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이 우연이 아닐 때

/ 임영근

겨울이면 으레 큰판이 벌어지게 마련이었다. 저 아랫동네 누구네 집에서 판이 벌어졌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감히 가 보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그런 판에 낄 리는 없었으므로 심부름을 핑계로 슬쩍 한번가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젯밤에 작은아버지가 다녀갔다고 어머니한테 걱정스럽게 얘기하는 작은어머니를 옆에서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긁어 갔다고 한숨짓는다. 작은어머니는 어디서 들었는지 오늘은 ‘끗발’이 좀 오르고 있다고 금세 들뜬 목소리로 말했지만, 한 가닥 기대 뒤에 숨은 걱정의 기색은 감출 수 없었다. 어쨌든 어젯밤에 작은아버지가 돈을 챙기며 속옷도 갈아입고 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이들도 판을 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이 차이가 별로 없어 형처럼 따르던 오촌 아저씨 집에 자주 가곤 했는데, 늘 놀 거리가 있었다. 형 같은 아저씨를 따라 갯지렁이를 잡으러 바다에 가거나, 칡을 캐고 덫을 놓는다며 일출봉에 오르기도 했다. 날씨가 추운 겨울이면 만화책이 쌓여 있어서 좋았다.

아저씨 집에 모여 뒹굴며 만화책을 보던 동네 형들이 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섰다’니 ‘도리짓고땡’이니 하는 놀음을 그때 처음 보게 되었다. 가난한 살림에 어디서들 그렇게 많은 돈이 났는지 내가 상상하기 힘든 돈이 오고갔다. 저 형이 이렇게 명민하고 배짱이 두둑했던가 싶은 경우도 있었고, 평소에 깐죽대던 모습 그대로 괜히 트집을 잡으며 맥을 끊는 형도 있었다. 평소의 과묵한 모습과 달리 무엇때문에 수가 틀렸는지 불같이 화를 내어 주먹다짐 직전까지 갈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일이 가끔 있기도 했지만,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우스갯소리가 오가는 판은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임에 틀림없었다.

능숙하게 패를 돌리고, 화투 패를 쪼아보며 오늘은 패가 왜 이리 안 들어오느냐는 둥 엄살을 부리기도 하고, 오늘은 좀 되는 날이라며 상대방의 비위를 살짝 건드리기도 했고, 못 이기는 척 돈을 걸기도 하고, 겁을 주려는 듯 큰돈을 걸기도 하여, 판이 흘러가는 모양새가 어른들도 이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동네 형들이 다들 어른스러워 보였다.

고3 교실이라고 해서 큰판이 비켜가지는 않았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24시간 열려 있어서 학교에서 먹고 자며 공부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런 고3 생활의 압박은 어떤 식으로든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공부와 더위에 지쳐 갈 무렵 학교에서 큰판이 벌어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말만 들어도 간이 쪼그라들것만 같았다. ‘등록금’을 걸고 판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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