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7, 2015

왜 긴축정책은 그리스를 위기에서 구할 수 없나?

유승경

국민들에게 긴축안을 거부할 것을 호소했던 그리스의 치프라스 총리가 유로존 지도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더욱 강화된 긴축방안에 합의해버렸다. 치프라스는 그렉시트(Grexit)보다는 구제금융이 그리스를 위기에서 구하는 더 나은 방법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유로존 탈출에 대한 플랜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그에 따른 혼란에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6년 간의 구제금융 과정이 증명해주듯이 긴축정책은 구제금융이 주어진다하더라도 그리스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긴축 정책의 딜레마

한 나라의 부채부담의 정도는 통상적으로 GDP 대비 정부부채규모의 비율로 측정한다. 유로존의 지도자들은 이 비율을 낮추기 위해 그리스 정부에게 지출을 줄여 재정 흑자를 낼 것을 강요해 왔다. 정부 부채는 재정 적자가 누적된 것이며 정부 부채를 갚기 위해서는 재정 흑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긴축정책의 부정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경제침체기에 정부가 지출을 축소하면 경기가 더욱 위축되어 국민들의 고통 부담에도 불구하고 GDP가 감소하고 세수가 감소하여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 이제까지의 과정이 그러하다.

이런 측면을 고려하면 추가적인 구제금융이 지원되고 만기가 연장되더라도(설령 상당한 정도의 부채 탕감이 있더라도) 그리스가 국가 부채를 차질 없이 해결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민간(가계와 기업)이나 정부가 부채를 자력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채를 완전히 청산할 때까지 최소한 이자보다 더 많은 금액을 저축해야 한다. 소득에서 필수적 지출을 하고 남은 금액이 최소한 해당 기간에 변제해야 하는 이자보다 많아야 원금을 줄여갈 수 있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부채를 정상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외부의 도움을 받더라도 긴축 기조를 유지하는 한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원리를 국가에 적용해 보면 국가 부채를 자력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명목 경제성장률(경제성장률 + 인플레이션율)이 국채의 수익률(이자율)보다 높아야 한다. 한 국가의 국채 수익률이 7%를 넘어서면 일반적으로 구제금융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는 이 정도의 차입 비용을 해결하려면 명목 경제성장률이 7%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율이 2%라고 한다면 그 나라는 최소한 연간 5% 이상의 실질 경제성장률을 달성해야 하는데 긴축재정을 실시하고 부채 해결에 많은 자금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높은 경제성장을 실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실제로 남유럽의 재정위기국가들은 그동안 국채의 평균이자율이 4%를 상회했지만 경제성장률은 대부분 마이너스 성장을 하거나 1.0%에도 못 미쳤으며 물가상승률은 극심한 수요 부족으로 인해 디플레이션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부채를 해결하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은 경제성장과 인플레이션 정책이다. 실질 경제성장률과 인플레이션율의 합이 국채조달 비용을 상회한다면 자력으로 부채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현재 추진 중인 긴축정책은 경제 성장률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경제를 디플레이션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유로존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

유로존의 위기는 현재 남유럽의 부채위기라는 양상을 띠고 있다. 유럽의 남쪽 주변국들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은 정부, 가계, 기업 모두 많은 부채를 지고 있다. 주변국들이 정상적인 성장 궤도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부채를 해결해야 한다.

채권자들과 합의하여 부채 규모를 축소하고 상환 일정을 유예한다 하더라도 부채를 완전히 청산하기 위해서는 저축을 늘려야 한다. 정부는 세출을 줄이고 세수를 늘려야 하며 민간(기업과 가계)도 지출을 줄이고 더 많이 저축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와 민간이 모두 저축을 늘리고 수요를 줄이면 어디서 성장을 이끌 수요를 창출할 것인가? 대외 수요, 즉 수출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경상수지 흑자를 실현하는 것이 정부와 민간이 동시에 부채를 감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내수가 위축된 상황에서 수출은 성장의 유일한 활로인 것이다.

수출을 늘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와 같이 긴축정책을 통해 내적 절하 (임금, 물가 깎기)를 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정치적/사회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 국민의 고통이 너무 심하다.

또 다른 방법은 평가절하이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자국의 화폐가치를 절하시켜 수출 가격을 낮추어야 한다. 다른 곳을 찾아가는 관광객을 싼 값의 서비스로 다시 불러 들여야 한다. 주변국들의 수출 대부분이 유로존 내부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유로의 평가절하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출을 실제로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유로존에서 벗어나 평가절하를 단행해야 한다.

두 방안 중 어느 길을 택하더라도 혼란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한쪽은 미래의 비전조차 보이지 않지만 두 번째 방법은 지금은 힘들어도 저 멀리 미래에 대한 희망의 빛이 보인다. 결국 남는 문제는 혼란을 최대한 줄이면서 어떻게 유로존에서 이탈하는가이다. 그리스의 유로존 탈출은 엄청난 금융적 충격을 줄 것이다. 화폐를 부활하는 과정이 너무나 복잡하고 많은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사실 이 과정을 그려보면 우울해진다) 그렇지만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수술이 불가피하다. 미룬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유승경
월간『좌파』 편집위원

1407, 2015

긴축에 대한 대안: 그리스 위기에 대한 좌파플랫폼(시리자 내부의 좌파 블록)의 대안

영문요약본

이 글은 7월 10일 시리자 의원 총회에서 제출된 좌파플랫폼의 성명서 요약본이다.

영어로 된 이 요약본의 출전은 다음과 같다.
www.jacobinmag.com/2015/07/tsipras-euro-debt-default-grexit

영문요약본

이 중요한 시기에 시리자 정부는 긴축 프로그램, 탈규제, 사영화를 강요하려고 하는 ‘유럽연합기구들’의 협박을 거부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시리자 정부는 ‘유럽연합기구들’에게 그리고 그리스 국민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해야 한다. 마지막 순간에라도 긴축을 끝내고, 경제에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하며, 경제 회복을 이끌고, 의미 있는 부채 탕감을 포함하는 프로그램을 가져오는 긍정적인 타협이 없다면 시리자 정부는 진보적인 대안적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안적인 길은 그리스가 유로존에 머무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부채 상환을 중단하는 것이다.

채권자들의 압력과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리스를 유로존에 벗어나게 하는 과정이 심각하고 복잡한 일이라고 해도, 정부와 시리자는 이를 체계적으로 준비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정부와 당 내에 퍼져 있는 비극적인 폐쇄 상태 때문에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이라도 정부는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유럽연합기구들’의 협박에 대응할 수 있고, 또 대응해야 한다. 더 이상의 긴축이 없고, 유동성을 공급하며, 부채 무효화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이냐 아니면 유로존에서 나가고 정의롭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부채 상환을 중단할 것인가?

