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 2016

기본소득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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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가 끊임없이 바뀌어 왔다고 하지만 인간이 매우 보수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싸움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싸움이 언제나 극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플롯은 대개 같았다. 누구의 말처럼 처음에 새로운 생각은 언제나 미친 소리나 허튼소리로 취급당했다. 그 다음은 예상할 수 있듯이 ‘그런 생각도 있을 수 있지’ 정도였다. 그 다음은 대다수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꼭 이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지금 여기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생각이 비슷한 궤적을 걷고 있다는 느낌이다. 거의 십 년 전쯤 이 아이디어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정말 소수였다. 그러니 논란이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2016년 봄을 지나면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갔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보인다. 제법 인기 있는 케이블 방송의, 그래도 토론 프로그램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어느 정도는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야당 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기본소득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변화가 부지불식간에 온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몸으로 느끼기는 참 어려운 법이다. 몇 달도 지나지 않은 지난 총선에서 노동당과 녹색당이 기본소득을 중심적인 공약으로 내세웠을 때 이를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꼭 선거 결과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6월초에 있었던 스위스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전후로 기본소득은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평범하게 말하면 시대의 문제와 맞닿았기 때문일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의 징후 몇 가지를 생각하면 기본소득 이외에 다른 대답을 찾기 어렵다. 소득과 고용이 모두 불안정한 신자유주의 위기의 시대, 인공지능과 자동화의 진전으로 인간 노동력이 별로 필요 없게 되는 시대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고용과 소득과 소비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저성장의 지속, 디지털 사회, 생태적 위기, 고령화 시대 등등을 고려할 때, 물질적 생산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문화적이고 관계적인 사회경제체제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진전과 형해화라는 아이러니를 고려할 때, 정치의 활성화를 위한 사회적 조치가 요구된다. 이런 여러 도전에 우리가 맞서기 위해 기본소득은 더 이상 미친 소리나 허튼소리가 아니라 들을 만한 생각이 되었다.

하지만 싸움은 이제부터일 것이다. 이미 기성 이데올로그들은 그 나름대로 기본소득의 쟁점을 설정하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근로 의욕의 상실’이 일어날 것이라든지, 들어가는 돈의 양과 마련 방법 등이 문제라든지 하면서 이러저러한 논리를 펴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듣고 있자면 마치 프랑스대혁명을 전후로 해서 이데올로기로서 가장 먼저 등장한 보수주의의 논변을 듣는 것 같다. 기본소득의 발상이나 필요성은 이해하겠지만 기본소득이 실시될 정도로 큰 변화는 쉽게 오는 게 아니다, 그러니 천천히 생각해 보자, 혹은 다른 일도 중요한 게 많으니 그것부터 하자, 등등.

이렇게 어떤 새로운 것이나 변화의 필요성 혹은 불가피성은 인정하되 가능하면 이를 지연하려는 것이 보수주의의 태도라 할 때, 기본소득이 벌여야 하는 싸움도 이제 이런 지형에 놓이게 되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는 기존의 틀에서 논쟁을 벌이는 방식이다. 지불노동과 소득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근로 의욕 운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조세개혁을 통해 조세부담률을 높이거나 공유자산을 활용해서 재원을 마련하자는 것에 대해 그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반론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제 논의의 지반을 바꾸어야 할 때다. 우리는 그저 기존 체제에 기본소득을 더하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이 체제 자체를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어 보자는 것이다.

7월 7일부터 9일까지 열리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의 주제가 ‘사회적, 생태적 전환과 기본소득’인 것은 이런 이유다. 그런데 그 새로운 체제의 지향과 구성 원리는 사람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느끼는 것만큼 새로운 게 전혀 아니다. 그건 정말로 오래된 어떤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 즉 자유롭고 존엄하게 사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기본소득이라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가장 보수적인 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 지킬 것과 바꿀 것을 분명히 하는 것, 그게 논의를 제대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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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9호(2016년 07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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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2016

시간과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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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위대함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다. 참혹하거나 허망한 사건조차 대개 시간의 힘을 이기기 어렵다. 물론 사람들에게 이는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사건 이전의 사고와 관행을 지속하는 게 하나다. 다른 하나는 사건의 충격을 새로운 일상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어쨌든 겉모습은 차분하다. 하지만 그 밑에서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 흐른다.

노동당과 같은 좌파정당이 지난 총선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은 비단 숫자로 나타난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당이 의지의 결사체라 할 때 당장은 득표가 사람들의 생각과 의지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말 그대로 저조한 득표로 이어져 온 이 당의 역사와 상태다. 따라서 사람들이 숫자에서 읽은 것은 어떤 경향성이었는데, 그 끝에는 아마 소멸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을 것이다.

물론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고, 이른바 자기 사명이란 것을 다했다고 한다면 억지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의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시대의 과제가 사라진 게 아니고, 역사는 종말을 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장의 실패를 딛고 새로이 시작해 보겠다고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새롭게 시작한다고 해도 그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현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기에 지극히 유물론적이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개인들의 삶이 있고, 서로 다른 생각과 지향이 있는 그룹이 있고, 매일 같이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있다. 결국 문제는 어느 정도로 단절할 수 있는가다. 다시 말해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혹은 나날의 투쟁을 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어떻게 준비하고 감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럼에도 우리의 준거점은 앞서 말한 시대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를 ‘포르투나’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주체와 떨어져 있는 포르투나는 이를 정확하게 가리키지는 못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시대의 과제는 주체에게 파악된 포르투나다. 그런데 그 주체는 다시 포르투나 하에서 시대의 과제에 의해 형성된다. 현재 우리는 이런 파악과 형성의 상호작용 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대중에게 호소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건 매력적인 정책과 공약을 내놓지 못해서가 아니다. 대중에게 다가갈 맥루언의 의미에서의 매체가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당 자체가 매체인데,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거나 겉모습만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른바 진보정당운동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 되겠지만, 매체로서의 정당을 새롭게 시작할 수 밖에 없고, 그건 세상만사가 그러하듯이 새로운 인격들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는 의지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단절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도 조금은 분명해질 것이다. 그건 새로운 인격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며, 매체로서의 정당을 시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바꾸어야 한다면 이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무거움을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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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8호(2016년 06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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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 2016

