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과 차이

기시감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반복이라고 하는 게 나을 듯싶다. 기시감이라고 하면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반복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듯이 희극으로 끝난다.

역사 교과서라는 사태가 개인의 과욕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고도의 정치적 계산인지 분명하게 알기 어렵고, 사태의 전개에 따라 다양한 이용 방법이 모색될 것이기 때문에 그 의도는 더욱 혼탁해질 것이지만, 온 세상이 이 문제를 둘러싸고 홍해처럼 갈라진 건 분명하다. 하지만 더 분명한 것은 대칭적으로 갈라진 것으로 아니라 매우 비대칭적으로 갈라져 국정화 반대 전선에 다양한 세력과 사람이 집결했다는 것이다. 만약 정치를 스포츠에 비유할 수 있다면 심판은 마음속으로 이미 승부를 결정했을 것이다.

이건 어떻게 보더라도 ‘87년 체제’의 효과라 할 수 있다. 우선 교과서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교과서에 담길 내용의 학문적 기초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합의, 교과서 자체가 다양해야 하며 국가가 거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원칙의 인정, 그리고 무엇보다 독단적이면서도 비밀리에 이루어진 그 과정에 대한 반발 등이 이 전선이 확대된 이유다. 그 위에 우리 역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충돌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최소한 하나의 정상적인 국민국가로서, 식민지 잔재에 대한 청산의 열망,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여야 한다는 정치적 방향 등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압도하는 기초다. 87년 체제의 효과라고 하는 것은 이런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다수의 동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통령의 개인적 욕망이든, 그의 국가관이든, 그 무엇 때문이든 간에 이 ‘역사 전쟁’이 유신 시대의 모습과 판에 박힌 듯 똑같아 보여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희극으로 끝날 것이다. 물론 그 희극을 보기 위한 우리의 투쟁이 비극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반복은 최근에 새로 대표가 선출된 노동당에서 볼 수 있다. 새 대표단이 들어서고 중앙당이 어느 정도 정돈을 하면서, ‘진보 결집’을 둘러싼 혼란이 끝나고 노동당은 외형상 안정을 찾은 듯하다. 하지만 지난 번 전국위원회를 보건, 이렇게 저렇게 나오는 의견을 보건 이른바 당내 갈등은 갈등 이상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정파 사이나 개인 사이의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야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질 수도 있고 아니면 더 굳어질 수도 있다. 마음의 문제를 어떻게 논리로 바꿀 수 있겠는가? 문제는 정세에 대한 이해, 하나의 정치세력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의 근거 등을 둘러싼 차이일 것이다. 여기서 반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뿌리 깊은 철학의 차이가 갈등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근대 사회운동의 전제는 다수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다수를 말하는 소수의 집단, 과거에는 혁명가라고 불렀고 오늘날에는 그냥 평범하게 정치가라고 부르는 집단이 다수와 구분되어 있다. 문제는 소수가 다수를 어떻게 획득하고 동원할 것인가다. 어떤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즉 삶의 현장에서 다수를 조금씩 획득하고 조직해 가는 것이 일차적 과제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수를 짧은 시간에 획득하고 동원할 수 있는 선명한 의제와 투쟁이 소수의 과제라고 말한다. 이를 둘러싸고 전자는 후자를 맹동주의라고 공격하기도 하고, 후자는 전자를 점진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진리라고 말하기는 사실 어렵다. 마찬가지로 “봉기 앞에서 주저하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레닌의 말이나 대중과 전위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비유한 마오의 말이나 다 진리라 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와 정세에 준거할 수밖에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역사와 정세에 준거한 주체의 과제 설정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지금이 대장정을 통해 주체의 힘을 모으는 시기인지 아니면 ‘선도적인 투쟁’을 통해 확산의 불꽃을 기대할 수 있는 때인지? 물론 이것 또한 주체의 역량에 대한 평가를 빼놓고 할 수 있는 판단은 아니다. 대장정이 되었건 선도적인 투쟁이 되었건 자기 힘에 대한 타산 없이 일을 벌인다면 그것은 망상이거나 책임 회피가 될 것이다.

따라서 고집스러운 말이 아니라 정세와 역량에 대한 판단과 타산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그렇지 못한 것이 우려스러운 일이고, 반복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 반복은 희극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제대로 토론되고 실천되지 못한다면 미완성으로 끝나고 그것은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볼썽사나운 장면을 연출할 것이며, 전체적으로 비극일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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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1호(2015년 11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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