필요하다면 정부는 지금이라도 국민 통화로 나아가는 이행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가능성과 최소한의 유동이 있다. 이는 정부가 그리스 국민에게 정부의 신뢰를 심어주고, 특히 다음과 같은 조치를 채택하는 것을 가능케 할 것이다.

  • 은행 체제의 급진적인 재조직화, 사회적 통제하의 국유화, 성장을 향한 은행의 재정향.
  • 인도주의적 위기를 해결하고, 사회적 필요를 만족시키고, 사회 상태를 재조직하고, 경제를 침체의 악순환에서 빼내기 위해 재정 긴축(흑자 우선 및 균형 예산)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
  • 유로에서 벗어나고 주요한 부채를 무효화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초기 절차를 시행하는 것.   노동자 계급과 민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생산, 성장, 사회적 세력 균형의 변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경제 모델로 나아갈 수 있는 선택지가 분명히 있다.

현재의 상황에서 유로존에서 나가는 것은 어렵지만 가능한 과정이며, 이는 그리스가 융커의 패키지를 포함해서 받아들일 수 없는 프로그램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갈 수 있게 할 것이다.

유로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 자체로 목표가 아니라 사회 변화, 민족 주권의 회복, 성장과 사회 정의를 결합한 경제적 진보의 과정에서 첫 걸음이라는 것을 강조해야만 한다. 그것은 생산의 재구조화, 투자의 촉진, 복지국가와 법의 지배의 재구축에 기초한 전반적인 전략의 일부이다.

시리자 정부를 완전히 굴복시키려는 대부자들의 비타협적인 행동에 직면한 지금 유로에서 나가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공정한 선택이다.

끝으로 유로에서 나가는 것은 강력한 국내외의 기득권층과 대결하는 것을 포함한다.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대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자신의 프로그램을 실시하겠다는 시리자의 단호한 결정이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유로존에서 나갈 때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 화폐 주권의 회복. 이는 자동적으로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중앙은행(ECB)가 그리스에 얽어맨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 공적 투자에 기초하지만 이와 동시에 사적 투자도 허용하는 것에 기초한 발전 계획의 재수립. 그리스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공적 부문과 사적 부문의 새롭고 생산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이러한 프로젝트의 실현은 국내 저축과 결합한 유동성이 새롭게 자리 잡으면 가능할 것이다.
  • 수입 생산물이 장악한 국내 시장의 통제권을 다시 획득한다면 그리스 경제의 척추인 중소 규모 기업체의 역할이 다시 활성화되고 제고될 것이다. 동시에 국민 통화의 도입에 의해 수출이 촉진될 것이다.
  • 국가는 재정 정책과 화폐 정책 수준에서 유럽화폐동맹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국가는 유동성 공급에 대한 비합리적인 억제에서 벗어나 긴축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나는 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국가는 재정적 정의 및 부와 소득의 재분배를 가져올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초기 몇 달 간 어려움을 겪은 후 성장이 가속화될 것이다. 충분한 유동성이 공급되고 수요가 자극되면 7년의 위기 동안 쓰이지 않았던 자원이 양해각서의 재난적인 정책을 뒤집기 위해 빠르게 동원될 수 있다. 이것은 실업의 체계적인 감소 및 소득의 상승을 열 것이다.

끝으로 유럽화폐동맹을 떠나더라도 그리스는 덜 유럽적인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연합의 중심부 나라들과는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이는 스웨덴과 덴마크 같은 나라에서 이미 제출된 선택지이다. 유럽화폐동맹에서 나가는 것은 우리나라를 고립시키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반대로 국제 환경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할 것이다. 그것은 독립과 존엄에 기초한 역할이며, 양해각서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명령한 의미 없는 천민의 지위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유럽화폐동맹에서 나가는 과정은 물론 정치적 정당성과 대중의 능동적인 지지를 필요로 한다. 며칠 전에 실시된 국민투표는 국내외 기성 질서가 제기한 도전이 무엇이든지간에 모든 긴축 조치를 영원히 거부하겠다는 국민의 의지를 보여준 일이다.

이제 유럽연합이 국민투표 이후에 보낸 최후통첩에서 드러난 것처럼 채무 구제에 대한 합리적인 제안, 긴축 폐지, 그리스 경제와 사회의 구제 등의 제안을 유럽연합이 거부했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유로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번역 : 안효상

607, 2015

새로운 정치는 어디에서 시작되나?

안효상

 

지난 6월 28일 노동당 당 대회는 진보결집을 위한 4자(노동당, 정의당, 국민모임, 노동정치연대) 논의의 계속 추진을 당원 총투표에 부의하자는 안건을 부결했다. 형식적으로는 총투표안을 거부한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지금처럼 추진되는 통합 혹은 이렇게 모이는 통합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며칠 후 나경채 대표가 사퇴하였다. 이로써 노동당을 포함하는 통합은 당분간 테이블에 올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경채 대표가 사퇴하기 하루 전인 7월 2일 흥미로운 모임이 있었다. 4자 대표들이 민주노총 서울지하철 노조 군자차량기지를 방문해서 노조 집행부와 간담회를 가지는 한편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동참촉구 서명 운동’을 벌였다. 노동당이 포함되지 않더라도 자신들이 설정한 시간표, 즉 9월까지 진보 세력을 결집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천호선 대표만 진보세력이 다 뭉치는 것에 회의적인 발언을 했고, 나머지 세 조직의 대표는 기존 주장을 변주하는 발언을 했다. 나경채 대표는 “약속대로 9월 안에 새롭고 더 큰 진보정당이 뭉칠 수 있는 큰 그릇을 만들겠다”고 했으며, 김세균 대표는 “진보결집 운동을 메인 스트림으로 만들고, 큰 흐름 속에서 잡아나간다면 힘있는 대중적 진보정당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양경규 대표도 약간의 주저함이 있기는 했지만 “어떤 흐름으로 가든 진보가 책임 있게 큰 흐름을 형성해야 현재의 구도를 돌파할 수 있기 때문에 당과 당의 문제가 아니라도 많은 세력이 함께 하고, 새롭게 확장하는 형태로 등장하는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목소리를 보면 진보 결집을 위한 움직임이 계속될 것이며, 노동당 내부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따라서 앞으로의 논의는 서로 다른 정치 세력이 자신의 지향점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다.

