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2018

탄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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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탄핵되고 청와대를 비웠다고 해서 사태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당장의 관심은 박근혜 씨를 구속하느냐 마느냐에 쏠려 있다. 검찰총장이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했으니 지켜볼 일이다. (이 글이 인쇄될 때쯤에는 이미 결말이 나 있을 것이다.)

촛불집회라는 대중의 어마어마한 진출 속에서 우리는 이번 사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분명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대통령과 측근의 국정 농단이라는 사태가 있고, 이것이 대중적으로 폭로되었으며, 여기에 대한 분노가 있다. 이는 하야 혹은 탄핵이라는 요구로 나아갔다. 물론 하야와 탄핵은 다른 궤적을 낳았을 것이다. 후자는 기성의 헌법적 절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전자는 정치적 지위로서 법적 질서의 균열 혹은 그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이후의 절차도 그만큼 다르다. 탄핵은 기존 절차를 고스란히 인정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그 어떤 질서의 변화도 없이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기다리고 있다. 하야였다면 흔히 말하는 ‘거국 과도정부’가 들어섰을 것이고, 이는 좀 더 개방적인 것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꼭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 또한 세력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니 말이다. 촛불집회로 모인 대중의 힘이 하야나 탄핵 이상의 것으로도 발휘됐을지는 알 수 없다.)

이번 사태의 먼 원인은 최소한 세월호 참사부터 시작되는,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다. 더 밑바닥에는 대중의 물질적 불만이 놓여있을 것이다. 특이한 점은 계기가 배신과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었다 할지라도 다양한 대중의 물질적 불만이 최소한 촛불집회 국면에서는 억제되었다는, 혹은 억제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이번 사태의 한 가지 비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차분히 돌아보면 다 아는 것이지만, 이번 사태는 보수파의 일종의 ‘보수 혁명’ 시도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그 측근은 이런 시도에 맞섬으로써 일종의 전前혁명을 수행한 셈이다.『 조선일보』와 TV조선의 폭로에서 시작되었고, 이들의 구상에 따라 좀 더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언론 분파의 합세가 있었다. 물론 음모론을 말하자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정치세력의 구상이 그 자체로 관철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이른바 상호작용 속에서 의도를 벗어나고 통제를 벗어난다. 그게 근대 대중 정치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작년 10월말 이후의 정치적 풍경은 최소한의 변화로 기성 질서를 유지하려는 힘과 기성 질서를 무의식적으로 넘어서려는 힘 사이의 충돌과 상호작용 속에서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탄핵이라는 헌법 질서의 수호로 일단락되었다. 박근혜 씨의 구속과 처벌은 이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기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여기에 더해 갑작스럽게 진행되고 있는 세월호 인양은 다시금 우리에게 미해결의 과제가 있음을 아프게 보여 주고 있다.

탄핵으로 일단락된 이번 사태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가진 양면성을 보여 준다. 우리의 민주주의 헌법과 가치는 사람들이 분노하고 국정 농단을 바로잡기 위해 거리로 나오도록 만들었다. 어쨌거나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이를 수용하고 거기에 법적 권위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대중에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경계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대중의 욕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에 의해 말 그대로 억제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폭발하려면 현재로서는 또 다른 계기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계기는 양방향에서 올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이번 대통령 선거로 형성될 정치적 힘의 균형을 보수적인 쪽으로 돌리려는 이른바 냉전 보수 세력의 시도다. 다른 하나는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쉽게 바뀌지 않을, 경우에 따라서는 더 나빠질 대중의 삶이다. 이 속에서 한편으로 한국 정치에서 좌파가 처한 딜레마 상황이 다시 연출될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민중의 대변자(!)가 탄생할 수도 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상황이 어떤 궤적을 그릴지는 전적으로 힘에 달려 있을 텐데, 여기서도 문제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일 것이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기성 질서를 보호하는 힘으로 작용할지 아니면 힘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충돌하면서 또 다른 사태를 낳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이중의 과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제도로서의 헌법을 수정하는 작업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다. 이런저런 이유로 개헌은 정치 일정에 올라 있으며, 그 누구보다 냉전 보수 세력의 요구가 크다는 점에서 일정한 동력을 얻을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여기에 이른바 민중 세력이 어떤 요구를 가지고 들어설 것인가 혹은 의미 있는 행동이 가능한가가 문제다.

다른 하나는 이런 정치과정과 민중의 힘이 병행하고 교차하는 과정에서 기성의 정치계급을 넘어서는 정치세력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다. 물론 이때 새로운 정치세력은 꼭 기성 정당 질서 외부에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한국 정치를 규정하고 있는 여러 힘은 기존 정당체제 외부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거의 봉쇄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용적으로 그런 세력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 제도는 우리에게 언제나 장벽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중의 과제를 교차하는 게 아마 선거법과 정당법 등 정치과정을 규제하는 법률의 개정 문제일 것이다. 이런 법률은 그 자체로는 그 누구의 요구도 대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종류의 규제에 관한 것이다. 과연 여기로 대중의 힘을 향하게 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까? 아마 여기서 열쇠는 이른바 정권 교체라는 것으로 변화를 일으키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쥐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목소리가 그 내부에서 나오도록 해야 한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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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47호(2017년4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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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 2017

시대 속의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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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 탄생 직후에 만들어진 이 잡지가 “좌파”라는 이름으로 책을 내는 것은 이번으로 마지막이다. 문재인 시대의 개막과 함께 제호를 바꾸는 건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이라는 면에서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다.

