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한 패배자, 조봉암

/ 안재성

  1. ‘죽산새’의 전설

1956년 5월 15일의 제3대 대통령 선거를 맞아 조봉암 후보의 선거운동원들이 공유하던 지침이다.

한 장소에서 5분 이상 유세하지 말 것. 10분이 넘으면 테러단 또는 경찰이 와서 잡아 가두고 때리니까.
테러단이나 경찰이 알면 맞아 죽으니 밤에 자는 곳을 모르게 할 것. 5월이니까 안전한 숙소가 없으면 들에서 잘 것.

진보당추진위 운동원들은 돈이 없어 점심은 굶는 게 원칙이었다. 자동차가 없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유세를 하러 다녔다. 벽보를 붙이고 있으면 자유당 정치깡패들이 몰려와 구타를 하고 벽보를 빼앗아 갔다. 한밤에 몰래 벽보를 붙여 놓으면 다음날 오전이면 찢겨 사라졌다.

대통령 후보 조봉암의 유세도 마찬가지였다. 소도시들은 테러단이 유세 자체를 봉쇄해 대도시만 다녔는데, 유세장의 마이크 선을 절단해 버리거나 깡패들이 난입해 엉망을 만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일제강점기 종로 깡패였던 김두한이 한때 진보당에 가담해 천도교 청년 회원 수십 명과 함께 유세장을 지키며 자유당 깡패들과 격투를 벌이기도 했다.

중앙당은 각 지방으로 ‘전국순회 유세반’을 파견하는데,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로 파견된 세 명은 가자마자 매를 맞아 부상을 입은 채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경상도 지역 유세를 맡은 전세룡만은 선거 전날까지 주요 도시를 돌며 찬조 유세를 하는 데 성공한다. 위의 지침을 잘 지켰기 때문이다.

그때의 사정이다. 부산에서 진주까지 사흘에 걸쳐 걸어가는, 요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도 자못 낭만적이다.

전세룡의 증언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숙소였다. 당원 동지를 만나기 어렵고 또한 만나도 여분의 방이 없었다. 밥을 얻어먹고 택시 안에서 앉아 잤다. 어떤 때는 낮에 시골길을 가다가 시원한 들에서 낮잠을 잤다. 참으로 꿀잠이었다. 이렇게 하여 3일 만의 저녁에 진주에서 성낙준 동지를 만나서 참으로 반가웠고 살 것만 같았다. 성낙준 동지는 내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처지인지라 우선 술방에 가서 몇 잔 마시고 탄금 소리에 곤히 잠들었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 남강에 세수하고 촉석루와 논개 사당을 보고 논개가 우는 남강 물속을 들여다보며 시를 읊었다.

당시 진보당추진위는 발족한 지 불과 2개월에 당원은 3천 명밖에 되지 않았다. 재정이라고는 조봉암이 약수동의 작은 셋집에 살면서 수년간 모아 두었던 1천만원과 부통령 후보로 동반 출마한 박기출이 낸 700만원, 당 간부들이 개별적으로 친구들에게 구걸해 온 약간의 모금이 전부였다. 선거 벽보조차 제대로 찍지 못할 지경이었다.

반면, 고무신과 돈 봉투로 상징되는 자유당의 금권, 관권 선거는 새삼 나열할 필요도 없이 엄청났다. 투표장은 물론 개표장도 무법천지였다. 야당 참관인은 깡패들에게 쫓겨난 가운데 조봉암의 표에 이승만 표 몇 장을 얹어 백 장 묶음으로 만들거나 사전에 무더기로 투표된 이승만 표가 40%에 이르는 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