진보 결집이라는 말도 그렇지만 맥락 없는 말만큼 사람들을 어지럽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강한 어조라도 부여되면 말 그대로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은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맥락 없이 강한 대표적인 말이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라는 말이다. 이 말이 이른바 진보 진영에서 널리 애용된 것은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당’ 이후이다. 주로 노동운동계 일부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다시 합쳐야 하는 주장을 할 때 되풀이된 말이다. 이들의 논법은 진보정당의 분열로 진보정당의 주요지지 기반인 노동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진보 정치가 위기가 빠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부당전제가 있다. 하나는 노동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의 약화는 ‘분당’ 이전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이것이 이른바 민주노조운동이 노동자 전체를 대변하기보다는 주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나타났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다시 말해 민주노총이 시민권을 얻었던 바로 그때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런 흐름에 대해 민주노총은 자기 조합원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대응하는 것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진보신당이 그저 권력 투쟁에 패배한 집단의 독자 세력화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패권주의’와 ‘종북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가 다양한 새로운 가치를 담아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진보신당 창당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보신당은 2008년 ‘촛불 정국’에서 그렇기 커다란 대중의 열기를 담아내지 못했을 것이며, 퀴어 문화 축제의 참가자가 그 복장 그대로 이번 당 대회 대의원으로 참가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적인 차원에서 한국의 주류 진보는 제출하는 의제나 보이는 행태 모두 기성의 정치 세력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으며, 여기에 선거 제도까지 맞물려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이른바 진보대연합 구상이 제출되어 통합진보당이 만들어졌고, ‘야권 연대’ 전술을 통해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성공에 뒤이은 통합진보당 ‘사태’와 정의당 창당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그 약간의 성공보다 더 화려한 불꽃놀이였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이 불꽃놀이를 마치 새로운 무대가 마련되는 신호탄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다. 진보가 무조건 합쳐야 한다는 정신적 패권주의자들, 통합진보당 창당 과정에 끼어들 수 없었던 과거의 인물들, 진보신당을 버리고 가는 것이 꺼림칙했던 사람들 등등이 그들이다. 이 신호탄이 당장 밝게 빛난 것은 아니었지만, 통합진보당의 해산과 새정치민주연합의 내홍은 또 다른 신호탄이 되었다. 그것도 기존 진보의 통합을 통한 ‘제1야당 교체’라는 과대망상을 연출할 수 있는 신호탄 말이다.
이런 과대망상은 진보신당과 사회당을 전신으로 하는 노동당에 대한 과소평가를 수반했다. 당원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고, 대중적 영향력은 전혀 없으며, 돈도 없고, 가장 중요하게는 전망도 없다, 등등. 하지만 이들이 가장 과소평가한 것은 노동당을 의미 있는 정치 세력을 지키고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그 결과가 지난 노동당 당 대회의 결정이다.

이쯤해서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앞서 말한 군자차량기지 모임에서 했다는 양경규 대표의 말을 듣고서였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 자리에서 그는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 사회당이 있었지만 우리가 사회당을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은 민주노동당이라는 큰 흐름에서 진보정치가 정리해 왔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거기에는 양쪽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민주노동당이 ‘큰 흐름’이었다는 것만 이야기하지, 왜 큰 흐름일 수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과 ‘민족해방파’로 불리는 흐름이 민주노동당으로 합류하거나 그 기반이 되었고, ‘비판적 지지’의 새로운 판본인 ‘야권 연대’가 한몫하면서 민주노동당이 성공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 (물론 야권 연대는 반대편에서 보면 정권 교체를 위한 ‘개혁 세력’의 선택이었다.)
당시 사회당은 다른 입장에서 ‘노동자, 민중의 독자 정치세력화’를 도모했을 뿐이다. 물론 그 구성원들이 보인 경험과 능력의 부족은 언제나 뼈저린 반성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적절한 때에 시대에 맞는 정치세력화를 하겠다는 태도까지 비난받을 일은 전혀 아니다. 물론 우리 시대가 자본주의의 황금기 혹은 제3인터내셔널의 시기라면 사회당은 ‘기억하지 못하는’ 세력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신자유주의의 위기 시대이고 생태적 위기의 시대이다. 이런 시절에 노동 중심성이니 완전 고용이니 하는 이야기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은 변화하는 현실에 눈을 감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이다. 이에 반해 지금 노동당을 구성하는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변화를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과거와 결별하고자 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노동당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사실상 내년 총선에서 어떻게 해서든 한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사람들과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새로운 정치는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공간을 필요로 하지 낡은 세력이 낡은 공간에서 만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물론 낡은 세력도 새로운 공간을 보기는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 공간을 확장하기보다는 자기 경계 안으로 넣어보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일만 할 뿐이다. 그렇기 오늘날 “진보는 분열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무능과 아집으로 망한 것이다. 아마 보수나 우파도 그럴 것이다. 이 무능을 넘어서는 곳에서 새로운 정치가 시작될 것이고, 이미 시작되고 있다.

* 이 글에 인용된 4자 대표들의 말은 7월 2일자 『참세상』기사에서 따온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잘못 인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글 전체의 논지를 해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안효상
월간『좌파』 편집위원

107, 2015

2015 노동당 당대회(後) : (2) 정치가 사라진 장소에서 정치하는 당으로

정진우

2015년 노동당 정기당대회(이하, 당대회)가 무사히 끝났다. 체온을 측정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메르스(중동호흡기질환) 증상이 의심되어 입장하지 못한 대의원은 다행히 한명도 없다. 우리의 건강과 안녕을 지키기 위해 지혜와 협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시기다.

무사히 치러낸 당대회, 그것의 결과는 안녕한가?

격렬한 토론과는 대조적으로 표결과 결과 발표는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의장단이 선출되어 직권으로 상정한 특별결의를 포함해 많은 안건이 다루어졌지만, 역시 안팎으로 메인 안건은 <당원총투표 부의의 건>(4자 대표 공동선언)이다. 당 대변인실의 공식 브리핑 제목은 “노동당, 진보결집 위한 당원 총투표 부의안 부결”이고, 기사를 낸 언론사 두 곳은 “노동당 당대회, 진보결집 반대”(레디앙)와 “노동당, 정의당-국민모임과 통합 추진 중단 결정”을 제목으로 뽑았다.

“서로의 진심과 진보정당의 꿈, 걸어야 할 길, 시행할 시기의 차이 등이 드러난 호소의 시간”(참세상)은 끝났지만, 서로를 향했던 간절한 호소가 이제 다시 어디를 향할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말과 글은 여전히 쏟아지지만, 당대회 후 가장 주목받는 입장은 아무래도 당대표의 것이다. 모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를 제외한다면, 첫 공식 발언이 게시되었다.