길게 보면 세계사적으로 좌파가 신뢰를 잃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라 할 수 있다. 동쪽의 좌파는 꽤 오래 전에 자기 약속을 저버렸고, 서쪽의 좌파는 자기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1968년은 이런 좌파에 대한 매서운 채찍이었다. 그런 좌파가 유럽에서 부활한 것은 이미 좌파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정책을 들고 나온 다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좌파 왼쪽의 좌파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당장 의미 있는 세력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새로운 바람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먼저 불어왔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한 좌파들이 “분홍 물결” 속에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권력을 잡았다. 이런 흐름이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 계기는 2008년 경제 위기와 이에 대한 유럽 각국 정부의 대응, 즉 ‘긴축’에서 왔다. 언론에서 흔히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보통사람들의 저항이 있었고, 이는 새로운 정당이나 기존 정당이 재구성된 혁신 정당을 통해 정치 지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물론 대중의 힘은 왼쪽으로만 흐른 것은 아니다. 난민과 이민, 반이슬람 등의 토픽은 대중의 힘이 오른쪽으로 흐르게 한 수문 역할을 했다. 브렉시트, 트럼프, 르펜, 기타 새로운 우익 정치세력은 이렇게 형성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전후의 케인스주의적 합의가 깨지고 신자유주의의 전성기와 위기를 거치면서 기존 정치질서가 사실상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 잡지가 말하고자 했던 좌파의 요청은 이런 맥락 속에 있다. 하지만 내적인 취약함과 한국 주류 정치질서의 특유성은 좌파에게 의미 있는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좌파는 이중의 의미에서 불편한 담론이었다. 53년 체제 하에서 좌파는 언제나 북쪽에 있는 정치집단과 연루되거나 그게 아니라 할지라도 상상적으로 추방당한 세력에 불과했다. 다른 한편 현실정치에서 좌파라는 말의 쓰임새는 주류가 반대파를 공격하는 일종의 만능 칼이었다. 만능 칼이기 때문에 예리하게 목표 지점을 찌르는 게 아니라 풋내기가 마구 휘두르는 모습이긴 하지만, 대중에게 영향을 줄 정도의 먼지바람을 일으키긴 한다. 그러다 보니 정치세력 사이의 의미 있는 차이는 무화된다.

좌파라는 제호를 버리는 것이 문재인 시대의 개막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 정권의 탄생을 가져온 사태와도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를 ‘포스트민주주의’라는 틀로 보건 ‘매우 한국적인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보건 기성 정치질서와 제도가 대중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거기에 더해 새로운 우파의 등장과 함께 민주주의의 기본권 자체가 위협받기까지 하고 있다. 이럴 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그 자체로서도 중요하고, 계급투쟁과 신분투쟁이 제대로 벌어질 수 있는 장을 확보한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투쟁은 기성의 담론 질서의 재구성, 새로운 의미 부여 등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좌우라는 개념도 변형의 시험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 이전까지 좌파는 전통과 태도 이상의 것을 의미하지 못한다. 그것마저 한국에서는 아주 부정적이고 왜곡된 것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새로운 길을 갈 때 필요한 것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다. 이때 돌아보는 것은 상황에다 자신을 넣는 일에서 시작한다. 상황은 어떠하고, 과제는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음 호부터 우리는 이런 정신에 따라 “시대”라는 이름으로 독자를 만날 것이다. 시대의 요청에 순응한다는 면에서 겸허하려고 하고, 시대를 만들어간다는 면에서 과제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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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48호(2017년 5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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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 2017

복지국가와 기본소득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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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와 대통령 탄핵이라는 조용하면서도 격렬한 정치적 소용돌이는 한편으로 변화에 대한 기대감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짧은 시간과 집중성으로 인해 어떤 변화인지를 묻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물론 정치적 공간의 개방으로 인한 목소리의 분출, 그리고 대중민주주의의 메커니즘 속에서 그 목소리에 응답하려는 정치적 호소가 어느 정도는 이런 우려를 불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곧이어 벌어질 대통령 선거가 불가피하게 ‘승리를 위한 정렬’로 나아갈 것이고 그럴 경우 우리에게는 전망에 대해 논의할 시간이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그나마 도드라진 정책 아젠다가 ‘기본소득’이다. 그런데 몇몇 후보가 내놓은 기본소득을 보면 마뜩찮다. 보통 사회수당이라고 부르는 것에 ‘한국형’이라는 철 지난 수식어를 붙여 가며 (경우에 따라서는 ‘생애별’이라는 수식어까지)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런 양상을 보면서,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쓴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웃음이 나오는 것은 기본소득이 정말 유행이 되었나 보다는 생각 때문이며, 그 웃음이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유행 따라 다니는 정치인들의 행태 때문이다. 일단 오해가 있을지 모르니 미리 말해 두면, 이재명 후보가 내건 토지배당은 (액수가 매우 적긴 하지만) 모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지급한다는 의미에서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청년배당은 앞서 말한 사회수당과 사실 다르지 않지만 (사회복지학에서는 이를 ‘범주별 수당’이라고도 한다) 이른바 노동 가능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준다는 의미에서 기본소득의 정신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회수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모습 때문에 기본소득 지지자들만큼 불편한 사람들이 복지국가론자들이다. 또 그렇다 보니 논쟁 자체가 굴절되고 있다.

정치인과 대선 후보 들이 내놓은 기본소득을 ‘가짜’라고 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 보편주의 원칙의 한국형 복지국가라고 말하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이상이 공동대표의 주장은 앞서 말한 착종을 바로잡겠다는 의지에서 출발하지만, 또 다른 혼란을 낳고 있다. 이상이 공동대표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웹사이트에 게재한 칼럼 「지금 기본소득제도를 반대하는 이유」 (2017년 2월 27일)에서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기본소득은 ‘가짜’라고 말하면서 진짜는 모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충분히 주는 소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예로 독일의 좌파당을 들고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효과는 한국의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마치 약을 팔기 위해 온갖 거짓말로 대중을 현혹시키는 못된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이 공동대표가 정작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가짜’ 기본소득이 아니라 진짜 기본소득이다. 그가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우선적이고 근원적인 이유는 기본소득이 기존 복지국가를 대체하려는 기획이기 때문이다. 그도 잘 알고 있듯이 기본소득은 정치적 스펙트럼의 여러 지점에서 지지를 받고 있으며 (반대자도 마찬가지로 스펙트럼 여러 지점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우파 기본소득론자들의 목표는 기본소득으로 기존의 다양한 복지제도를 대체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좌파든 우파든 기본소득은 복지국가를 대체하려는 기획이다”라는 소제목 하에서 우파 기본소득론자들만 거론하면서 좌파까지 싸잡아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가 예로 든 독일의 좌파당이건, 한국의 노동당과 녹색당이건,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이건, 기존의 복지체제 전부를 기본소득으로 대체하자고 한 적이 없다. 거명된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교육과 의료 등 이른바 사회서비스의 형태로 주어지는 게 바람직한 복지제도를 기본소득으로 맞바꾸자고 하지 않으며,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이런 사회서비스의 공적 성격을 강화하고 전달 체계를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권리로서 충분한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말하지 않았고 의도하지도 않은 것을 들고 나와 애써 비판하는 이유는 이상이 공동대표가 그리는 복지국가 상과 ‘진짜’ 기본소득이 대립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복지국가 체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복지국가 체제는 국민 모두에게 생애 주기에 걸쳐 보편적으로 소득과 사회서비스를 보장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에 이어지는 문장이다. “복지국가들은 소득의 보장을 위해 보편주의 원칙의 사회보험과 사회수당 제도를 운용한다.” 사회수당이야 범주별로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외로 할 수 있지만, 사회보험은 보험료를 납부해야 한다(물론 면제할 수도 있고 상징적인 액수만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보험료를 납부하고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소득은 어디서 나오는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고용노동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상이 공동대표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복지국가 체제에서는 근로능력이 있는 성인들은 누구라도 노동을 통해 소득을 얻도록 하고, 국가는 국민의 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 복지국가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고용노동 혹은 완전고용!

