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흐름과 인간의 시간이 꼭 같지 않다는 것을 해가 바뀔 때만큼 심하게 느낄 때가 없다. 마음 같아서야 모두가 한 해를 보내고 또 맞는 시간을 차분한 휴식과 정리의 호흡으로 보냈으면 좋겠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렇지 못하다. 우선 한국의 정치 일정 자체가 이를 가로막는다. 예산을 다루는 정기국회에 의해 언제나 임시국회가 국민과 민생의 이름으로 열린다. 그런데 이 임시국회에서 처리하려는 법안들이 지금의 ‘노동 개악’에서 볼 수 있듯이 대개 국민과 민생을 어렵게 하는 것이기에 우리의 연말연시는 고단하다. 물론 이것만이라면 개선의 여지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길게 보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순들이 일부 해결되면서 언제나 새롭게 중첩되고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노동 개혁’이라는 이름의 개악도 경제 위기 시대에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한국의 대자본이 결국 노동 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를 벗어나 보려는,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고육지책에 불과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헬조선’이 은유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일 뿐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는 것은, 가져야 하는 것은 섬광처럼 비치는 열망과 변화다. 2015년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려는 대중의 정치적 표현이 가장 의미 있게 드러난 것은 1월에 있었던 그리스 시리자의 집권과 12월에 드러난 스페인 포데모스의 약진이다. 물론 시리자의 ‘굴복’이 커다란 실망감을 준 것이 사실이고, 포데모스의 약진도 등장할 때의 열광에 비하면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길게 보자.

신자유주의의 승리는 이제 꽤나 오래된 일이며, 이로 인해 우리가 받은 상처는 뿌리가 깊다.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지나면서, 좌파는 저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히틀러가 차근차근 군비를 증강하고 주변의 약한 곳을 침략할 때마다 거기까지만 양보하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이른바 유화 정책과 비슷한 태도를 보인 게 좌파였다. 자기들은 살릴 수 없는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자들이 살릴 수 있다고 보았던 게 아닐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좌파의 성공은 자본주의의 성공과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비슷한 점은 여기까지다. 전면적인 전쟁 속에서 당시에는 어쨌든 반파시즘 동맹이 형성되었고 결국 ‘민주주의의 승리’를 가져오기는 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밀린 좌파는 광범위한 전선의 형성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모방하는 길을 택했다. 트로이의 목마를 탄 셈이다. 정치적 대안이 없던 대중이 차선으로 이들을 지지했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유럽에서는 다시금 좌파가 약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권한 좌파가 한 일은 신자유주의를 되돌리거나 다른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발밑을 파는 것이었다. 이미 트로이의 목마는 살아 있는 말이 되었고 자기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9년 ‘시애틀 전투’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수준의 대중 저항은 가능한 곳에서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적에 대한 새로운 이해, 여기에 맞서는 대안의 형성 등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었다. 이는 2000년대 들어 라틴아메리카의 ‘핑크 타이드’를 형성했고,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친 게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라틴아메리카의 변화는 또 다른 ‘약한 고리론’을 낳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2008년 중심부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는 지배층의 뉴딜을 낳지 못하고 대중의 ‘누벨 바그’를 형성했다. 2011년에 시작된 점거 운동이 그것이다. 이것이 1930년대와의 차이다. 당시에는 경제 위기 속에서 지배층이 ‘수동 혁명’을 벌였고 좌파는 전통적인 대응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어떤 수동 혁명도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며, 프랑스대혁명 직전의 귀족의 ‘전혁명’이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결국 여기에 맞서는 길은 대중의 분출일 수밖에 없다. 대중의 분출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 2015년 1월 그리스 시리자의 집권이다. 어쨌든 시리자의 승리는 대중이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비록 물려받은 부채 때문에, 그리고 유럽이라는 스핑크스 때문에 단번의 탈주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일단 알렉시스 치프라스라는 정치인 개인의 야심은 논외로 하자.) 그리고 12월에 스페인 포데모스의 약진이 있었다. 이로 인해 스페인의 양당 체제가 끝나고 ‘불안정한 상태’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따라서 앞날은 안개 속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리자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포데모스는 ‘분노한 사람들’이라는 대중의 분출이라는 파도를 타면서 등장한 정치세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난 사반세기 이상 새로운 좌파 정치세력의 등장을 이만큼 강렬하게 보여 준 일이 없다고 할 수 있으며, 여기서 핵심은 대중에게 어떻게 대안을 제시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광이 아니라 냉정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열광의 흐름을 어떤 방향으로 가져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냉정한 사고다. 지금까지 나타난 대중의 열광은 ‘반긴축’으로 표현되듯이 기존 체제에 대한 거부로 나타났을 뿐이다. 물론 앞서도 말한 것처럼,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감안할 때 이는 대단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래된 미래’와 ‘주변의 미래’를 벼려 내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지전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진지전을 시작하기 위한 기동전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의 비판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좌파는 기동전의 패기를 잃어버리고 진지전만을 고수함으로써 그 진지마저 잃어버리는 우를 범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유형의 싸움만을 고집하는 것은 전략의 부재를 보여 줄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전략은 무엇일까? 중도파의 일부마저 청년 세대를 향해 ‘분노하라’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무너지는 느낌 속에 ‘두 개의 나라’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때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는 개입이라는 방식의 기동전이다. 물론 이는 언제나 뇌관만 불타고 끝나 버릴 수 있다. 또 다른 과제와 결합할 때만 그 뇌관은 마른 풀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또 다른 하나는 기존 체제의 불가능성에 대한 설파인데, 이는 오직 대안의 제시로만 가능하다. 오늘날 한국에서 어떤 정치세력이 스스로를 좌파라고 한다면,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원문보기
이 글은 제33호(2016년 01월호) <책 머리에>이다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