당대표로서 4자연대에 기초한 진보결집을 정치방침으로 세웠으나, 2011년 9.4 당대회, 2012년 2.19 당대회 결과가 조직에 남긴 상흔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나경채 대표, 6기 26차 대표단회의 모두발언 중)

<2011년 9.4 당대회>는 많은 이들이 개최 일시조차 기억할 정도인데, 진보신당이 통합진보당으로 합당하지 않는 것을 최종 결정한 날이다. 곧바로 당시 조승수 대표는 사퇴하고, 상당수의 당원들이 탈당하여 통합진보당에 합류한다. <2012년 2.19 당대회>는 당 홈페이지(노동당 역사)를 찾아보는 수고가 필요한데, “진보신당은 당대회를 통해 재석대의원 204명 중 189명의 찬성으로 사회당과의 합당을 승인합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3년여가 지나 또 하나의 당대회 결정으로 진보결집 추진(4자의 9월창당)이 거부된 당대표는 이렇게 두 가지 사건을 ‘상흔’의 계기로 꼽는다. 통합진보당에 합류하지 않은 것, 그리고 사회당과의 합당을 정한 조직의 결정, 그리고 그 과정에 대해.

우리가 실패한 것은 무엇인가?

‘상흔’(傷痕)은 상처를 입은 자리에 남은 흔적이다. 흔적으로 남은 것, 아니 채 아물지도 못한 상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조차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9.4> 또는 <2.19>이 아니라, <6.23>(노동당 선언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강령을 통과시킨 정기당대회, 2013.6.23.) 또는 <7.21>(당헌과 노동당이라는 새로운 당명을 결정한 임시당대회, 2013.7.1.)을 기억하는 것, 또 다른 어떤 사건들은 당시의 장면 하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대화를 단절시키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E. H. 카>라는 구절이 널리 알려졌지만, 중요한 것은 이렇게 덧붙여지는 조언이다. 오히려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는 것. 미래에 대한 전망과 변화에 대한 신념이 현재와 과거의 사실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의 성격을 결정한다는 것.

또 한 차례 당대회의 전과 후. ‘호소의 시간’이 끝나고 다시 ‘대화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 그 결정의 결과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호소의 시간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우리에게 상흔이 남아있는 이유를 우리가 만든 결정의 문제로 되돌리는 것은 또 다른 패배를 예고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못한 것은 호소가 아니다. 실패한 것은 결과 발표가 아니다. 각기 다른 호소의 의미, 갈등의 본질, 전과 후를 넘어서 새롭게 다가서는 ‘목적들’을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은 과거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은 역사적인 대화이다.

미래의 목적들과 과거의 사건들 사이의 대화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전과 후를 넘어 역사적인 대화를 만들어낼 열쇠는 어디에 있는가? 누군가는 그것을 결정에 대한 승복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상흔’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애절한 소망일뿐이다. 미래의 목적들이 현재의 간절한 호소를 다시 담아낼 때, 그것은 실제로 (서서히) 등장할 것이며 과거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주어(주체)들을 마침내 변화시킬 것이다.

그간 공적으로 제대로 언급된 바 없는 <2.19>가 갑작스레 ‘사건’의 기억으로 회자될 듯 하다. 고백하자면, 그날은 개인적으로도 특별한 상황의 날이다. 석 달 만에 보석으로 출소한 기념으로 송경동 시인과 함께 무대에 올랐는데, 한참을 울먹이느라 제대로 인사말을 잇지 못했다. 참지 못했던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손수 만든 노래와 율동을 연습하며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공연을 준비하는 우리 청년 당원들의 모습. 눈물은 이미 시작되었다. 당의 결정은 당과 당의 통합이었지만, 나를 통합시킨 것은 사람과 사람이었다. 거리에서 크레인으로, 승리의 기쁨조차 질식시키던 쇠창살 문을 열고 다시 돌아와 만난 사람들. 갇힌 곳에서 끄적거려 내보낸 편지(“함께 당을 한다는 것”)는 시가 되고, 눈물이 되고, 마침내 ‘미래의 목적들’이 되어 서서히 다가왔다.

“함께 당을 한다는 것은 특수하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특수하게 확장하는 것이다… 함께 당을 한다는 것은 좋은 사람을 발견하고 먼저 찾아가 지켜주는 것이다… 함께 당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에 대해 때론 화를 내고 바로 잡는 것이다… 함께 당을 한다는 것은 용기와 힘을 주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함께 당을 한다는 것은 궃은 일 일수록 먼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함께 당을 한다는 것은 배제된 자들과 사랑하고 진심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함께 당을 한다는 것> 중에서)

함께 당을 한다는 것은 결국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

전편(『4자대표 공동선언에서 창당으로 – 수정되지 않는 기획』)에서 <자크 랑시에르>가 “정치라는 것이 결국은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라고 정의”한 것을 언급하자, 노동당 당원인 ‘원시’ 님은 이렇게 지적한다.(그는 고맙게도 손수 만든 도서를 해외에서 감옥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그런데 랑시에르의 난제는, 그 배제된 자들끼리 싸우고 갈등한다는 점을 해명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차이와 동일성, 분화에 대한 정치적 분석이나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크 랑시에르>가 저술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길)에 대한 소개를 인용해 환기해본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란 “지배적 질서 속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존재들 스스로의 드러냄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전태일과 그의 동료 노동자들의 행위는 사업주가 보기에, 또 치안 논리가 보기에는 주제넘은 짓일지 모르지만,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신분이나 자격, 자기 처지의 한계를 넘어 말과 행동을 통해 그것을 지나침으로써 ‘정치’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랑시에르에게 본래의 ‘정치’란 바로 이것이다. 즉 권력의 행사에서 정당한 상대자로 올곧게 자리서는 것이야말로 그것이다.”

문제는 지적한대로 스스로 드러냄의 과정을 만드는 주체, 즉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의 주어에 대한 것이다.(주체의 분화와 재형성을 포함하여) 우리를 보이게 하지 않는 ‘저들’, 우리를 대신해 말하겠다는 ‘그들’이 아닌, ‘우리’ 자신의 정치가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이다. 줄곧 강조해 왔던 표현으로 말한다면, 정치가 사라진 장소에서 우리의 (새로운) 정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저들’과 ‘그들’이 권력을 분점하는 영역, 이른바 ‘치안’의 질서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시작되는 조건이다. 분화되고 단절되는 곳, 현 체제가 유지되고 작동되는 시스템의 내부와 경계에서. 지금 우리가 버티며 교전하는 곳에서 또 다른 우리는 주어가 되고, 발견되고, 교통하며, 연결될 것이다.

