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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가 끊임없이 바뀌어 왔다고 하지만 인간이 매우 보수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싸움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싸움이 언제나 극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플롯은 대개 같았다. 누구의 말처럼 처음에 새로운 생각은 언제나 미친 소리나 허튼소리로 취급당했다. 그 다음은 예상할 수 있듯이 ‘그런 생각도 있을 수 있지’ 정도였다. 그 다음은 대다수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꼭 이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지금 여기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생각이 비슷한 궤적을 걷고 있다는 느낌이다. 거의 십 년 전쯤 이 아이디어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정말 소수였다. 그러니 논란이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2016년 봄을 지나면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갔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보인다. 제법 인기 있는 케이블 방송의, 그래도 토론 프로그램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어느 정도는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야당 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기본소득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변화가 부지불식간에 온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몸으로 느끼기는 참 어려운 법이다. 몇 달도 지나지 않은 지난 총선에서 노동당과 녹색당이 기본소득을 중심적인 공약으로 내세웠을 때 이를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꼭 선거 결과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6월초에 있었던 스위스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전후로 기본소득은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평범하게 말하면 시대의 문제와 맞닿았기 때문일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의 징후 몇 가지를 생각하면 기본소득 이외에 다른 대답을 찾기 어렵다. 소득과 고용이 모두 불안정한 신자유주의 위기의 시대, 인공지능과 자동화의 진전으로 인간 노동력이 별로 필요 없게 되는 시대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고용과 소득과 소비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저성장의 지속, 디지털 사회, 생태적 위기, 고령화 시대 등등을 고려할 때, 물질적 생산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문화적이고 관계적인 사회경제체제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진전과 형해화라는 아이러니를 고려할 때, 정치의 활성화를 위한 사회적 조치가 요구된다. 이런 여러 도전에 우리가 맞서기 위해 기본소득은 더 이상 미친 소리나 허튼소리가 아니라 들을 만한 생각이 되었다.

하지만 싸움은 이제부터일 것이다. 이미 기성 이데올로그들은 그 나름대로 기본소득의 쟁점을 설정하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근로 의욕의 상실’이 일어날 것이라든지, 들어가는 돈의 양과 마련 방법 등이 문제라든지 하면서 이러저러한 논리를 펴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듣고 있자면 마치 프랑스대혁명을 전후로 해서 이데올로기로서 가장 먼저 등장한 보수주의의 논변을 듣는 것 같다. 기본소득의 발상이나 필요성은 이해하겠지만 기본소득이 실시될 정도로 큰 변화는 쉽게 오는 게 아니다, 그러니 천천히 생각해 보자, 혹은 다른 일도 중요한 게 많으니 그것부터 하자, 등등.

이렇게 어떤 새로운 것이나 변화의 필요성 혹은 불가피성은 인정하되 가능하면 이를 지연하려는 것이 보수주의의 태도라 할 때, 기본소득이 벌여야 하는 싸움도 이제 이런 지형에 놓이게 되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는 기존의 틀에서 논쟁을 벌이는 방식이다. 지불노동과 소득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근로 의욕 운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조세개혁을 통해 조세부담률을 높이거나 공유자산을 활용해서 재원을 마련하자는 것에 대해 그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반론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제 논의의 지반을 바꾸어야 할 때다. 우리는 그저 기존 체제에 기본소득을 더하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이 체제 자체를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어 보자는 것이다.

7월 7일부터 9일까지 열리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의 주제가 ‘사회적, 생태적 전환과 기본소득’인 것은 이런 이유다. 그런데 그 새로운 체제의 지향과 구성 원리는 사람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느끼는 것만큼 새로운 게 전혀 아니다. 그건 정말로 오래된 어떤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 즉 자유롭고 존엄하게 사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기본소득이라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가장 보수적인 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 지킬 것과 바꿀 것을 분명히 하는 것, 그게 논의를 제대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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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9호(2016년 07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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