복지국가는 하나의 모델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현상이기도 하다. 현대 복지국가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미국 주도로 재편된 전후 자본주의체제의 장기 호황을 토대로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물론 여기에는 냉전이라는 또 다른 배경막이 드리워져 있다. 대공황으로 인한 사회 해체 위기, 총력전 속에서의 국민people 동원, 공산주의 확대 등은 전후 세계의 이데올로기적, 상식적 최저선을 만들었고, 이는 빈곤 퇴치와 상대적 평등의 강화를 목표로 하고 케인스주의를 운영 방식으로 하는 복지국가 경제 복합체를 탄생시켰다. 이 복지국가 경제 복합체는 완전고용과 잘 조직화된 노동조합의 상호작용을 그 토대로 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적절한 소득, 충분한 소비, 리스크에 대비할 수 있는 자원의 동원 등이 가능했다. 이것이 보통 베버리지-케인스 모델, 즉 완전고용, 사회보험, 사회서비스, 공공부조 등으로 이루어진 전후 복지국가의 구조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사회보험에 기초한 모델은 구조상 남성 가장의 고용노동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젠더평등이라는 목표 하에 여성의 경제적 진출 및 복지국가의 진화가 이루어지긴 했다. 하지만 ‘노동력의 여성화’라고 부르는 현상은 노동 유연화와 제3차 산업화라는 신자유주의의 진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회보험의 확대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약화를 가져왔고, 점점 더 많은 사람 들이 자산조사에 기초한 급여에 의존하게 된 게 1980년대의 상황이었다. 유럽에서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다시 떠오른 건 이런 맥락에서였다. 누구의 눈에도 복지국가 체제는 ‘개혁’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후 주류가 된 것은 복지국가 모델은 그대로 놓아두고 그 전제가 되는 완전고용의 달성을 위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사회투자국가’ 같은 방향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불안정한 노동체제의 확산과 사회복지 비용의 삭감이었다. 또한 더 우려되는 것은 ‘완전고용의 신화’가 폴란드 경제학자 미하우 칼레키가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배타주의와 유사 파시즘의 대중 정치적 동원의 구호가 되었다는 것이다.

‘진짜’ 기본소득은 이와 달리 고용과 분리된, 권리에 기반한 소득을 주장하는 아이디어다. 이런 점에서 필요needs의 논리와 직접적 기여의 윤리에 기초한 기존 복지국가 모델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기존 복지국가 모델에서도 복지 수급과 접근을 권리라고 본다. 하지만 이는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권리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에서 말하는 권리는 어디서 나오는가? 자연적, 사회적 자원을 공 유로 보고 여기에 모두가 1/n의 몫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격에 따른 것이지 기여에 의한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최근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주목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많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최근 들어 기본소득 지지자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케인스주의 계열의 경제학자들로, 더 이상 고용노동을 통한 유효수요 창출이 어렵다는 인식 속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흔히 IT업계 종사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인공지능AI과 로봇화로 상징되는 제4차 산업혁명은 인간 노동력을 불필요하게 만들며 따라서 임금과는 다른 형태의 소득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이들은 (이들만은 아니지만) 디지털/네트워크 경제의 특성, 즉 한계비용의 제로화와 모두의 기여 등에 주목하면서 앞서 말한 것과 유사한 공유와 몫이라는 사고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있다. 사실 제4차 산업혁명이 일자리를 없애 버릴지, 얼마나 없어질지를 지금 ‘예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상이 공동대표는 제4차 산업혁명에 대처하는 한 가지 태도를 보여 준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인공지능과 로봇 때문에 기존의 일자리는 줄어들겠지만 과거 세 차례의 산업혁명에서 그랬듯이 새로운 일자리도 많이 생겨날 것이다.” 정말로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생겨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런 질문은 가능할 것이다. 일자리의 질은 어떻게 되는가? 그 다음으로 기계가 인간 노동을 절약할 수 있다면 그게 나쁜 것인가? 앞의 질문에 대해 이상이 공동대표는 “일자리들 간의 임금과 복지 격차를 최소화해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총체적인 개입주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 개입주의 전략의 주요한 한 가지 방향은 노동시간 단축이어야 한다는 것을 덧붙이려 한다.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은 인간 노동의 절약이라는 방향과 맞물려 모두가 자유 시간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과 관련이 있다. 그럴 때 이상이 공동대표가 말하는 것처럼 “기존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새로운 일자리는 저임금의 불안정 일자리로 전락해서 노동시장의 양극화는 더 심화될”지 아니면 노동자들의 협상력 강화 및 개인들의 자유로운 활동 선택으로 인해 고용노동의 질이 더 좋아질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물론 우리는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기본소득이 도입될 경우 후자의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끝으로 이상이 공동대표는 ‘진짜’ 기본소득, 그가 말하길 1인당 최저생계비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이유로 초보적인 복지국가 단계에 머물고 있는 우리의 복지체계를 질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우선적인 재정 순서가 따로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기본소득에 반대할 때 보통 많이 나오는 ‘막대한 재정이 소요된다’는 주장을 대신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재원 마련 문제와 관련해서 이상이 공동대표는 명확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 사회서비스에 대한 재정 투입을 늘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증세 등으로 재원을 확대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너무나 악명 높은 OECD의 한국 관련 통계에 따를 때 사회복지 지출 이 GDP의 10퍼센트를 조금 넘고 조세부담률이 24퍼센트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상이 공동대표가 말하는 ‘역동적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서라도 상당한 수준의 증세가 불가피할 것이다. 우리는 조세부담 률을 최소한 OECD 평균 수준인 34퍼센트까지는 올려야 한다고 보고, 이럴 경우 월 30만원의 기본소득과 질적으로 향상된 사회서비스가 가능하다고 본다.