당대회 후, 정치하는 당을 만드는 기획과 전략으로

 

노동과 정치개혁을 중심으로 의제 전략을 밀고 나간다는 결정(노동당 2016년 총선 기본방침)은 정치활동의 연속이자 분기점으로 ‘선거’를 계획하고, 당의 정치활동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선언이 되어야 한다. 최저임금 국민투표 운동, 특히 <맘편히장사하고픈모임>(맘상모), <알바노조>와 함께 만드는 최저임금1만원 운동이 주목 받을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은 만남과 실천이 ‘정치’의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획과 전략, 만남과 실천이 없이 어떠한 정치도 시작될 수 없다. (당대회에서 노동당 만세를 외친 대의원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가 “나의 고통, 나의 분노, 우리의 고통, 우리의 분노가 있기 때문에 투쟁하고 싸우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노동자를 위한 국가, 국민을 위한 정치는 없다.

당대회 후. 과거와 직면할 미래의 목적들은 다가오는가? 우리는 ‘정치하는 당’을 함께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는 의 속편인가? 와 , 또 무언가의 역사를 상흔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새로운 출발선이 될 것인가?

당을 한다는 것에 대해 묻고 답할 시간이다. 정치하는 당을 만드는 기획과 전략으로.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또 다른 우리와의 만남이 우리 자신을 바꾸고 있다는 믿음으로. 우리의 정치에 대한 신념으로. 저들과 맞서 싸우며 세상을 바꾸는 당당함으로.

글쓴이 정진우는 현재 다음의 몇 가지 일을 맡고 있다.
최저임금1만원 모든 노동자권리보장 노동당 운동본부장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
민주노총해고자복직투쟁특별위원회 정책위원

628노동당당대회

[사진설명] 노동당 2015정기당대회_6.28강서구민회관

2906, 2015

[제23호(15년03월호)] |책 머리에| 정치의 재편이 아니라, 정치 자체의 재구성을 위하여

■ 책 머리에

정치의 재편이 아니라, 정치 자체의 재구성을 위하여

실제 날씨는 그렇지 않지만 우리의 시간 리듬은 봄을 느끼고 싶어 하는 때다. 이런 바람에 맞춘 듯 멀리 지중해에서 변화의 시간을 알리는 소식이 들려온다. 물론 봉기를 통해서이건 선거를 거쳐서이건 한 나라에서 ‘좌파’의 집권이 마주하게 되는 곤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오늘날처럼 지구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리스의 시리자 정부와 유로그룹 사이의 협상 과정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으며, 4개월의 ‘가교’를 거쳐 바람이 어디로 불어갈지는 사실 누구도 예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전망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시리자의 이른바 우경화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우리의 심장은 왼쪽에서 뛰고 있으며’ 그 역동성이 대안을 제시하는 새로운 정치세력과 만날 때, 아니 그 방향으로 흐를 때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리자가 패배한다 하더라도 남을 수밖에 없는 유산이며, 만약 시리자가 패배한다면 이 힘을 제대로 흐르게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아직 봄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최소한 언땅이 갈 라지는 소리는 들리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새누리당에서도 나오고 있는 ‘복지를 위한 증세’라는 움직임이 내는 소리다. 물론 집권 2년 동안 그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한 현 정부가 ‘비정규직의 확대 등 노동의 유연화’를 통해 가시적인 경제적 성과를 내려는 움직임도 적지 않은 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소리들의 마주침이 내는 (불)협화음이 오른쪽의 추세를 좌우할 것이다.

반대파의 선두에 선 새정치민주연합의 경우 새로운 당 대표 선출을 계기로 정부와 좀 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고, ‘을지로위원회’ 등을 통해 대중의 삶의 불만을 자기 기반으로 가져가려는 노력을 계속 하겠지만 보수적인 잡동사니 정당으로서의 구조나 태도 자체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이는 대중의 불만을 달래려는 호민관의 태도는 보이지만 이를 보편적인 대안으로 바꾸어내려는 유기적인 노력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87년체제의 미완성과 전이 속에서 53년체제가 융기하여 만들어 낸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지형도 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수세에 몰려 있는 진보/좌파 세력은 사회적, 정치적 균열이라는 계기 속에 다시 한 번 지나간 영광을 누리기 위해 분주하다. 하지만 이들도 자본주의의 현 국면에 대한 이해라는 면에서도, 생태적 위기에 대해 느끼는 강렬도라는 면에서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 하기보다는 (좀 더 커진)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생태좌파’라는 이념적, 조직적 혁신의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증세와 복지’라는, 한국에서는 현안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시대착오적인 프레임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치가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한 슬로건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증세는 당연한 일이며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마련한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안전판으로서의 복지인가 아니면 전환을 위한 토대로서의 복지인가, 낡은 정치의 토대로서의 복지인가 아니면 새로운 주체 구성의 에너지로서의 복지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아니 대부분의 사람이 그리스의 시리자나 스페인의 포데모스에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그 탈출 방식은 대중의 삶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이것이 몇 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불안’의 근원이지만, 이것이 왜 정치적 변동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또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의문이다. 시리자와 포데모스를 보면 결국 대답은 불안을 대안으로 바꾸어내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안은 이념적, 조직적 혁신에서 나온다. 우리는 이것을 정치 자체의 재구성이라 부른다. 그때에야 비로소 ‘인민들의 봄’이 찾아올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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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23호(2015년 03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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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6, 2015

[제22호(15년02월호)] |책 머리에| 전환을 위한 결집을 향해 / 금민, 안효상

■ 책 머리에

전환을 위한 결집을 향해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사태의 방향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지만 민심이 드러나는 일종의 징후인 것은 분명하다. 또한 혁명은 포고령이 아니지만 선거는 프로그램이다. 최근 한국 진보 진영의 정치계급의 분주한 움직임은 분명 이 두 요소의 교차점에 놓여 있다. 이 교차점 위에서, 들끓는 민심만큼이나 자기반성의 연도煉禱 소리는 높아지고 있으며, 자기책임의 기투企投도 그만큼 무거워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연도가 땅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기투가 미래를 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때만 되면 등장하는 ‘진보 언론’과 ‘평론가’가 옆에서 연도가 작다고 호통치고 있는 모습도 언제나처럼 그대로다. 그래서 어떻게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겠느냐고.

그렇다. 새로운 전망이 없이는 정권 교체가 없을 것이고, 설사 정권 교체의 대의를 위해 작은 목소리를 죽이고 결집하여 어찌어찌 바뀐다 하더라도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건 소극笑劇으로 반복되는 비극悲劇이 아니라 마비로 끝나는 경련일 것이다. 그나마 소극은 가벼운 웃음을 주고 경련 또한 가벼운 자극을 주는 데 그치지만, 지금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십자군전쟁을 선동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연설처럼 악마적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신이 그대들에게 내린 토지이다.” 그 십자군전쟁의 결말이 어떠했는지를 덧붙이는 것은 사족일 것이다.