지연과 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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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과 다른 결과를 낳은 2016년 총선은 환희나 실망만큼이나 숙고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건 어떤 면에서 변화가 있되 또 다른점에서 보면 변화가 사실상 없기 때문이며, 더 중요하게는 변화를 이끌 만한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다 아는 것처럼 새누리당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번 선거에서 참패했다. 멀리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대응부터 가까이는 공천 파동까지 새누리당과 정부는 무능과 무책임, 아집과 독선으로 일관했고, 당장은 아니라 하더라도 균열을 낳았다. 여기에 더해 민주주의를 갉아 먹는 행태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럼에도 선거 전까지 이런 정도로 민심이 이반했는지는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야당의 내홍과 분열,답보와 정체가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분위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를 보면 밑바닥에서 거대한 흐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흐름을 형성한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경제적 공포’일 것이다. 천문학적인 가계부채,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이 공포를 조성했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가 제시하는 해법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공포와 탈출 욕망이 선거라는 틈을 통해 흘러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흐름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흘렀다. 더불어민주당은 내홍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김종인이라는 경제민주화의 아이콘을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국민의당은 호남이라는 진지를 확보했고, 안철수의 ‘새 정치’라는 선무 방송을 여전히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의당은 그저 기존 지지 세력을 확인하는 데 그쳤고, 노동당과 녹색당은 선거 결과를 평가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그 결과, 주요 야당이 하나 더 생기긴 했지만 정당체제와 정치 자체는 제자리걸음한 셈이다. 이렇게 변화의 열망이라는 거대한 흐름은 기성 질서를 유지하는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숙고는 시작된다. 그 숙고는 절망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사회적 전환과 생태적 전환을 유토피아적인 이상으로 제출한 게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출했다. 그런데 유토피아적이라는 비난조차 받지 못했으니, 이게 현실적인 대안인지 아닌지 자체를 논의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셈이다.

이때 우리 앞에는 층위가 다른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구현할 수 있는 힘과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최소한 한국에서는, 최소한 당분간은 어떤 의미 있는 변화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그 나름 근거가 있는 생각이다. 이른바 분단 체제 하에서 한국의 이데올로기적 심성의 지형도가 한쪽으로 심하게 쏠려 있다는 것이 그 근거다. 그러니 이런 체제 자체에 어떤 변화가 있기 전에는 민주화와 개혁이라는 범위를 넘어서는 대중적인 움직임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전자는 지연의 일종이다. 이미 갖추었어야 할 어떤 것이 부족한 것이다. 후자는 말 그대로 결여이며, 이는 불가능성의 조건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두 가지 선택지가 층위가 다르기 때문에 일종의 왕복운동을 하거나 하나는 지반 역할을 하고 다른 하나는 퍼포먼스의 공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절망을 하는 것도, 절망 속에서도 어떤 모색을 하는 것도, 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지연과 결여 모두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인정할 때만 새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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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7호(2016년 05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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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4, 2016

‘말 걸기’로서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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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근대의 시간이 균질적이고 공허하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시계의 시간에서만 그렇게 느낄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기쁨의 시간은 찰나이고 슬픔과 고통의 시간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을 때, 우리는 이를 분명하게 느낀다. 이런 느낌이 어떻게 해도 세상은 잘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과 겹쳐질 때 우리는 중지 상태에 들어간 것 같은 제곱의 느낌을 가진다. 이런 시간 감각은 막혀 있다는 공간 감각과 닿아 있다. 막혀 있다는 공간 감각이 주로 통치자와 주권자 사이의 관계에서 나왔다고 보지만, 주권자들 사이의 관계도 흩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갑갑한 시간적, 공간적 감각이 현 상황에서 거의 유일하게 열려 있는 합법적인 집단적 의사 표출과 충돌의 장인 선거에서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지켜보는 것은 일단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현행 대의제민주주의가 정당민주주의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고 또 이 정당들을 정치계급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흐를 수 있는 방향과 틀이 사전에 상당히 정해져 있다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보통선거권이 가진 위력 때문에 그 정당들도 대중이 느끼는 어떤 것을 최대한 (자기 식대로 포장해서) 제시하려 한다. 또한 정당민주주의의 선거는 정당체제라는 구도 속에서 진행되기에 반사적인 행위와 결집이 교차한다. 다시 말해 저들을 찍지 않기 위해 이들을 찍기도 하고, 저들이 모일 것을 두려워 해 우리가 모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이른바  민의를 제대로 흐르게 하는 것이리라. 여기서 우리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한다. 물론 누구나 말할 수 있다.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럴 만한 조건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기회의 평등’이 허구적이지만, 어쩌면 우리의 처지는 그 이전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예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권자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투덜댈 일이 아니다.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 이것이 정치가 할 일이다.

