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체제 개혁과 경제모델 전환

/ 금민 편집위원장, 장흥배 노동당 정책실장

 

1. 들어가며 ― 증세정치를 위한 문제 설정의 전환

복지 논의는 무성하지만 적극적인 증세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내건 복지 공약은 집권 후 차근차근 파기되었다. 이에 ‘증세 없는 복지’는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대두되었지만, 정작 증세론은 개별 복지 공약의 재정 조달이라는 한정된 문제의식을 맴돌 뿐이다. 2016년 총선을 몇 달 앞 둔 현재도 마찬가지다. 때마침 바닥난 보육 예산으로 복지제도의 재정 기반에 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공론장의 쟁점은 재정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둘러싸고 소위 국고보조사업의 재정 분담의 틀 안에서만 맴돌았고 본격적인 증세 논쟁을 불붙이지는 못했다. 지난 대선과는 달리 새누리당의 태도는 성남시의 청년배당에서 엿보이듯이 복지 확대를 포퓰리즘으로 몰아붙이는 것으로 바뀐 것 같다. 그럼에도 4월 총선에서는 ‘깨알 같은’ 복지 공약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새누리당도 여기에 부분적으로 동참할 것이다. 하지만 누가 무슨 공약을 내걸 건 정작 증세 문제는 개별 공약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알리바이 정도로 취급되어 뒷전으로 밀릴 것이다. 복지와 증세는 동전의 양면이지만, 새누리당은 여전히 박근혜 ‘후보’의 증세 없는 복지나 우회 증세의 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등 제도권 야당들도 선별적인 복지 공약에 각종 감면 철폐 등‘ 부자 감세’ 철회를 연동하는 기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거대 정당의 아젠더에서 ‘증세정치’가 실종된 상태에서는 현재의 낮은 복지에 대한 부분적인 개선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큰 정당들이 조세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증세정치를 이슈화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유권자 다수가 복지 확대를 지지하지만 재원 마련을 위한 증세까지 고려하면 사태는 복잡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정부가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폐지한다고 발표했을 당시에 과세 대상자는 3만 명에 불과했고 서민들에게 돌아가는 감세 혜택은 전혀 없었음에도 찬성 여론은 60%가량이었다. 물론 이로부터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특히 2010년 지방선거부터 2012년 총선과 대선 시기에는 복지 공약 경쟁이 벌어졌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복지 확대를 위해서는 증세를 감수할 수 있다는 공감대도 확산되었다. 실제로 한국복지패널 부가조사는 ‘복지 증세’에 대한 찬성이 2007년 37.9%, 2010년 52.5%, 2013년 54.7%로 증가함을 보여 준다. 추세적 증가 경향뿐만 아니라 2010년에는 압도적으로 증가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2010년은 무상급식 등 복지 논쟁이 가장 큰 이슈였던 해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지 증세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자세히 보면, 증세와 감세에 대한 국민 의식은 매우 복잡하다. 예컨대 5점 척도로 경제성장을 위한 감세와 사회복지를 위한 증세에 대한 지지도를 비교하면 각각 3.0과 3.2로, 복지 확대를 위한 증세에 대한 지지가 다소 높지만 경제성장을 위한 감세에도 3.0의 높은 지지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대략 10%의 응답자가 성장을 위한 감세와 복지를 위한 증세에 모두 찬성한 것이다. 이로부터 확인되는 점은 감세는 경제성장으로 이어질 때, 반면에 증세는 복지와 연동될 때 다수의 지지를 얻는다는 진부한 사실 정도다. 결국 부자 감세도 성장으로 이어진다면 대략 60%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이는 신자유주의의 조세 이데올로기 구조와 동일하다. 신자유주의의 조세체계는 공급 중시 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에 기초한 대대적인 감세 정책이었고, 이러한 정책은 법인세와 소득세 최고 구간 감세를 통해 투자를 늘리는 한편 근로소득세 감면을 통해 노동 유인을 제고하여 성장을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추진되었다. 비록 2013년 조사이지만 지금 조사한다고 해도 경제성장을 위한 감세에 대한 지지도는 비슷하게 나타날 것이다. 물론 1998년 이후 한국 신자유주의의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인해 ‘낙수효과 경제학 trickle-down economy’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깨진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기업이 투자를 늘려서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 이외에 달리 기대할 것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감세, 투자, 고용으로 경제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는 가설을 꼭 믿어서가 아니라 믿을 만한 다른 대안을 알지 못하기에 현재의 경제모델과 조세체제를 마치 자연법칙인 양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한국에서 정치공동체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역사적 사실, 이로부터 연원하는 국가에 대한 불신도 증세정치에 대한 대중의 의혹에 톡톡히 한몫한다.