우리는 결집이라는 폭력이 아니라 혁신이라는 숙의를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끊임없는 악선동이거나 은밀한 무시였으니, 학식을 국왕을 위해 쓰라고 토머스 모어가 조언하자 『유토피아』의 화자인 라파엘 휘틀로다이우스Raphael Hythlodaeus가 냉소적으로 반응한 것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옛것보다 더 나은 것을 제안하면 지나간 시대에 대한 존경을 핑계로 삼으면서 필사적으로 과거에 매달립니다.”

그럼에도 라파엘 휘틀로다이우스는 ‘치유하기’ 위해 유토피아라는 ‘허튼소리’를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만약 우리가 그의 이름처럼 치유하기 위해 허튼소리를 퍼뜨리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그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빠진 시대에 대안을 제출해야 하며, 이를 위한 숙고는 과거에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노동체제와 생태적 약탈 체제를 바꾸기 위한 가장 합당한 방식을 찾아내는 것에 근거해야 한다. 또한 이런 목소리가 지상으로 내려가기 위한 제도적 틀을 마련하기 위해 선거법 개정을 비롯한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결집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돌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무기를 벼리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먼곳에서 온 소식은 무시할 일이 아니다.

 

2015년 1월에 일어난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시리자의 집권일 것이다. 시리자가 긴축정책에 찬성하는 중도좌파정당인 신민당이나 포타미와의 연정 대신에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중도우파 정당인 독립당과 연정을 구성함으로써 그리스에는 반反긴축 좌우합작 정권이 등장했다. 이로써 근린 궁핍화와 긴축정책으로 남유럽 시장의 수요를 축소하여 결국에는 독일마저 불황에 빠뜨린 메르켈 정부와 트로이카의 긴축정책은 시험대에 올랐다. 사실 지난 총선에서 시리자의 집권이 유예됨으로써 그리스는 그동안 얻은 것은 거의 없고 많은 것을 잃기만 했다. 그 기간 동안 재정 적자는 아테네 공항과 항만, 프라하로 이어지는 철도마저 중국에 매각해야 할 정도로 악화되었고, 공공부문의 대대적인 사유화가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 적자는 디폴트를 면할 정도이지 크게 호전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리자가 취할 전환 정치의 핵심은 반긴축 정책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시리자와 독립당의 좌우연정은 반긴축 정치연합이 상당 기간 동안 그리스 정치의 핵심 문제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트로이카의 긴축정책은 그리스에서 국가 그 자체를 쇠퇴시킴으로써 좌파 정치가 선택할 수 있는 개혁 정책의 폭을 좁혔다. 결과적으로 반긴축과 올리가르히(재벌) 문제가 총선의 핵심 아젠다가 되었고, 이는 앞으로도 그리스 정치의 중심이 될 것이다.

시리자가 추진하는 전환 정치가 불가피한 선택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면, 현재 여론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스페인의 시리자, 포데모스Podemos에게는 좀 더 많은 선택 가능성이 있다. 경제위기, 실업, 궁핍화 등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스페인의 포데모스에게는 4년 전 시리자가 그러했듯이 경제와 사회의 체계적 전환에 관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미래에 대한 설득을 통해 사회구성원의 동의를 획득해 갈 여지가 남아 있다. 그렇기에 시리자의 집권보다 포데모스의 집권 가능성이 유럽에서의 사회적 전환의 예고편처럼 여겨지는 것이고, 만약 실제로 포데모스가 집권한다면 그것은 전환기의 개막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포데모스는 기성 정당의 밖에서 새로 구성된 정치조직이다. 포데모스는 마드리드광장에 모여들었던 ‘분노한 사람들’처럼 신자유주의에 항의하는 광범위한 대중의 자기 조직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조직이 좌파 포퓰리즘을 넘어서지 못하고 저항정치의 표현체 구실 이상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포데모스는 분명히 그러한 단계를 넘어섰다. 포데모스의 경제 강령에는 반긴축 정책 뿐만 아니라 보편적 기본소득, 누진적 소득세, 금융 과세, 사영화된 공공서비스의 재사회화 정책 등 사회적 전환의 구체적인 수단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포데모스는 시리자보다 좀 더 분명한 청사진을 통해 사회적 전환의 목표 지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4년 전 시리자 경제 강령은 그리스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한 임박한 긴급조치를 설명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었다. 물론 이렇게 사정이 다른 것은 포데모스가 시리자보다 덜 ‘불가피한 선택’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차이는 포데모스의 상승하는 지지도를 단지 긴축정책에 대한 저항의 표현일 뿐만이 아니라 대안적 사회에 대한 희망의 표현으로 간주할 수도 있도록 만든다.

한국 신자유주의의 위기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대통령 지지도도 20%대로 떨어졌다. 청와대 비서실 때문이라고들 말하지만 진짜원인은 서민 증세와 재벌 감세, 임박한 정규직 목조르기에 대한 불안감일 것이며, 무엇보다도 나날이 어려워지는 삶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보정치가 새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위기가 진보정치의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무조건 모여야만 위기에 잘 대응할 수 있다는 말도 틀린 말이다. 결집은 물론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청사진으로 어떤 방식의 결집을 이룰 것인가다. 과거 민주노동당은 복지확대론으로 일정한 지지도를 획득했다. 그와 같은 방식의 복지진보는 사실상 민주노동당 시대의 폐막과 함께 막을 내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제 필요한 일은 좌파적 전환정치를 전개하는 일이고, 이를 위해서는 스페인의 포데모스처럼 과거의 진보와 구별되는 분명한 전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리스의 시리자처럼 불가피하게 주어진 과제에 대해 주저 없이 명확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와 같은 요소를 준비하지 못한 채 결집만 외치는 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칫하면 그것은 통합진보당으로 이미 더 이상 추락할 데가 없을 만큼 추락한 진보에 대한 대중적 신뢰를 또다시 망가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노동당 대표 결선투표가 진행 중이다. 진짜로 허튼소리를 퍼뜨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결과를 누가 장담하겠는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노동당이 새로운 좌파, 이를 위한 혁신의 숙고가 이루어지는 거의 유일한 장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이 자리를 통해 혁신을 위해, 그리고 그런 결집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도 그리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해서
금민,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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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22호(2015년 02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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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6, 2015

[제21호(15년01월호)] |신년 논설| 회생의 골든타임 또는 전환의 네체시타 / 금민 편집위원장

■ 신년 논설

 회생의 골든타임 또는 전환의 네체시타

/ 금민 편집위원장

골든타임golden time의 원래 뜻은 황금시간대다. 방송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대를 뜻한다. 골든타임은 치료가 효과를 볼 수 있는 한계시간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재난이나 사고에 대하여 이 말을 쓸 때도 같은 맥락이다. 아직 인명을 구조할 수 있는 초반의 금쪽같은 시간대를 뜻한다. 이러한 뜻이라면 왠지 불안해지는 것은 세월호 참사 때문일 것이다. 세월호 이후 골든타임이란 ‘결코 허비되어서는 안 되지만 허비되는 시간’이라는 뜻으로 의미가 변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난해 4월 온 국민을 트라우마에 빠뜨렸던 이 말이 연말연시의 언론매체에 일제히 다시 등장했다. 2015년은 “전국단위 선거가 없는 유일한 해”로서 “경제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추진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는 12월 22일 자 대통령 발언과 정부의 <2015년 경제정책방향> 때문이다.