문제는 어떤 방식의 조세개혁을 할 것인가다. 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 소득세와 법인세에 대한 누진세 확대라는 전통적인 방향이 당연히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이자 자산 양극화 시대인 오늘날에는 이것만으로 불충분할 것이다. 토지를 비롯한 자산에 대한 과세와 공유부公有富에 대한 과세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서 말한 공유와 몫이라는 기본소득의 정신에 잘 부합하기 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재명 후보가 말하는 토지보유세 15조원을 25,000원씩 나누어줄 게 아니라 더 급한 데 써야 한다는 주장은 과녁을 잘못 겨냥한 것이다. 토지보유세는 정부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걷는 세금이 아니라 공유에 기초해서 배당을 위해 걷는 것이고 곧바로 모든 사람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이다.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공적 사회보장이라는 생각이 등장한 것과 같은 시기에 등장했다. 하지만 오늘날 일반화된 것은 고용노동과 사회보험에 기초하여 필요에 따라 보장해 주는 복지국가다. 이에 반해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특정한 시기에 등장했다 사라졌다 하기를 반복했다. 아직 충분히 해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윤리 및 국가의 통치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기술적, 경제적 변동은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기초하고 있는 공유와 배당이라는 아이디어를 새롭게 전개할 수 있는 틈을 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기본소득이 이제는 현실적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복지국가는 하나의 모델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현상이기도 하다. 역사적 현상에는 그 배경과 고유의 구조가 있기 마련이며, 그것이 한계에 도달했다면 다른 것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복지국가를 시대에 맞게 고치려 했던 사람들의 노력까지 폄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앞서도 말했듯이 기본소득과 사회복지가 같은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고, 같은 목표, 즉 인간의 자유, 정의, 존엄을 추구한다면, 좀 더 개방된 자세로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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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46호(2017년 3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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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 2017

촛불시위 : 첫 번째 국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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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재판과 특검의 수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하야 혹은 탄핵을 직접적인 목표로 한 촛불시위의 첫 번째 국면은 지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침 연말연시라는 자연적, 인간적 시간의 매듭 속에서 이 국면의 동학과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이후 국면을 바라보기 위해서 필요한 일로 보인다.

특정한 입장에서 바라볼 때 촛불시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좌파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꼭 전통적이고 실정적인 의미에서의 좌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퇴진행동’의 주요 참가 단체로 민주노총이 있고, 또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일 때 당연히 거기에 참가할 뿐만 아니라 행진 시에 ‘선두에 서’ 있는 사람들이 좌파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투쟁의 형식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투쟁의 방향과 목표 혹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별다른 목소리도 없고, 특별히 발언권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가장 손쉬우면서도 필요한 대답은 좌파의 약화다. 좌파의 약화를 가져온 한국의 정치 지형과 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내적인 이유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되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열린 정치적 공간에서 이 문제는 전망과 관련되기 때문에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선 내적인 이유와 관련해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기존 좌파의 시대착오성이다. 사회주의의 추상적 원칙을 말하는 것 이외에 현실적인 그 어떤 방책도 내놓고 있지 못하는 일부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특정한 정세와 구조 속에서 성립하고 또 전성기를 누렸던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의 좌파가 여기에 해당한다. 누누이 말했듯이 주로 광산업과 제조업 부문의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에 기초한 이런 경향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방어적인 투쟁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나아갈 수 없었고) 결국 보편적 해방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사회적 헤게모니를 추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한국의 정치 지형 및 제도와 관련해서는 분단으로 인한 비대칭적인 토대 위에 자리 잡은 승자독식 제도가 문제라는 것은 꽤 오래전부터 지적된 것이다. 결선투표제와 전면적인 비례대표제의 도입을 통해 이를 바꾸려는 주장도 오래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를 이룰 계기를 잡지 못했고, 힘이 없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촛불시위에서 좌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이번 광장의 정치가 보이는 집중성 혹은 억압성과 관련이 있다. 모든 초점이 대통령의 하야 혹은 탄핵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대중의 물결이 형성될 수 있는 이유가 공통의 인식과 요구라고 하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이번 시위의 초점이 된 하야 혹은 탄핵이라는 요구는 지극히 민주주의적인 목표일 뿐이다. 물론 현재의 비민주적인 정권이 저지른 반민중적 행태가 대중적 흐름의 밑바닥에 있다고 하더라도 사태는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번 시위는 매우 구체적인 인격의 구체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드러난 현상은 비상식적이지만 여기에 구조적 원인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말이 될 것이다.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편의적으로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제왕적 대통령제’ 의 문제다.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강력하고 광범위하며, 의회의 견제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틀이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의회의 권한만을 강화한다고 다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임을 기본원리로 하는 대의제 일반이 시간적 역동성의 시련을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에 이를 보완할 장치와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서도 언급한 대의제 자체를 충실하게 구성하는 것과 연결된다.

여기까지가 헌법으로 표현되는 권력 구조의 문제라고 한다면 그 밑에는 사회적인 구조적 문제도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이것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고, 그 나름의 해법이 나와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나는 정치의 지역적 분할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계급의 과잉 대표성, 그러니까 다른 특정 계급의 과소 대표성의 문제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지난 총선 전후의 유권자 의식 조사를 볼 때 대중의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계급의 담론과 전략에 주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큰 문제는 후자다. 흔히 서울의 강남으로 대표되는 부유층은 계급적 이해관계를 상당히 명료하게 파악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데 반해 이른바 서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거나 아예 탈정치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간단하게 탈정치화라고 말하는 것은 해결 자체를 봉쇄하는 기술일 수 있다. 서민 혹은 민중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사회층의 목소리가 전달될 수 있는 정치적 채널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기존 좌파의 부동성 혹은 새로운 정치세력의 부재와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이를 타개하기 위한 전략적 방침이나 담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계기와 힘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래로부터 물이 끓고 있었다. 마치 브레히트가「취사장에서」에서 “어디를 가나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상대편은 눈을 돌리고 그들을 맞이한 것은 침묵이었다/ 대중은 그들과 별개의 깃발 아래서 행진하고 있었다. ……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활동했다.” 라고 노래한 것처럼. 이렇게 본다면 태블릿 피시와 그 소유주는 정말로 계기였다.

