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앞두고 모든 정당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그러면서 정당 내부에서 그리고 정치체제에서 꽤나 격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변화의 시작은 안철수 의원이 작년 12월 중순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야권 분열’로 새누리당이 커다란 ‘반사이익’을 누릴 것이고, 이는 국회선진화법을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180석까지 이번 총선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치까지 낳았다. 하지만 “정치란 생물”이란 말처럼 정치는 두려우면서도 변화무쌍한 어떤 것인가 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더불어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을 ‘영입’하면서 지형은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인격은 추상적인 가치의 상징일 수도 있지만, 정치에서 인격은 사실 ‘의제’의 체현자다. 이런 점은 과거의 이력이야 어떠하든 더불어민주당이 영입한 김종인 전 의원에 잘 들어맞는다. (김종인은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영입한 한상진 교수와는 효과가 다르다. 한상진 교수도 한때 ‘중민 이론’이란 것을 제출한 적이 있지만, 이것이 어떤 정치적 효과가 있는지는 현재까지 미지수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김종인 전 의원은 ‘경제민주화’의 주창자이며, 현행 헌법에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 즉 119조 제2항이 들어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김종인이기에 경제민주화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고, 정부와 새누리당이 급하게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이 얼마나 잘 이행되었는지를 발표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격이 어떤 의제의 체현자라 하더라도 아무 것이나 의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시대의 과제 일 뿐이다. 옥스팜이 얼마 전에 내놓은 보고서인 「1퍼센트를 위한 경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62명이 가진 부가 하위 36억 명이 가진 것보다 많다고 한다. 지난 5년 사이에 62명이 가진 부는 44퍼센트가 늘어난 데 반해 36억 명이 가진 것은 41퍼센트가 줄어든 결과다. 더 안 좋은 통계는 상위 1퍼센트가 가진 부가 나머지 전체의 부보다 커 졌다는 것이다. 원래 예상은 2016년이었으나 1년 앞당겨 이런 결과가 나왔다. 한국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은 굳이 숫자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러니 김종인 전 의원이 등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안철수 의원의 대권 의지가 탈당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양극화와 불평등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의제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정치공동체의 일부 구성원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을 경우, 그건 정치공동체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묻는 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는 「세계인권선언」에 나오는 “인류 가족”의 의미를 묻는 일로 나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 즉 생존의 권리, 더 나아가 자기 공동체에, 인류의 삶에 적절하게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치와 도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소득 기반 경제’와 ‘경제민주화’를 말하지만, 정작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지 않거나 추상적인 목표만을 제시할 뿐 구체적인 수단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다면 경제민주화는 공허한 슬로건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은 경제 위기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위기 탈출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그래서 ‘저성장’이 ‘뉴노멀’이라고 말해지는 시대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교의인 공급 위주의 경제학이나, 신조라 할 수 있는 감세와 규제 완화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많이 생산해서 더 많이 수출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경제체제도 해답이 될 수 없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교의와 신조는 바로 오늘날의 양극화와 빈곤의 주범이기에 오로지 극복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양극화와 빈곤을 줄이는 획기적 인 조치다. 경제민주화 조항이라고 말하는 대한민국 헌법 119조 제2항은 이에 대해 “적정한 소득의 분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다음으로 저성장 시대에 맞는 경제 모델을 찾아야 한다. 사실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강의 방향을 말하기는 한다. 바로 ‘내수 중심 경제’, 다시 말해 지금까지의 극단적인 수출 의존에서 벗어나 수출과 내수가 균형을 이루는 경제 말이다. 물론 여기에 더해 비물질적 노동과 케어 경제가 더해져야 할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이를 문화사회로의 전환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양극화와 빈곤을 줄이기 위해서도, 내수를 살리기 위해서도 다수의, 아니 모두의 소득이 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이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경우 최저소득이 보장되어야 하고 일자리 자체가 안전하고 안정되어야 한다. 21세기에 최저임금 1만 원과 주당 35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게 부당한 일인가? 맑은 눈과 뜨거운 가슴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이것만이 아니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다양한 인간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고용을 통한 소득 이외에 모두에게 주어지는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오로지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받는 기본소득은 모든 구성원의 기본적인 생존을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정치공동체에 대해, 이 속에서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 다시 사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정치공동체를 ‘리셋’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앞서 말한 헌법 조항이 보장하는 바이다. “국가는 ……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물론 이 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국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이 87년이라는 격동을 거치면서 만들어졌고, 경제민주화라는 문제의식 자체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 속에서 핀 꽃이며,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사회복지가 대공황, 파시즘,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화 속에서 맺은 열매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말하는 경제민주화, 즉 거대한 사회 변화가 쉽게 일어난다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잘못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총선을 앞두고 제기된 경제민주화가 당장 어떤 결실을 낳을 것 같지는 않다. 도리어 총선이라는 열린 정치적 공간이 경제민주화로 가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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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4호(2016년 02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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