경제정책방향의 4대 과제인 구조개혁, 경제활력 제고, 위험요인 제거, 통일시대 대비 중에서 구조개혁이 최우선 과제로 배치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눈에 뜨인다. 7월 최경환 부총리 취임 이후 재정을 풀고 금리는 내리고 부동산 규제를 푸는 등 단기적 경기부양책을 폈지만 경제는 회복되지 않았다. 재정은 악화되고 가계부채만 증가했을 뿐이다. 경제의 구조적인 한계가 명백한 상황에서 결국 정부도 단기부양책은 효과가 없다고 인식한 것 같다. 한국 경제가 침몰하고 있으며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정부도 이제는 인정하게 된 것이다.

구조개혁의 핵심 분야는 노동, 금융, 교육, 공공 등 4개 분야고, 대통령과 부총리는 이 중에서 노동시장 개혁을 “구조개혁의 최우선”이라고 밝힌다. 정부는 특히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질 좋은 일자리 창출을 막을 뿐만 아니라 경제의 탄력을 떨어뜨리고 사회통합을 저해한다”라고 밝히고 있으며, 대통령은 “노동시장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로 이 벽을 넘지 못한다면 지속가능한 성장도 어렵다”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라면 맞는 말이겠지만, 최경환 부총리의 그간 발언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규직의 해고 유연성을 높이고 비정규직을 더 확대하겠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날인 12월 23일, 좀처럼 진척을 보이지 않던 노동시장 구조개혁 논의는 급물살을 타서 민주노총은 불참한 채 한국노총만 참여하고 있는 노사정은 기본합의안을 확정한다.

비록 합의문은 구체적 각론을 담고 있지 않지만 큰 틀에서 노동시장 구조개선의 방향성을 언급하며 5대 의제 및 14개 세부과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한다. 5대 의제는 △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 △ 임금⋅근로시간⋅정년 등 현안 문제, △ 노사정 파트너십 구축, △ 사회 안전망 정비, △기타 구조개선 관련 사항이고, 14개 세부과제는 △ 원하청,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등 동반성장 방안, △ 비정규 고용 규제 및 차별 시정 제도 개선, △ 노동이동성, 고용⋅임금⋅근무방식 등 노동시장의 활성화, △ 통상임금 제도 개선 방안, △ 실근로시간 단축 연착륙을 위한 법제도 정비, △ 정년연장 연착륙을 위한 임금제도 등 개선 방안, △ 노동기본권 사각지대 해소 및 비조직부문 대표성 강화, △ 중앙⋅지역⋅업종별 사회적 대화 활성화, △ 합리적 노사 관계 발전 및 노사의 사회적 책무성 강화, △ 사회보장제도 사각지대 해소 및 효율성 제고, △ 취약 근로자 소득 향상, △ 직업능력개발 및 고용서비스 선진화 등 선제적 보호 장치 강화, △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관련 법제도 현대화 및 정책연계 강화, △ 생산성 향상과 일터 혁신 등이다. 노사정위는 5대 의제 중에서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 ‘임금⋅근로시간⋅정년 등 현안 문제’, ‘사회안전망 정비’를 내년 3월까지 논의를 마무리할 우선 과제로 선정했다. 노사정 합의를 살펴보면, 그동안 정부가 주장해 온 해고요건 완화나 직무성과급제 확산 등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대신에 “노동이동성”이나 “노동시장 활성화” 등 우회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 문제는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노동이동성’이 과연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일 것이다. 말 그대로 보자면 유연성은 해고유연성을 연상시키고 이동성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구분하는 담장이 허술해져 상호 이동할 수 있도록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사태의 본질은 바로 원활해진 이동의 방향이 무엇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비정규직과 정규직, 원청업체와 하청업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세 차원에 걸쳐 있고, 그 결과는 고용형태 차이에 기인한 임금격차 및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간의 임금격차로 나타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저임금 노동을 대다수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한편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의 저임금을 볼모로 삼아 대기업 정규직을 고립시키고 이들의 임금도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생겨나기 시작한 1998년 이후로 노동소득분배율은 경향적으로 떨어져 왔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기능은 노동소득분배율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노동소득분배율 올리기 위해서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해소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정부와 노사정이 추진하고 있는 ‘노동이동성’ 강화는 노동소득분배율을 올리는 방향에서의 개혁이 아니다. 노사정 합의문은 비정규직 현안 문제의 해결이나 비정규직 규모의 축소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정규직으로부터 비정규직으로의 이동을 촉진하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되는 길을 열어주는 대신에 정규직의 해고를 유연하게 하겠다는 일종의 교환 아닌 교환은 사실상 모두 다 비정규직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파견제 기간제 사용제한 완화’를 통해 파견 확대,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을 염두에 두고 있고 대기업의 해고요건을 완화하겠다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바야흐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분할에 근거하던 외연적 유연화 체제의 시효가 만료되고 정규직 내부의 유연화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박근혜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혁은 한국 신자유주의의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 노동체제에서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에 비하여 임금 부분에서만큼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대기업 정규직노동자들을 주요한 공격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체적인 노동소득분배율을 또 다시 대폭 떨어뜨릴 것이며 노동자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어려운 처지로 내몰리는 결과로 귀착될 것이다. 이는 2008년 이후로 좀체 회복되고 있지 않은 세계경제처럼 한국 자본도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지만 해외시장의 수요가 줄어든 상황에서 내수는 정작 자본에게도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서도 노동소득분배율을 올리는 방향으로의 노동시장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정부가 생각하는 구조개혁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 노동체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의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혁은 성공한다고 해도 내수 측면에서조차 임시처방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소득분배율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리면서 기업 이윤을 보장해 주는 방식은 내수와는 무관한 전형적인 출혈 수출경제의 낡은 방식이고 세계경제가 앞으로 호전될 것이라는 전망 하에서만 가능한 전략인데, 상황과 전망은 정반대다. 가계부채 상황을 보면, 내수는 신용 팽창으로 유지한다는 가정도 더이상 먹히지 않는다. 정부도 인정하다시피 가계부채는 확대할 수 없을 수준에 이미 도달했고, 이 문제를 해소할 수 없는 정부는 폭탄을 관리하는 수준의 소위 ‘연착륙’을 도모하고 있다.