증세정치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문제 설정의 전환이 필요하다. 증세에 대한 접근법을 복지의 재정적 기초라는 관점만이 아니라 경제모델의 전환이라는 관점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임금 주도 성장론 또는 이의 변용으로서의 소득 주도 성장론은 경제체제 전환의 관점에서 조세체제 개혁을 바라볼 수 있는 출발점을 제공한다. 소득 주도 성장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증세도 복지도 모두 성장을 위한 것이고 증세의 경제적 합리성은 복지와 성장을 위한 것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비록 소득 주도 성장론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고율의 누진소득세를 특징으로 하는 서유럽의 1950년대와 60년대 조세체제는 소득 주도 성장론의 수미일관한 귀결이 될 것이다. 1950년대와 60년대 서유럽의 누진세제는 기업과 부자의 조세부담으로 복지를 확대하고 노동소득을 안정화하여 소비를 늘리고 늘어난 소비를 통해 투자, 고용, 성장의 선순환을 만든다는 가정에 입각했다. 복지 확대, 소비·투자·고용의 확대, 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은 한국의 소득주도 성장론의 전제이기도 하지만, 소득 주도 성장론은 고부담 누진 소득세 중심의 조세체제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조세체제 전환이 소득 주도 성장론에서 주변적인 의제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소득 주도 성장론뿐만 아니라 경제모델 전환에 관한 여러 종류의 이론적 모색에서 조세체제 전환이 중심적 의제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매우 긴 시기 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현행 조세체제의 역사성과 관련된다. 한국의 현행 조세체제는 신자유주의의 감세 기조와 더불어 탄생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이래로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한국에는 저부담 간접세 중심의 현행 조세체제 이전에 고부담 누진소득세 중심의 조세체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재보다 훨씬 더 저부담인 간접세 중심인 개발도상국의 수출 주도 성장형 조세체제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부담 누진소득세 중심의 조세체제로의 전환은 박정희 이래로 현재의 신자유주의까지 이어지는 수출 주도 성장형 경제모델에 대한 폐기를 의미한다. 소득 주도 성장론이 단순히 1998년 이후의 신자유주의로부터의 탈피뿐만 아니라 수출 주도 성장 모델의 폐기를 함축하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조세체제 전환은 주변적 의제로 머물 수 없다.

소득 주도 성장론은 경제모델 전환의 관점에서 조세체제 전환과 증세를 제기할 수 있는 유용한 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득 주도 성장론에 함축된‘성장을 위한 증세’라는 가설은 현재의 세계경제 저성장 국면에서 그 현실성이 의심된다. 선진국의 부채 의존 성장과 신흥국의 수출 주도 성장의 두 축이 모두 무너진 상태에서 세계경제는 장기 침체로부터 벗어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한국과 같이 수출의존도가 높은 국가에서는 수출이 급격히 감소하여 내수 확대로 충격을 해소하여도 저성장이 불가피한 국면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성장을 위한 증세’라는 명분으로 조세체제 전환을 주장하는 것은 현실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단지 납세 능력에 따른 공평 과세나 조세 정의에만 입각하여 누진직접세 중심의 조세체제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것은 조세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경제체제에 대한 적극적 모색이 필요한 저성장 장기 침체의 상황에서 누진소득세 중심의 조세체제 수립은 그러한 전환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을 보이는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저성장 국면으로 인하여 박정희 이래로의 한국 조세체제의 근본적 전환이 불가피하게되었다. 저성장 시대의 개막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수출 주도 성장 모델에서 벗어나서 소득 기반 경제로 경제모델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제하며, 이와 같은 전환을 위해서는 조세체제의 근본적 개혁을 더 이상 지연할 수 없게 되었다.소득 주도 성장론에서 나올 수 있는 증세론이 ‘성장을 위한 증세’라면, 소득 기반 경제를 위한 증세는 ‘저성장 시대에 경제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증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이현주·강상경·김수완 ·이선우·전지현, 『근로 및 사회정책에 대한 국민의식 분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3년.
** 여기에 관해서는『 좌파』 2015년 12월호 금민의 글「 저성장 시대, 대안은 무엇인가?」와 2016년 2월호 유승경의 글「 2016년 세계 및 한국 경제 전망 (1)」을 참조하라.
*** 소득 기반 경제의 개념과 특징에 대해서는『 좌파』 2015년 12월호에 실린 앞의 금민의 글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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