그 첫걸음을 누구는 ‘말 걸기’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서발턴이 말할 수 있기 위해 말을 건다는 것이다. 물론 선거 때는 모든 정치계급이 말을 듣겠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내건 공약이 그 말을 들은 결과이거나 말을 듣기 위한 매개인 것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말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진리의 정치’라는 문제틀과 마주한다. 저들이 거는 말과 우리가 거는 말은 어떻게 다르고,왜 우리의 말은 맞는 말이고 저들의 말은 거짓인가? 물론 여기서 제3항 혹은 신의 자리는 없다. 있는 것은 정세라는 말로 표현되는 관계뿐이다.

시간의 중지와 공간의 봉쇄 속에서 우리는 가끔씩 ‘메시아의 시간’을 요청한다. 아니면 지루한 사도 바울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하나가 원망願望이고 초월적인 시간이라면, 다른 하나는 위안이고 일상의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세적인 시간과 역사적인 시간, 그리고 그 둘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다는 믿음과 이를 위한 말 걸기, 우리가 발화하는 것이 진리라는 확신과 이를 위한 행위. 이것들이 교차하는 시간이 바로 그런 시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발화하는 것이 정세에 조응하는지, 정치의 임무인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인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역사에 기댄다. 물론 이때 역사는 과거로 향한 것이든 미래로 향한 것이든 도피처가 아니라 참조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대로 말 걸기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셈이다. 물론 그 말 걸기가 제대로 된 발화를 끌어낼 수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정치가 거기서 시작되는 한 이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선거만이 아니겠지만, 선거는 그런 말 걸기가 광범위하게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우고 지나갈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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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6호(2016년 04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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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 2016

새로운 시작(!)

자연의 흐름과 인간의 시간이 꼭 같지 않다는 것을 해가 바뀔 때만큼 심하게 느낄 때가 없다. 마음 같아서야 모두가 한 해를 보내고 또 맞는 시간을 차분한 휴식과 정리의 호흡으로 보냈으면 좋겠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렇지 못하다. 우선 한국의 정치 일정 자체가 이를 가로막는다. 예산을 다루는 정기국회에 의해 언제나 임시국회가 국민과 민생의 이름으로 열린다. 그런데 이 임시국회에서 처리하려는 법안들이 지금의 ‘노동 개악’에서 볼 수 있듯이 대개 국민과 민생을 어렵게 하는 것이기에 우리의 연말연시는 고단하다. 물론 이것만이라면 개선의 여지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길게 보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순들이 일부 해결되면서 언제나 새롭게 중첩되고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노동 개혁’이라는 이름의 개악도 경제 위기 시대에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한국의 대자본이 결국 노동 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를 벗어나 보려는,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고육지책에 불과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헬조선’이 은유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일 뿐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는 것은, 가져야 하는 것은 섬광처럼 비치는 열망과 변화다. 2015년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려는 대중의 정치적 표현이 가장 의미 있게 드러난 것은 1월에 있었던 그리스 시리자의 집권과 12월에 드러난 스페인 포데모스의 약진이다. 물론 시리자의 ‘굴복’이 커다란 실망감을 준 것이 사실이고, 포데모스의 약진도 등장할 때의 열광에 비하면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길게 보자.

신자유주의의 승리는 이제 꽤나 오래된 일이며, 이로 인해 우리가 받은 상처는 뿌리가 깊다.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지나면서, 좌파는 저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히틀러가 차근차근 군비를 증강하고 주변의 약한 곳을 침략할 때마다 거기까지만 양보하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이른바 유화 정책과 비슷한 태도를 보인 게 좌파였다. 자기들은 살릴 수 없는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자들이 살릴 수 있다고 보았던 게 아닐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좌파의 성공은 자본주의의 성공과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비슷한 점은 여기까지다. 전면적인 전쟁 속에서 당시에는 어쨌든 반파시즘 동맹이 형성되었고 결국 ‘민주주의의 승리’를 가져오기는 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밀린 좌파는 광범위한 전선의 형성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모방하는 길을 택했다. 트로이의 목마를 탄 셈이다. 정치적 대안이 없던 대중이 차선으로 이들을 지지했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유럽에서는 다시금 좌파가 약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권한 좌파가 한 일은 신자유주의를 되돌리거나 다른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발밑을 파는 것이었다. 이미 트로이의 목마는 살아 있는 말이 되었고 자기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9년 ‘시애틀 전투’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수준의 대중 저항은 가능한 곳에서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적에 대한 새로운 이해, 여기에 맞서는 대안의 형성 등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었다. 이는 2000년대 들어 라틴아메리카의 ‘핑크 타이드’를 형성했고,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친 게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라틴아메리카의 변화는 또 다른 ‘약한 고리론’을 낳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2008년 중심부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는 지배층의 뉴딜을 낳지 못하고 대중의 ‘누벨 바그’를 형성했다. 2011년에 시작된 점거 운동이 그것이다. 이것이 1930년대와의 차이다. 당시에는 경제 위기 속에서 지배층이 ‘수동 혁명’을 벌였고 좌파는 전통적인 대응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어떤 수동 혁명도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며, 프랑스대혁명 직전의 귀족의 ‘전혁명’이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결국 여기에 맞서는 길은 대중의 분출일 수밖에 없다. 대중의 분출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 2015년 1월 그리스 시리자의 집권이다. 어쨌든 시리자의 승리는 대중이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비록 물려받은 부채 때문에, 그리고 유럽이라는 스핑크스 때문에 단번의 탈주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일단 알렉시스 치프라스라는 정치인 개인의 야심은 논외로 하자.) 그리고 12월에 스페인 포데모스의 약진이 있었다. 이로 인해 스페인의 양당 체제가 끝나고 ‘불안정한 상태’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따라서 앞날은 안개 속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리자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포데모스는 ‘분노한 사람들’이라는 대중의 분출이라는 파도를 타면서 등장한 정치세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난 사반세기 이상 새로운 좌파 정치세력의 등장을 이만큼 강렬하게 보여 준 일이 없다고 할 수 있으며, 여기서 핵심은 대중에게 어떻게 대안을 제시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광이 아니라 냉정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열광의 흐름을 어떤 방향으로 가져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냉정한 사고다. 지금까지 나타난 대중의 열광은 ‘반긴축’으로 표현되듯이 기존 체제에 대한 거부로 나타났을 뿐이다. 물론 앞서도 말한 것처럼,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감안할 때 이는 대단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래된 미래’와 ‘주변의 미래’를 벼려 내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지전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진지전을 시작하기 위한 기동전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의 비판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좌파는 기동전의 패기를 잃어버리고 진지전만을 고수함으로써 그 진지마저 잃어버리는 우를 범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유형의 싸움만을 고집하는 것은 전략의 부재를 보여 줄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전략은 무엇일까? 중도파의 일부마저 청년 세대를 향해 ‘분노하라’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무너지는 느낌 속에 ‘두 개의 나라’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때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는 개입이라는 방식의 기동전이다. 물론 이는 언제나 뇌관만 불타고 끝나 버릴 수 있다. 또 다른 과제와 결합할 때만 그 뇌관은 마른 풀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또 다른 하나는 기존 체제의 불가능성에 대한 설파인데, 이는 오직 대안의 제시로만 가능하다. 오늘날 한국에서 어떤 정치세력이 스스로를 좌파라고 한다면,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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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3호(2016년 01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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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 2016