지금 좌파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요구를 구조적 문제로 전환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둘러싼 투쟁을 벌이는 것으로 나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적 의미의 민주주의는 생득권이외에 그 어떤 자격도 요구하지 않는 정치체제이자 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기본적인 원리로 자리 잡자마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투쟁으로 전환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이번 사태의 발단이 어디에 있건 대중의‘틈입’은 사태를 확장하며, 따라서 사태는 조정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도 않을 것이고 원하는 지점에서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팽창한다는 것은 제약 없이 다양한 요구가 분출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그 정의상 다수파의 지배이며, 다수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여기서 좌파의 곤혹스러움이 다시금 제기된다. 좌파는 무엇으로 다수파를 형성할 것인가? 혹은 다수파를 형성할 능력이 있는가?

현재로서는 여기에 제대로 답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이유 때문에, 어쨌든 한국의 좌파는 다수파를 형성할 가능성은 커녕 거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좌파의 본령을 전투성으로 이해하는 일부는, 이마저도 대개는 말의 잔치로 끝나지만, 전선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서곤 한다. 또 좌파의 원칙을 헌신성으로 치환하는 일부는 개별 사안에 대해 충실하지만 이를 더 커다란 흐름으로 묶는 데 무심하거나 실패한다.

이제 지루한 법정 공방이 이어질 막간의 시간이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곧 두 번째 국면이 열릴 것이다. 이 두 번째 국면에서도 좌파가 이른바 주도성을 발휘하긴 어려울 것이다. 실제를 인정할 때다. 앞서 인용한 브레히트의 시는 볼셰비키에 관한 것이었지만 우리의 맥락에서 그것은 민중 자신의 끈질긴 투쟁을 말할 뿐이다. 우리의 좌파는 여기에 한참 못 미친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좌파가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지형과 제도를 만드는 것, 그런 상황에서 여러 집단의 투쟁이 보편적인 지향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좌파의 시간은 오래 전에 지나갔지만 새로운 시간은 아직오지 않은 셈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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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45호(2017년 1~2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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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2016

시대가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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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얼마 남지 않은 2016년을 보내면서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선정 소식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의 죽음과 함께 가장 큰 사건으로 기록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정위원회가 “위대한 전통 안에서 미국 음악의 새로운 시적 표현new poetic expression의 창조였다”라는 선정 이유를 밝혔지만, ‘문학의 경계’를 중심으로 한 논란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카스트로의 죽음은 그만큼은 아니겠지만, 위대한 혁명가/독재자의 이미지는 20세기의 혁명과 사회주의를 둘러싼 논의의 일부를 구성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밥 딜런의 수상 소식을 들으며, 그리고 곧 이어진 촛불시위에 함께하며 많은 사람은 그의 세 번째 앨범인《시대가 변하고 있다 ‘The Times, They Are A-Changin’》에 들어 있는 같은 제목의 노래를 떠올린다. 한 일간지에 실린 신형철 교수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하면 “사람들아 여기 모여라/ 그대가 어디를 떠돌고 있든/ 인정하라 그대 주위의 물이 차올랐다는 것을.” 이렇게 시작한 노래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선, 그것이 그어지고/ 저주, 그것이 내려진다/ 지금 느린 자는/ 훗날 빠른 자이리/ 지금 이 현재가/ 훗날 과거가 되듯이/ 질서는 급격히 쇠락해가고/ 지금 맨 앞인 자가 훗날 맨 끝인 자가 되리라/ 시대는 변하고 있으므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지난 10월말 최순실의 태블릿 피시 내용이 공개되면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은 시간이 흐르면서 광야를 불태우는 불길로 커져 갔다. 대통령제 하에서 모두가 자신의 처지를 바꾸고 혹은 제자리를 찾기 위해 내는 목소리는 언제나 청와대를 향했는데, 이게 한목소리가 되어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사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밥 딜런의 두 번째 앨범인《제멋대로인 밥 딜런 The Freewheelin’ Bob Dylan》에 들어 있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 Blowin’ in the Wind〉을 부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귀가 있어야/ 그가 사람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나?/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어야 알 수 있나?/ 너무 많이 죽었다는 것을.” 최소한 2009년의 쌍용차에서 2014년의 세월호와 2015/16년의 백남기까지, 귀를 열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얼마나 수많은 목소리가 있었는가? 하지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에 흩날리고 있네, 바람만이 알고 있네”라는 가사를 삼켜야 했다.

이런 변화를 두고 ‘혁명은 도둑처럼 온다’라거나 ‘끝내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변화가 있을 것이다. 최소한 지금보다 조금은 낫다고 여겨질 변화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변화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하이재킹 당한 경험이 여러차례 있다. 가장 가까이로는 지금의 체제를 만들어낸 1987년의 일이다. 6월항쟁의 열기가 밀실의 8인 회담을 거쳐 현행 헌법이 만들어졌고, 그저 우리가 손에 쥔 것은 대통령 직선제뿐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내적 모순으로 파열하고, 토대 자체가 약화되고, 새로운 요구가 등장하면서 변화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문제는 그 계기가 어디서 올 것인가였을 뿐이다. 헌법에 보장된 절차적인 계기는 언제나 선거, 특히 대통령 선거였다. 하지만 선거가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건 그 결과는 경제적 성장의 신화에 기초한 보수적인 체제의 지속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민주주의적 개혁이 기어 오기도 했고, 한 번에 낭떠러지로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이런 절차적 계기 전후로 대중적 에너지가 분출했다는 것이다. 2002년, 2004년, 2008년에 일었던 촛불시위가 그것이다. 두 번은 개혁적인 대통령을 뒷받침하는 힘이었고, 마지막 것은 불통의 대통령의 불도저를 막는 힘이 되었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최소한 1997년 이후 전면에 등장한 사회양극화를 해결하고 민주공화국의 실질적인 토대를 만들 수 있는 힘으로 전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우리의 바람은 밥 딜런이 1965년에 낸 앨범인《모두를 고향으로 데려와라Bring It Back All Home》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향수 블루스Subterranean Homesick Blues>의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를 알기 위해/ 일기 예보자가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가사는 행동의 신호로만 읽어야 할 것이지 구체적인 의제로 읽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야, 퇴진, 탄핵을 위한 촛불시위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는 동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공간의 열림일 수 있다. 제도적인 일정 속에서 이 공간이 새로운 정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어지는 계기를 끊임없이 만들지 않는다면 이번 촛불시위도 또 다른 하이재킹으로 끝날지 모를 일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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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44호(2016년 12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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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2016

