 수 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수적 다수가 늘 옳은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넘어서 민주주의는 항상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순간, 플라톤의 비판은 철인왕과 귀족적 진리정으로 귀결된다. 민주주의와 진리의 관계는 정치철학의 역사에서 최초로 민주주의를 철학의 핵심 문제로 사고한 루소에게도 딜레마로 나타난다. 설령 일반의지는 항상 옳다고 하더라도 인민의 판단이 늘 현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루소는 별 수 없이 데모스의 이상적 동질성과 현실적 이질성의 간극을 메워 주는 ‘시민종교religion civile’를 끌어들이게 된다. 이와 같은 궁여지책이 불가능하게 된 시대, 또는 모든 다양한 상품들이 화폐로 통약 가능하듯이 시장이 시민종교로 기능하게 된 시대에 일반의지란 중위 투표자의 의지에 불과하다. 일반의지란 다수의 의지라기보다 좌고우면하는 5% 중간층의 의지를 대표할 뿐이고, 정당들은 이들의 지지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는 포괄정당catch all party으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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