숭고함과 우스꽝스러움

35호책머리에

혁명이나 위기는 맑스의 말처럼 “과거의 망령들을 주문으로 불러”낸다. 이렇게 하는 것은 “세계사의 새로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과거의 투쟁들을 흉내 내기 위함이 아니라 새로운 투쟁들을 찬양하기 위함이었고, 주어진 과제의 현실적 해결을 회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 혁명의 정신을 재발견하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테러방지법을 국회의장이 본회의에 직권으로 상정한 것에 맞서 야당들이 필리버스터로 맞서고 있는 모습은 지금이 바로 위기라는 것을 보여 준다. 47년 만에 부활한 필리버스터라는 망령, 기본적으로 10시간씩 사자후를 토하는 스펙터클을 보면 분명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이른바 “독소 조항”을 제거하면 이 법안을 합의하여 처리하겠다는 야당의 태도를 보면 맑스가 같은 글에서 헤겔을 수정해서 인용한 것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분명 9·11 이후 (새로운 기술의 발전 및 확산과 더불어) 테러는 언제든 보통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는 편재된 현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가장 근본적인 권리인 생명권이 잠재적으로 위협받는다는 인식 속에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유보하거나 폐기하는 역설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역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지만 자유주의 이외의 사상을 용인하지 않는 자유주의의 배반이나,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나선 청교도가 다른 종파를 박해하는 일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더 근 본적으로 인간의 조건인 공동체 속에서 개인들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 그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라는 정치적, 윤리적 질문이 있다. 이런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생각과 더 넓은 실천을 요구한다.

하지만 지금의 테러방지법은 이런 질문과 비판 이하에 있다. 이른바 독소 조항이라 불리는 것에는 국정원이 초법적 권한을 쥐고 광범위한 자의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더구나 “영장 없이”계좌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권한은 말 그대로 법의 정지 상태를 말한다. 이런 모습은 위기를 정치 공동체의 위기로 받아들이지 않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의 편익과 권한을 확대할 수 있는, 말 그대로 기회로 보는 세력과 개인 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정된 테러방지법에 대한 합의 운운하는 것은 발화자의 소심함을 보여 주는 일이거나 사실은 테러방지법 같은 간편한 처방전으로 위기를 해결하자는 무능함을 나타낼 뿐이다. 만약 이럴 경우 보통 10시간을 기본으로 이루어진 필리버스터라는 숭고함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필리버스터는 “새로운 투쟁을 찬양하기” 위한 게 아니라 “골동품 연구가나 알고 있을 사항”에 불과한 어떤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긴 누구 말대로 숭고함과 우스꽝스러움 사이에는 한 발의 간격만 있을 뿐이다.

이런 사태는 총선을 계기로 해서 좌파와 녹색의 새로운 의제로 떠오른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치가 미래의 이상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한다고 할 때, 그 문제를 구성하는 근원이 ‘사회 양극화,’ ‘부의 극단적인 불평등’과 같은 말로 표현되는 삶의 위기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분명하다. 이럴 때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권리로서 주어지는 기본소득은 우선적으로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경제적 해결책이다. 또한 1968년과 1989년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치적 의제는 시민, 즉 정치적 주체의 (자기) 구성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기본소득은 그럴 수 있는 조건의 확보를 자기 목표로 한다.

이런 기본소득에 대해 “사회주의적이지 않다”라는 비판은 자신의 신조를 엄숙하게 고백하는 일이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태도는 아니다. 도리어 재원이 많이 든다는 비판은 소심하긴 하지만 현실적이긴 하다. 그러니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보자. 현실의 인도적 위기를 해결하면서도 이것이 미래로 이어지게 할 수 있는 수단과 경로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시대에 사회주의를 말하는 사람의 숭고함을 믿는다. 그건 국회 본회의장에서 벌어지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숭고함은 그 자체로 비극일 뿐만 아니라 다음번 비극을 위한 디딤돌이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움은 약간의 웃음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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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5호(2016년 03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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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 2016

[제31호(15년 11월호) |책 머리에| 반복과 차이 / 안효상

반복과 차이

기시감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반복이라고 하는 게 나을 듯싶다. 기시감이라고 하면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반복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듯이 희극으로 끝난다.