포스트87년 체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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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도 더 전에 칼 맑스는 “독일에서 종교 비판은 끝났다”고 했지만 그 이후 맑스주의는 ‘이데올로기론의 공백’으로 고통 받았다. 이 공백을 때마다 메운 것은 언제나 정치의 혁신이었는데, 이는 정치의 주동성의 발견과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설정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데올로기론의 공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효과를 확인한 것은 그런 대로 성과라 할 수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 ‘87년 체제의 한계’ 운운하면서 개헌론이 나오고 있다. 이들이 한계로 말하는 것은 권력 구조, 주로 5년 단임의 대통령제에 맞춰지고 있다. 5년이라는 임기 제한,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것으로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5년 단임제는 책임 있는 정치를 어렵게 하고 대통령의 제왕적 성격은 권력의 행사가 비뚤어진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비뚤어진 권력 행사가 가능한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저 대답은 인격personality에 맞추어진다. 그러니 이를 알기 위해 문학비평의 다양한 접근법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권력자에 대한 정신분석이 행해지고 생애사가 조명된다. 누구에게는 CEO로서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찾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부모를 잃은 불행했던 젊은 시절과 그 공백을 메워 주었을 누군가의 사랑 (과 영향력)이 거론된다. 그럴듯한 분석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이런 인물을 대의제 하에서 대중이 지지해서 그 자리까지 올린 힘은 무엇인가?

지난 십 년 사이에 대선의 키워드는 경제와 복지였다. 전자는 여전히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강한 상태에서 전반적인 경제성장이 개인의 삶의 증진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고, 후자는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가 어느 정도 깨진 상태에서,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대중의 삶의 현실이 비참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서 힘을 발휘했다. 여기에서 대중이 어떤 희망을 발견하고 자신을 투사한 것을 우리는 ‘전이’라는 말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이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설명은 사실 넘쳐 난다. 제한된 정치 지형, 스타 정치인에 대한 투사, 스펙터클한 미디어 환경, 신자유주의에 와서 더욱 노골화된 소비자주의 등등. 물론 그 바탕에는 ‘경제적 공포’가 있고, 이는 정세적으로 ‘대안은 없다’라는 말로 요약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진보파와 좌파의 대응은 점진주의와 매복(일종의 대기주의)이었다. 전자는 중도파와 손을 잡고 하나하나 권력의 관제 고지를 점령하자는 것이고, 후자는 적절한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가운데 정치 지형의 변화를 꾀하자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전자는 87년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원했고 후자는 87년 체제의 변화를 도모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보자면 어느 쪽도 주관적 목표와 객관적 변화 모두 이루지 못했다.

주체들의 무능력을 탓하는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상황의 변화, 전반적인 지형의 변화를 읽어 내는 게 더 필요한 일이다.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는 약화되기는커녕 더욱 강화된 형태로 변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의지가 이전의 자본주의 관리자들이 보인 의지보다 더 강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이전 자본주의의 동학을 규정하고 또 이에 따라 움직인 계급 지형이 바뀐 탓이다. 이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실질 경제의 성장보다는 자산 가치의 증대를 통한 이윤 추구라는 패러다임의 변화, 기술혁신과 비용 축소가 더해지면서 나타난 노동의 불안정, 서비스 산업으로의 전환 속에서 나타난 저임금 (여성, 노년, 청년) 노동의 증대 등등 에 따라 과거처럼 집단적이고 조직적이고 강건한 산업 노동자계급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카지노 자본주의’나 ‘지대 자본주의’ 혹은 ‘벌처 자본주의vulture capitalism’라는 말은 계급 간의 포지티브한 관계에 의한 자본주의 운영이 아니라는 것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정치와 경제의 단락shortcut을 잘 보여 준다. 때마다 터지는 ‘-게이트’는 당연히 일시적 일탈이나 병리가 아니며 현재의 체제가 작동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권력과 정보, 이를 움직이는 관료제는 이윤을 추구하고 또 추구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전술적 자산이다.

다시금 환원주의가 아니라 정치의 주동성과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이때 환원주의는 계급 환원주의가 아니라 ‘진실의 정치’라는 환원주의다. 브레히트가 “이성의 승리는 이성적인 사람들의 승리”라고 했을 때 이는 바람을 달리 말한 것이지 논리를 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신발보다 나라를 더 자주 바꾸는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87년 체제의 한계를 말하고 포스트87년 체제를 겨냥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동맹이 필요할 것이다. 이 동맹은 포스트 공산주의 시대의 최저 기준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며, 포스트87년 체제가 가능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좌파가 여기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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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43호(2016년 11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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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 2016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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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백남기 님이 돌아가셨다. 수많은 불행 속에서도 다행인 것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 때문인지, 70세 생일을 넘기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약간의 위로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 것에서나마 위로를 찾는 이유는 그저 슬퍼하지 않고 살아남은 자로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와 의지 때문이다.

백남기 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너무나 강력한 물대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게 제대로 통제되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즉자적이긴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우리의 감정이 솟구치는 이유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뻔뻔스럽고 무책임한, 더 나아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찰과 정부 때문이다. 사태의 원인이 구조적인 것이든 혹은 일탈적인 것이든 간에 이들이 보이는 태도가 사람이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에는 당연히 도덕적 분노가 뒤따른다.

