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leftmonthly_201606

 

시간의 위대함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다. 참혹하거나 허망한 사건조차 대개 시간의 힘을 이기기 어렵다. 물론 사람들에게 이는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사건 이전의 사고와 관행을 지속하는 게 하나다. 다른 하나는 사건의 충격을 새로운 일상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어쨌든 겉모습은 차분하다. 하지만 그 밑에서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 흐른다.

노동당과 같은 좌파정당이 지난 총선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은 비단 숫자로 나타난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당이 의지의 결사체라 할 때 당장은 득표가 사람들의 생각과 의지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말 그대로 저조한 득표로 이어져 온 이 당의 역사와 상태다. 따라서 사람들이 숫자에서 읽은 것은 어떤 경향성이었는데, 그 끝에는 아마 소멸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을 것이다.

물론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고, 이른바 자기 사명이란 것을 다했다고 한다면 억지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의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시대의 과제가 사라진 게 아니고, 역사는 종말을 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장의 실패를 딛고 새로이 시작해 보겠다고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새롭게 시작한다고 해도 그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현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기에 지극히 유물론적이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개인들의 삶이 있고, 서로 다른 생각과 지향이 있는 그룹이 있고, 매일 같이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있다. 결국 문제는 어느 정도로 단절할 수 있는가다. 다시 말해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혹은 나날의 투쟁을 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어떻게 준비하고 감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럼에도 우리의 준거점은 앞서 말한 시대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를 ‘포르투나’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주체와 떨어져 있는 포르투나는 이를 정확하게 가리키지는 못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시대의 과제는 주체에게 파악된 포르투나다. 그런데 그 주체는 다시 포르투나 하에서 시대의 과제에 의해 형성된다. 현재 우리는 이런 파악과 형성의 상호작용 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대중에게 호소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건 매력적인 정책과 공약을 내놓지 못해서가 아니다. 대중에게 다가갈 맥루언의 의미에서의 매체가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당 자체가 매체인데,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거나 겉모습만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른바 진보정당운동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 되겠지만, 매체로서의 정당을 새롭게 시작할 수 밖에 없고, 그건 세상만사가 그러하듯이 새로운 인격들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는 의지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단절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도 조금은 분명해질 것이다. 그건 새로운 인격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며, 매체로서의 정당을 시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바꾸어야 한다면 이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무거움을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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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8호(2016년 06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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