역사 교과서라는 사태가 개인의 과욕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고도의 정치적 계산인지 분명하게 알기 어렵고, 사태의 전개에 따라 다양한 이용 방법이 모색될 것이기 때문에 그 의도는 더욱 혼탁해질 것이지만, 온 세상이 이 문제를 둘러싸고 홍해처럼 갈라진 건 분명하다. 하지만 더 분명한 것은 대칭적으로 갈라진 것으로 아니라 매우 비대칭적으로 갈라져 국정화 반대 전선에 다양한 세력과 사람이 집결했다는 것이다. 만약 정치를 스포츠에 비유할 수 있다면 심판은 마음속으로 이미 승부를 결정했을 것이다.

이건 어떻게 보더라도 ‘87년 체제’의 효과라 할 수 있다. 우선 교과서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교과서에 담길 내용의 학문적 기초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합의, 교과서 자체가 다양해야 하며 국가가 거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원칙의 인정, 그리고 무엇보다 독단적이면서도 비밀리에 이루어진 그 과정에 대한 반발 등이 이 전선이 확대된 이유다. 그 위에 우리 역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충돌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최소한 하나의 정상적인 국민국가로서, 식민지 잔재에 대한 청산의 열망,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여야 한다는 정치적 방향 등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압도하는 기초다. 87년 체제의 효과라고 하는 것은 이런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다수의 동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통령의 개인적 욕망이든, 그의 국가관이든, 그 무엇 때문이든 간에 이 ‘역사 전쟁’이 유신 시대의 모습과 판에 박힌 듯 똑같아 보여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희극으로 끝날 것이다. 물론 그 희극을 보기 위한 우리의 투쟁이 비극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반복은 최근에 새로 대표가 선출된 노동당에서 볼 수 있다. 새 대표단이 들어서고 중앙당이 어느 정도 정돈을 하면서, ‘진보 결집’을 둘러싼 혼란이 끝나고 노동당은 외형상 안정을 찾은 듯하다. 하지만 지난 번 전국위원회를 보건, 이렇게 저렇게 나오는 의견을 보건 이른바 당내 갈등은 갈등 이상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정파 사이나 개인 사이의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야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질 수도 있고 아니면 더 굳어질 수도 있다. 마음의 문제를 어떻게 논리로 바꿀 수 있겠는가? 문제는 정세에 대한 이해, 하나의 정치세력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의 근거 등을 둘러싼 차이일 것이다. 여기서 반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뿌리 깊은 철학의 차이가 갈등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근대 사회운동의 전제는 다수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다수를 말하는 소수의 집단, 과거에는 혁명가라고 불렀고 오늘날에는 그냥 평범하게 정치가라고 부르는 집단이 다수와 구분되어 있다. 문제는 소수가 다수를 어떻게 획득하고 동원할 것인가다. 어떤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즉 삶의 현장에서 다수를 조금씩 획득하고 조직해 가는 것이 일차적 과제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수를 짧은 시간에 획득하고 동원할 수 있는 선명한 의제와 투쟁이 소수의 과제라고 말한다. 이를 둘러싸고 전자는 후자를 맹동주의라고 공격하기도 하고, 후자는 전자를 점진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진리라고 말하기는 사실 어렵다. 마찬가지로 “봉기 앞에서 주저하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레닌의 말이나 대중과 전위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비유한 마오의 말이나 다 진리라 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와 정세에 준거할 수밖에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역사와 정세에 준거한 주체의 과제 설정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지금이 대장정을 통해 주체의 힘을 모으는 시기인지 아니면 ‘선도적인 투쟁’을 통해 확산의 불꽃을 기대할 수 있는 때인지? 물론 이것 또한 주체의 역량에 대한 평가를 빼놓고 할 수 있는 판단은 아니다. 대장정이 되었건 선도적인 투쟁이 되었건 자기 힘에 대한 타산 없이 일을 벌인다면 그것은 망상이거나 책임 회피가 될 것이다.

따라서 고집스러운 말이 아니라 정세와 역량에 대한 판단과 타산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그렇지 못한 것이 우려스러운 일이고, 반복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 반복은 희극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제대로 토론되고 실천되지 못한다면 미완성으로 끝나고 그것은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볼썽사나운 장면을 연출할 것이며, 전체적으로 비극일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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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1호(2015년 11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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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 2016

경제민주화의 시대(?)