그런데 그가 차가운 거리에서 물대포에 맞서야 했던 이유의 바탕에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농민의 현실과 요구가 있었다. 그가 직접적으로 말했던 것은 쌀값을 정부가 제대로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쌀자급률이 100퍼센트가 넘는데도 쌀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풍년은 농민들에게 달갑지 않은 현실이 되었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정부에 요구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갑고 무서운 물대포뿐이었고, 이보다 더 잔인한 것은 그 이후 벌어진 사태다.

이른바 농업 문제에 한정해서 보자면, 적정한 총 식량 자급률을 유지하면서도 그 내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논의 일정 부분을 밭으로 전환하는 일이 필요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쌀은 이미 100퍼센트 이상의 자급률을 보이는 데 반해 대부분의 다른 작물은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식생활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전환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종합적인 계획과 이행에 따른 조치가 필요하며, 이는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다.

물론 농축산식품부 등이 나서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말의 잔치로 끝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경험이 이런 방향을 지시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나라가 대다수 보통사람의 나라가 아니라 소수의 자본가, 특권층, 고위 관료의 나라라는 것이다. 물론 한 사회가 이렇게 나뉘어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그 어떤 소통도 없이 두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갈등과 언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때, 만약 제대로 제도화되지 않는다면 결국 폭발적인 충돌을 통해서만 민주주의는 작동하고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배하는 자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꽤 오랜 전에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이야기는 신학적이면서도 우화적인 경로를 거쳐 ‘사랑’이라는 대답으로 나아간다. 소박하면서도 이타적인 삶을 살고자했던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살짝 비틀면 좀 더 구체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관계를 말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상호 의존성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문제는 상호 의존하는 사람들의 위치와 힘이 어떠하냐다. 이른바 관계가 일방적일 때 사랑이 또 다른 폭력으로 변한다는 것은 일상의 무수한 예에서도 알 수 있다. 혹은 위치와 힘이 비대칭적일 때 그건 사랑이라는 이름의 종속 관계를 뜻할 수도 있다.

결국 사람들이 상호 의존적이지만 독립적일 때 사랑은 폭력이나 종속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고유한 가치와 지향을 지닐 수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도덕적으로만 독립적인 개인을 말하고 있을 뿐 현실에서는 자본주의적 관계 및 광포한 시장경제에 모든 것을 맡겨놓았고, 이로 인해 대다수는 오직 의존적이기만 한 개인들을 낳았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오직 불안과 허무만을 남겨 놓았다. 오늘날 가진 자들이 보이는 부도덕한 의지와 대비되는 가난한 자들의 데카당스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런 데카당스를 넘어서서 사회를 모든 면에서 활력 있게 만드는 길은 모든 사람이 ‘실질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뿐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물질적 조건이 포함되며, 이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내놓는 것이 우리 시대의 의제다. 그 가운데 기본소득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까지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당장의 생계를 위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를 제대로 된 관계 위에 올려놓기 위한 기반이다.

백남기 님의 죽음이 폭압적인 권력에 대한 인간적인 분노를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이렇게 깊은 문제, 즉 오늘날 국가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비는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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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42호(2016년 10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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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 2016

혁신 혹은 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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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생물에 비유하는 것은 역동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정치란 것이 분할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로부터 나오는 반향이 있을 때에만 실제로 수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정치적 스펙트럼의 어디를 보아도 역동성과 수행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병우 일병 구하기’라는 우스갯소리가 말해 주듯이 각종 비리 의혹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이제 수사까지 착수한 인물을 기어코 청와대에서 내보내지 않으려 하는 권력자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물론 언론과 평론가 들은 이런저런 분석을 내놓긴 한다. 그리고 그 결론은 ‘레임덕을 막기 위해서’라거나 ‘밀리면 안 된다’라는 생각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틀린 분석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빠져 있는 느낌이다.

막 새로운 강령과 지도 체제를 마련한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강령 논의에서 노동자라는 단어를 놓고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다. 이 말이 주는 무게에 비해 가볍다는 느낌이 든 것은 당의 역사와 현실을 감안할 때 별로 의미 있는 논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민주당에게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 정당에게) 강령은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있을 뿐이지 그것으로 인해 당의 방향과 대중적 호소력이 정해진 적은 없는 희한한 물건이다.

‘낡았다’라는 말도 미안할 정도로 퇴행적인 진보정당 혹은 진보운동의 모습도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노동당 안에서는 메아리 없는, 스텔스 같은 욕설만이 난무하고, 밖에서는 민주노총 중심의 새로운(?) 진보정당이라는 철 지난 약을 팔겠다는 좌판이 깔리려는 모양이다. 법외노조가 된 것을 계기로 해서 조직 내 주도권을 얻어 보려는 전교조 내의 움직임도 반향이 없긴 마찬가지다.

누구나 변화와 혁신을 말하지만 흔히 말하듯 ‘감동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감동은 고사하고 움직인다는 느낌조차 받을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했듯이“ 결국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피조물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뭔가를 한다 하더라도 의지를 가지고 구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특히 정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절대적인 목적을 추구하든 아니면 주어진 조건에 대한 반응이든 간에 의지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의지는 그 의지가 만들어낸 구조와 인습에 가로 막혀 있는 꼴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것도 의지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런 의지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다. 주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관찰에서 시작해서 성찰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물론 그 이전에 필요한 것이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새로운 흐름은 꼭 잿더미 속에서는 아닐지라도 패배 속에서 등장한다. 진심으로 패배를 인정하자!

객관적 조건이라는 면에서 변화의 가능성 혹은 폭발의 잠재성은 도처에 있다. 사실 우리는 꽤 오래 전부터 “화산 지대를 걷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더 긴 말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마그마가 터져 나올 수 있는 틈새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만 해 두자.

