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론

버려진 산 자와 버려진 죽은 자들
― 그들이 돌아온다

/ 김성일 편집위원

 

9월, 대한민국이 버린 115명의 사람이 일본에서 귀국한다. 살아서는 아니지만. 돌아오는 것은 태평양전쟁 중에 징용된 후 홋카이도에서 강제노동 등으로 사망한 조선인들의 유골이다.  홋카이도에서는강제노동 등으로 사망한 조선인들의 유골이1970년대부터 시민에 의해 발굴/보관되어 왔다.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16명의 유골이 한반도로 돌아왔지만, 단 한 번도 정부에 의해 돌아온 적은 없었다.

태평양전쟁 당시에 발생한 유골 중 조선인 혹은 조선반도 출신자임이 확인된 유골은 1, 14구다. 한국 정부에도 정보 제공이 완료되었지만 지금까지는 물론 이번의 유골 반환도 한일 시민단체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115구의 유골이 한꺼번에 반환되는 것은 조선인이라는 것 외에 신원을 특정할 수 없는 유골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광복 70주년이라는 시기적 특성, 그리고 더 지체하면 유족도 찾을 수 없게 된다는 문제 때문이다. 이번에 돌아오는 115명은 구 미쓰비시 비바이美唄 탄광, 우류龍雨 댐 건설, 구 아사지노 일본 육군 비행장 건설의 희생자라고 한다.

1940년대에는 일본에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일부는 강제징용되었고, 일부는 식민지 치하에서 먹고살 길을 잃고 ‘내지’로 떠났다. 중일전쟁( 937년)이 발발한 다음 해, 일제는「국가총동원법」을 공포했다. 이어서 1939년에는 그 법에 기초해‘국민 징용령’을 실시하고 노동력을 징발하기 시작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100만 명의 조선인이 징발되었다. 그들은 전방의 전쟁터와 후방의 작업장으로 끌려갔다. 익히 알려진 나가사키의 미쓰비시조선소, 히로시마의 야스노발전소, 오사카의 우토로 마을을 비롯해 일본 본토에서도 많은 조선인이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했다. 945년, 강제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반드시 광복의 기쁨과 함께 온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굉음과 노란 빛의 기억이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8월 9일, 나가사키에도 원폭이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에는 5만 명, 나가사키에는 2만 명의 조선인이 살았다. 그중 4만여 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생존자 중 약 2만 3천여 명이 해방 후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다수 생존자는 원폭 후유증과 빈곤,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며 살아야했다. 원폭 피해자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원폭 투하가 정의로운 일이었다고 배우며 자라야 했다. 대다수 원폭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드러내길 꺼렸고, 현재 원폭피해자협회에 등록된 원폭 피해자 1세들은 2,600명가량에 불과하다.

고국은 그들을 책임지지 않았고 피해 실태조차 조사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를 위해 끌려가거나 불가피하게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미국 정부가 떨어뜨린 원폭으로 죽거나 후유증을 대물림하며 살아왔고, 한국 정부는 자국민을 줄곧 외면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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