총선을 앞두고 모든 정당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그러면서 정당 내부에서 그리고 정치체제에서 꽤나 격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변화의 시작은 안철수 의원이 작년 12월 중순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야권 분열’로 새누리당이 커다란 ‘반사이익’을 누릴 것이고, 이는 국회선진화법을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180석까지 이번 총선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치까지 낳았다. 하지만 “정치란 생물”이란 말처럼 정치는 두려우면서도 변화무쌍한 어떤 것인가 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더불어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을 ‘영입’하면서 지형은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인격은 추상적인 가치의 상징일 수도 있지만, 정치에서 인격은 사실 ‘의제’의 체현자다. 이런 점은 과거의 이력이야 어떠하든 더불어민주당이 영입한 김종인 전 의원에 잘 들어맞는다. (김종인은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영입한 한상진 교수와는 효과가 다르다. 한상진 교수도 한때 ‘중민 이론’이란 것을 제출한 적이 있지만, 이것이 어떤 정치적 효과가 있는지는 현재까지 미지수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김종인 전 의원은 ‘경제민주화’의 주창자이며, 현행 헌법에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 즉 119조 제2항이 들어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김종인이기에 경제민주화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고, 정부와 새누리당이 급하게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이 얼마나 잘 이행되었는지를 발표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격이 어떤 의제의 체현자라 하더라도 아무 것이나 의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시대의 과제 일 뿐이다. 옥스팜이 얼마 전에 내놓은 보고서인 「1퍼센트를 위한 경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62명이 가진 부가 하위 36억 명이 가진 것보다 많다고 한다. 지난 5년 사이에 62명이 가진 부는 44퍼센트가 늘어난 데 반해 36억 명이 가진 것은 41퍼센트가 줄어든 결과다. 더 안 좋은 통계는 상위 1퍼센트가 가진 부가 나머지 전체의 부보다 커 졌다는 것이다. 원래 예상은 2016년이었으나 1년 앞당겨 이런 결과가 나왔다. 한국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은 굳이 숫자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러니 김종인 전 의원이 등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안철수 의원의 대권 의지가 탈당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양극화와 불평등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의제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정치공동체의 일부 구성원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을 경우, 그건 정치공동체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묻는 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는 「세계인권선언」에 나오는 “인류 가족”의 의미를 묻는 일로 나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 즉 생존의 권리, 더 나아가 자기 공동체에, 인류의 삶에 적절하게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치와 도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소득 기반 경제’와 ‘경제민주화’를 말하지만, 정작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지 않거나 추상적인 목표만을 제시할 뿐 구체적인 수단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다면 경제민주화는 공허한 슬로건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은 경제 위기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위기 탈출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그래서 ‘저성장’이 ‘뉴노멀’이라고 말해지는 시대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교의인 공급 위주의 경제학이나, 신조라 할 수 있는 감세와 규제 완화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많이 생산해서 더 많이 수출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경제체제도 해답이 될 수 없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교의와 신조는 바로 오늘날의 양극화와 빈곤의 주범이기에 오로지 극복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양극화와 빈곤을 줄이는 획기적 인 조치다. 경제민주화 조항이라고 말하는 대한민국 헌법 119조 제2항은 이에 대해 “적정한 소득의 분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다음으로 저성장 시대에 맞는 경제 모델을 찾아야 한다. 사실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강의 방향을 말하기는 한다. 바로 ‘내수 중심 경제’, 다시 말해 지금까지의 극단적인 수출 의존에서 벗어나 수출과 내수가 균형을 이루는 경제 말이다. 물론 여기에 더해 비물질적 노동과 케어 경제가 더해져야 할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이를 문화사회로의 전환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양극화와 빈곤을 줄이기 위해서도, 내수를 살리기 위해서도 다수의, 아니 모두의 소득이 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이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경우 최저소득이 보장되어야 하고 일자리 자체가 안전하고 안정되어야 한다. 21세기에 최저임금 1만 원과 주당 35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게 부당한 일인가? 맑은 눈과 뜨거운 가슴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이것만이 아니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다양한 인간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고용을 통한 소득 이외에 모두에게 주어지는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오로지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받는 기본소득은 모든 구성원의 기본적인 생존을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정치공동체에 대해, 이 속에서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 다시 사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정치공동체를 ‘리셋’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앞서 말한 헌법 조항이 보장하는 바이다. “국가는 ……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물론 이 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국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이 87년이라는 격동을 거치면서 만들어졌고, 경제민주화라는 문제의식 자체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 속에서 핀 꽃이며,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사회복지가 대공황, 파시즘,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화 속에서 맺은 열매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말하는 경제민주화, 즉 거대한 사회 변화가 쉽게 일어난다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잘못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총선을 앞두고 제기된 경제민주화가 당장 어떤 결실을 낳을 것 같지는 않다. 도리어 총선이라는 열린 정치적 공간이 경제민주화로 가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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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4호(2016년 02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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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2015

역사라는 이름의 피난처

정부와 여당 그리고 이런저런 이데올로그들이 벌이는‘역사 전 쟁’에 어떤 교훈적인 효과가 있었다면, 그것은 역사인식의 제고일 것이다. 이때 제고된 역사인식은 진보의 역전 가능성과 역사의 반복에 대한 깨달음이다. 에릭 홉스봄은 역사가의 임무가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는 것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오른쪽에 있는 정치가들이 그 역할을 대신 떠맡은 모양새다.

‘단기 20세기’의 시작인 제1차 세계대전이 진보의 부정적 효과 에 대한 인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면, 그 끝자락인‘역사적 사회주 의체제’의 붕괴는 진보의 역전 가능성을 웅변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 되었다. 이로부터 두 방향의 윤리가 나왔다. 하나는 인간의 분투를 포기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감시하고 환기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역사의 반복이라는 주제는 헤겔과 맑스 이후 진부한 것이 되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소극으로!”

맑스가 헤겔의 말을 이렇게 수정한 것은 아무리 위풍당당한 모 습으로 등장한다 하더라도 시대착오적일 때 그 끝은 우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반대편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것 이다. 딸에게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읽어 내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일 일 수 있지만, 죽은 전직 대통령까지 이 싸움에 불러내는 얄팍한 시도는 영결식장에 참석하지 않은 현직 대통령의 모난 마음과 어울려 우리의 시간을 과거로 돌려놓는 일에 불과하다.