그동안 새로운 좌파정치세력의 형성 그리고 이것의 기초가 될 새로운 사회운동의 구성을 목표로 한 프로그램을 제출하는 것이『좌파』의 주된 과제였다. 위기의 시대에 대한 인식 속에서 가다듬은 프로그램 자체가 그 내적 논리라는 측면에서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프로젝트가 실패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포르투나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일까? 비르투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이보다 더 디테일한 수준에서의 문제인가? 만약 거시적인 관점에서 프로그램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처럼 구체적인 심급과 실행의 수준에서 문제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제대로 된다면 거시적인 수준의 프로그램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진정으로 바깥에서 바라보기 혹은 시차視差가 필요한 때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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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41호(2016년 09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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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 2016

기본소득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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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가 끊임없이 바뀌어 왔다고 하지만 인간이 매우 보수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싸움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싸움이 언제나 극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플롯은 대개 같았다. 누구의 말처럼 처음에 새로운 생각은 언제나 미친 소리나 허튼소리로 취급당했다. 그 다음은 예상할 수 있듯이 ‘그런 생각도 있을 수 있지’ 정도였다. 그 다음은 대다수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꼭 이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지금 여기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생각이 비슷한 궤적을 걷고 있다는 느낌이다. 거의 십 년 전쯤 이 아이디어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정말 소수였다. 그러니 논란이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2016년 봄을 지나면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갔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보인다. 제법 인기 있는 케이블 방송의, 그래도 토론 프로그램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어느 정도는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야당 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기본소득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변화가 부지불식간에 온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몸으로 느끼기는 참 어려운 법이다. 몇 달도 지나지 않은 지난 총선에서 노동당과 녹색당이 기본소득을 중심적인 공약으로 내세웠을 때 이를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꼭 선거 결과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6월초에 있었던 스위스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전후로 기본소득은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평범하게 말하면 시대의 문제와 맞닿았기 때문일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의 징후 몇 가지를 생각하면 기본소득 이외에 다른 대답을 찾기 어렵다. 소득과 고용이 모두 불안정한 신자유주의 위기의 시대, 인공지능과 자동화의 진전으로 인간 노동력이 별로 필요 없게 되는 시대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고용과 소득과 소비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저성장의 지속, 디지털 사회, 생태적 위기, 고령화 시대 등등을 고려할 때, 물질적 생산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문화적이고 관계적인 사회경제체제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진전과 형해화라는 아이러니를 고려할 때, 정치의 활성화를 위한 사회적 조치가 요구된다. 이런 여러 도전에 우리가 맞서기 위해 기본소득은 더 이상 미친 소리나 허튼소리가 아니라 들을 만한 생각이 되었다.

하지만 싸움은 이제부터일 것이다. 이미 기성 이데올로그들은 그 나름대로 기본소득의 쟁점을 설정하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근로 의욕의 상실’이 일어날 것이라든지, 들어가는 돈의 양과 마련 방법 등이 문제라든지 하면서 이러저러한 논리를 펴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듣고 있자면 마치 프랑스대혁명을 전후로 해서 이데올로기로서 가장 먼저 등장한 보수주의의 논변을 듣는 것 같다. 기본소득의 발상이나 필요성은 이해하겠지만 기본소득이 실시될 정도로 큰 변화는 쉽게 오는 게 아니다, 그러니 천천히 생각해 보자, 혹은 다른 일도 중요한 게 많으니 그것부터 하자, 등등.

이렇게 어떤 새로운 것이나 변화의 필요성 혹은 불가피성은 인정하되 가능하면 이를 지연하려는 것이 보수주의의 태도라 할 때, 기본소득이 벌여야 하는 싸움도 이제 이런 지형에 놓이게 되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는 기존의 틀에서 논쟁을 벌이는 방식이다. 지불노동과 소득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근로 의욕 운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조세개혁을 통해 조세부담률을 높이거나 공유자산을 활용해서 재원을 마련하자는 것에 대해 그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반론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제 논의의 지반을 바꾸어야 할 때다. 우리는 그저 기존 체제에 기본소득을 더하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이 체제 자체를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어 보자는 것이다.

7월 7일부터 9일까지 열리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의 주제가 ‘사회적, 생태적 전환과 기본소득’인 것은 이런 이유다. 그런데 그 새로운 체제의 지향과 구성 원리는 사람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느끼는 것만큼 새로운 게 전혀 아니다. 그건 정말로 오래된 어떤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 즉 자유롭고 존엄하게 사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기본소득이라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가장 보수적인 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 지킬 것과 바꿀 것을 분명히 하는 것, 그게 논의를 제대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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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9호(2016년 07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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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2016

시간과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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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위대함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다. 참혹하거나 허망한 사건조차 대개 시간의 힘을 이기기 어렵다. 물론 사람들에게 이는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사건 이전의 사고와 관행을 지속하는 게 하나다. 다른 하나는 사건의 충격을 새로운 일상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어쨌든 겉모습은 차분하다. 하지만 그 밑에서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 흐른다.

노동당과 같은 좌파정당이 지난 총선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은 비단 숫자로 나타난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당이 의지의 결사체라 할 때 당장은 득표가 사람들의 생각과 의지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말 그대로 저조한 득표로 이어져 온 이 당의 역사와 상태다. 따라서 사람들이 숫자에서 읽은 것은 어떤 경향성이었는데, 그 끝에는 아마 소멸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을 것이다.

물론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고, 이른바 자기 사명이란 것을 다했다고 한다면 억지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의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시대의 과제가 사라진 게 아니고, 역사는 종말을 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장의 실패를 딛고 새로이 시작해 보겠다고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새롭게 시작한다고 해도 그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현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기에 지극히 유물론적이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개인들의 삶이 있고, 서로 다른 생각과 지향이 있는 그룹이 있고, 매일 같이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있다. 결국 문제는 어느 정도로 단절할 수 있는가다. 다시 말해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혹은 나날의 투쟁을 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어떻게 준비하고 감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럼에도 우리의 준거점은 앞서 말한 시대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를 ‘포르투나’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주체와 떨어져 있는 포르투나는 이를 정확하게 가리키지는 못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시대의 과제는 주체에게 파악된 포르투나다. 그런데 그 주체는 다시 포르투나 하에서 시대의 과제에 의해 형성된다. 현재 우리는 이런 파악과 형성의 상호작용 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대중에게 호소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건 매력적인 정책과 공약을 내놓지 못해서가 아니다. 대중에게 다가갈 맥루언의 의미에서의 매체가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당 자체가 매체인데,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거나 겉모습만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른바 진보정당운동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 되겠지만, 매체로서의 정당을 새롭게 시작할 수 밖에 없고, 그건 세상만사가 그러하듯이 새로운 인격들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는 의지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단절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도 조금은 분명해질 것이다. 그건 새로운 인격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며, 매체로서의 정당을 시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바꾸어야 한다면 이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무거움을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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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8호(2016년 06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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