현직 대통령의 모습과 대비되어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이 두드 러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아니 꼭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공과 과를 병렬하는 식의 평가는 참으로 익숙한 일이다. 무릇 세상 어떤 일에도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는 법이다! 분명 김영삼 대통령은‘87년 체제’가 성립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그는 이 체제를 형식적 민주 주의로 제한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시장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토대로 만들었다. 뒤이어 같은 자리에 오른 김대중 대통령이 신자유주의로 가는 길을 연 것은 그런 토대 위에서였고, 이런 점에서 두 사람은‘양 김’이라고 불리는 게 확실히 어울린다.

현 대통령을 독재자로 부르면서 민주주의의 후퇴를 말하는 것은 사태의 반만 이해하거나 사태를 이해할 수 없어 과거로 도망치는 것이다. 도리어 역사를 보면 지난 40여 년 사이에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과거에 민주화운동이 최소한의 형식적 권리를 위한 투쟁이었다면,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다수의 삶을 지키는 싸움으로 위상이 변화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추상적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면 오늘날에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고, 이는 모든 시민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된 올해 경제성장 예상치 및 내년 경제 전망을 보면 한국도 세계경제 위기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용노동부 발표조차 늘어난 일자리의 많은 부분이 ‘비정규직’이라는 것을 실토한다. 그런데도 현 정부가‘노동 개악’을 밀어붙이는 것은 정권의 업적주의라기보다는 경제 위기를 피해가려는 자본의 선제공격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방도가 없는 가운데 오직 노동비용을 줄이는 것으로만 이윤을 짜내려는 무능한 자본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자본이건 그 반대편이건 성장이 고용을 낳고 경제를 선순환시킬 수 있는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과 폭의 성장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행밖에는 답이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이행인가다. 폭발적이긴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이행인가 아니면 합리적인 이행인가? 이런 양자택일 속에서 양 진영 모두에서 이데올로기적 동요가 일어난다. 글로벌 자본가들이 소득불평등에 불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많은 케인스주의자들이 노동의 권리 확대만으로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현상 자체가 이미 우리 시대가 거대한 전환을 시작했음을 알린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때 과거를 그냥 불러내서 현재와 대비시키는 것은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일일 뿐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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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32호(2015년 12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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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2015

[제28호(15년 08월호) |책 머리에| 대항 공론장과 대항 이데올로기 / 안효상

대항 공론장과 대항 이데올로기

목적론적인 진보사관을 버린 다음 그래도 역사를 의미 있는 어떤 것으로 삼고자 할 때, 우리 앞에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오래된 미래’로 돌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의 ‘보고寶庫’ 를 뒤지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로 돌아가는 것이 말 그대로 과거를 살펴봄으로써 미래를 엿보는 것이라면, 역사의 보고를 뒤지는 일은 현재적 과제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 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라는 그람시의 말을 따르자면, ‘진보의 위기’란 진보가 거의 죽어가는 데도 이를 대신할 만한 어떤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물론 진보의 위기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고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하지 못했던 것을 제대로 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 경우에 내놓는 처방은 정치적으로 보자면 ‘패권주의’ 버리는 것이고, 조직적으로는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다양해진 노동자계급을 다시금 하나의 틀로 묶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하면 정치적, 사회적으로 볼 때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 정치집단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기는 어렵다.

도리어 지금의 위기는 커다란 순환이 끝났다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새로운 패러다임 혹은 대안이 있을 경우에만 새로운 순환을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패러다임 혹은 대안의 필요성은 우리 쪽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각국의 지배계급 혹은 글로벌 지배계급은 적절한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며, 한국의 경우 ‘창조 경제’는 전혀 창조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 지 오래이다. 이렇게 기존 지배계급 내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기는 어려워 보이며, 이것이 “이상하게 죽지 않는 신자유주의” 라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출구는 왼쪽에 있다” 라고 말하고 싶다.

꽤나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사태를 보는 방식은 이렇다. 현재 한국 정치는 53년 체제, 87년 체제, 97년 체제가 중층결정하고 있지만, 중심축은 87년 체제라 할 수 있다. 이때 중심축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모든 정치 행위의 준거점이라는 의미에서다. 간단하게 말하면, 정치적 자유 및 제도로서의 정당정치와 경제민주화에 대한 약간의 요구가 그것이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다. 87년 6월에 뒤이은 7월과 8월이 보여 주었듯이 공간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이 속에서 사회의 다양한 부문의 목소리가 발화되고 교차되었다. 물론 이 공간은 여전히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다.

87년 체제가 준거점이라는 마지막 이유는 이 속에서 발전주의 국가 시기가 끝나고 본격적인 ‘자본의 시대’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87년 체제에서 열린 공간은 모두가 입장할 수 있는 곳이었고, 여기서 발전주의 국가에서는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경제적 자유를 추구할 수 있었다. 여기에 97년 체제가 겹치게 된다.

물론 97년 체제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해서 IMF 등 글로벌 자본의 대행 기구가 설계한 것이긴 하지만, 한국 정부와 대기업 등은 ‘한국형’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만큼 극악한 신자유주의적 노동체제, 사회체제를 만들어냈다. 다수의 사람을 생존의 극한으로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이 체제는 분명 인도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위기를 낳았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양극화와 배제는 87년 체제 자체를 위태롭게 했고, 이른바 형해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개가 시차를 두고 벌어졌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일종의 착시를 낳았고, 결국 사후 인식을 가져왔다. 하지만 사후 인식이란 것은 결국 위기 속에서의 인식일 수밖에 없다.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위기에 대해 우리는 ‘진보의 재구성’이 아니라 ‘정치의 귀환’과 ‘주체의 발견’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정치의 귀환은 둘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새로운 보편적 의제를 제출함으로써, 다원화되고 ‘정체성의 정치’로 축소된 정치를 더 넓게 재구성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첫 번째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 제도화된 정당정치 및 시민사회운동을 넘어서는 운동정치의 시작이다. 이는 곧장 주체의 발견이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때 주체란 실정적인 사회계급이나 계층에서 연원하긴 하겠지만 직접적으로 이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새로운 주체로 청년층과 불안정 비정규노동자를 지목할 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가능성이지 자동적 형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정치의 귀환과 주체의 발견이라는 문제는 의제로 돌아간다. 어떤 조건에서 어떤 의제가 제출될 때 새로운 주체에 의한 운동정치가 가능하고 이것이 다시 체제 자체를 바꿀 힘이 될 수 있는가? 또한 새로운 의제가 제출되기 위해서는 프레임 자체를 바꾸어야 하고, 이는 대항 공론장과 대항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이때 ‘광주항쟁’을 전후로 한 현대사는 이와 관련한 실마리를 준다.

 

“민중 만들기The Making of Minjung”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다루는 이남희의 책은 대항 공론장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이남희, 『민중 만들기: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재현의 정치학』, 후마니타스, 2015년). 이때 민중은 실정적인 민중은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지식인과 대학생 들의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1970년대 노동자운동과 1980년 광주항쟁을 목격하고 경험하면서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고 재발명했다. 저자는 이를 “민중 프로젝트”라고 하며, 이 프로젝트는 “억압적인 군사정권 및 급속한 산업화, 그리고 민중운동이 스스로 배태한 ‘정치 문화’가 복합적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치 문화인데, 이는 프랑스혁명 연구자인 린헌트의 개념을 빌려 온 것이다. 정치 문화는 “비전, 언어, 코드, 이미지 등을 공유하는 것과 같은 상징적 행위로 구성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이 형성된다.” 민중 프로젝트를 진행한 지식인과 대학생 들은 특유한 정치 문화 속에서 하위 대항 공론장을 구성한다. 이 정치 문화와 대항 공론장에는 “실패한 한국 근대사”에 대한 인식부터 억압적 정치 체제에 반대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급속한 산업화가 낳은 자본주의의 다양한 모순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공동체적 유토피아까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하위 대항 공론장이 어떻게 해서 보편적 정치적 장을 구성하거나 아니면 전환의 준거점이 될 수 있는가”다. 근대사회의 의미 있는 정치적 변동이 대중의 진출 혹은 “틈입”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면, 특정 사회집단이 구성한 하위 대항 공론장이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는 계기나 의제가 필요하다. 물론 민중 프로젝트는 그 말이 표현하는 것처럼 잠재적으로 그럴 계기를 포함한다. 하지만 그 이상이 필요한데, 그것은 지배적인 공론장과의 교집합 혹은 지배 이데올로기와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항 공론장을 “하위” 공론장이라고 할 때, 그것은 지배적인 공론장과 대결하지만 자신이 보기에 지배적인 공론장이 실패한 지점에서 전투를 벌인다는 것이다. 지배층의 실패하고 불완전한 민족주의에 맞서는 민중으로서의 민중, 근대화와 산업화의 그늘로서의 민중, “한국적 민주주의”의 피억압자로서의 민중 등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항 공론장을 이런 식으로 보면 이른바 대항 이데올로기도 유사한 문제틀로 볼 수 있다. 잊혀져가는 사건 혹은 과거로서의 사건이 되어 버린 ‘광주항쟁’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김정한의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소명출판, 2013)는 사건으로서의 대중 봉기와 대항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보여 준다.

광주항쟁 혹은 ‘5·18’의 의미를 여러 각도에서 풀어낸 이 책의 핵심적인 테제는, 주로 발리바르에 기대어, “대중들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사회 모순을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하며, 지배 이데올로기에 내재되어 있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적 보편성을 현세에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다”라는 것이다. 저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중 봉기는 “어떤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mass를 이루고, 상상할 수 없던 행위를 발명하며 잡다한 목소리와 언어를 쏟아내고 비범한 자발성을 표출하는 시공간time-space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5·18을 대중 봉기로 개념화하려는 것은 “대중 봉기를 숭고한 대상으로 승화시켜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운 영웅들의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이런 “영웅 신화는 오히려 오늘날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것으로 5·18을 탈정치화하고 5·18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부추기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탈정치화하지 않고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부추기지 않는 것은 당연하게도 새로운 대항적 공론장과 대항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대중 봉기의 계기를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진보의 위기’를 순환적 위기로 파악하고 새로운 대항적 공론장, 대항 이데올로기, 새로운 주체를 구성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광주항쟁을 전후로 한 현대사라는 보고의 먼지를 털어낸 후 이를 현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방식과 겹쳐 놓을 경우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대항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급진적인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때, 형해화된 87년 체제의 새로운 완성을 위한 노력이 새로운 의제를 구성하는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항적 공론장의 구성이 필요한데, 현재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이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민중운동을 뒷받침한 주요한 것이 한국 근현대사의 실패에 대한 인식이라는 ‘역사 주체성의 위기’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분명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생태적 위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우선 이를 통한 ‘운동권’의 구성이 요청된다고 본다. 하지만 이 새로운 프로젝트는 당연하게도 새로운 주체를 요청한다. 이를 발견하고 재발명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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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28호(2015년 08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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