이처럼 거의 모든 것이 막바지에 달했고 막바지의 처방이 이루어지고 있다. 노동시장 구조개혁은 대기업 정규직과 한판 겨루겠다는 것이고, 이 싸움의 여파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싸움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 시대인식을 고양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그간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 노동체제에 대해서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보고도 못본 체해 온 대기업 정규직의 사회의식을 깨우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 위기에서 한국 자본은 골든타임을 정규직의 불안정성을 강화하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으로 사용하려 하고 있고,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제 불가피한 선택에 몰렸다. 그들은 과연 노동시장 구조개혁과 같은 ‘운명의 힘fortuna’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대신에 의지virtu를 가지고 신자유주의 불안정노동체제 종식이라는 불가피성necessita이 요구하는 과업을 수행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올 한해를 가르는 가장 큰 질문이 될 것이다. 만약 정규직노동자들이 단지 자신들의 좀 더 괜찮았던 조건과 처우를 지키기 위해서만 싸우고 좁은 이해관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운동은 원청과 하청, 대기업과 중소기업, 연령의 차이 등을 뛰어넘은 광범위한 노동자 연대에 실패할 것이다. 그런 상태라면 노동자 연대를 넘어서서 더 넓은 사회 연대를 조직하는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태라면 정규직은 사회적으로 더 고립될 것이고 정부의 구조개혁이 이기게 된다. 신자유주의 불안정노동체제의 종식이라는 보편적 과업의 불가피성을 인식할 때에만 노동자 연대와 폭 넓은 사회 연대가 가능할 것이다. 바야흐로 한국 노동자운동의 발전 수준을 총결산하는 가장 큰 시험이 임박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막바지이며 올해가 아니라면 영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새해는 예사롭지 않다. 전운이 감도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신자유주의 시대란 하루하루가 모두 계급투쟁의 나날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대표적 금융 갑부로 꼽히는 워런 버핏의 말처럼 “부자가 늘 이기기만 하는 계급투쟁”이었을 따름이다. 앞으로는 꼭 그렇지만 않을 것 같다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물론 2010년 이후다. 미국과 유럽의 곳곳에서 신자유주의 종식을 요구하는 운동들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5년, 한국의 싸움은 어떤 양상을 보일까? 그것은 전적으로 사회적 전환을 필수적인 과제로 인식하는 정치세력의 수준과 능력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여야 한다. 그것이 출발점이다.

 

덧붙여서

2014년을 마감하면서, 2015년에는 다시 꺼내지 않기 위해 반드시 남겨두어야 할 말이 있다면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에 관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의 강령에 나오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는 목표로 보았고 이석기 그룹의 활동은 통합진보당 활동에 귀속된다고 보아 통합진보당을 해산했다. 통합진보당 해산은 ‘방어적 민주주의’의 일환이라는 독일 헌법재판소의 독일공산당KPD 해산 판결에 비교된다. 그런데 당시 독일 헌법재판소는 근 5년간의 심의 끝에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트독재를 추구하며 이는 민주적 기본질서와 합치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그 정도의 문제로 이해했다.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그 후 볼프강 아벤드로트W. Abendroth, 헬무트 리더H. Ridder 등 헌법학자들로부터 비판받았고, 1996년 독일 헌법재판소장 유타 림바흐Jutta Limbach는 “현재의 법치주의 기준에 따르자면 독일공산당을 해산할 근거가 없다”라고 평가함으로써 이 판결의 근거가 되는 ‘방어적 민주주의’를 새로 정의한다. 림바흐의 입장은 당시의 해산 판결은 현재의 기준으로는 납득 불가능한 과거의 판결이라는 것이다. 시대착오적 정치그룹의 시대착오적 행동이 시대착오적 판결을 낳았다. 이 문제에 관해서 한국의 2014년은 독일의 1956년인데, 2015년은 유타 림바흐 같은 이가 등장하여 1996년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헌법재판소에 지나친 기대를 거는 일이리라. 70%에 달한다는 해산 판결에 대한 찬성 여론도 1996년 독일의 상태로 달라지려면, 이 시대의 불가피한 과제를 정치적 의지로 떠안으며 대중의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새로운 좌파운동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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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21호(2015년 01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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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6, 2015

[제20호(14년12월호)] |책 머리에| 새로운 정치적 동맹을 형성하기 위한……

■ 책 머리에

새로운 정치적 동맹을 형성하기 위한……

 

모두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진 않겠지만, 2008년 가을 이후 칼 폴라니에 대한 관심이 (케인스주의에 대한 재평가와 더불어) 상당히 커진 것은 분명했다. 이른바 자율적인 시장의 폭주가 시작되고, 특히 금융시장자본주의가 비대하게 커지면서, 원래의 약속과 달리 사람들의 삶이 불안하고 피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지탱하지 못하고 폭발하는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런 파괴적인 결과에 맞서 ‘사회를 보호하려는’ 운동이 구성될 수밖에 없고 또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폴라니에 주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폴라니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이 한국의 경박한 지적 풍토 때문이었을까?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여전히 규제 개혁과 시장을 떠드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이야 그렇다 치고,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조절적인 시장을 규제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이를 위해 별다른 방도를 제대로 모색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마치 대처 시절처럼 별다른 ‘대안이 없다TINA’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보호하자는 주장을 말 뜻 그대로의 의미에서 통제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낸시 프레이저의 「삼중 운동?: 폴라니 이후 정치적 위기의 속살을 파헤친다」(『뉴레프트리뷰』, 2014/5)는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는 이런 질문에서 시작한다. “21세기에는 어째서 이중 운동이 없는 것일까? 구조적인 조건으로부터 보자면 분명히 우호적인 상황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로부터 사회와 자연을 보호하고자 하는 반反헤게모니 프로젝트는 어째서 없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대안을 제시하기에 앞서 이 질문에 답하는 몇 가지 가설을 검토한다. “정치적 지도력의 실패”에서 원인을 찾는 첫 번째 가설을 생략하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금융화 속에서 과거에 사회보호의 기둥이었던 조직노동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일국적 틀은 허물어버렸지만 이를 대체할 만한 틀은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지구화 가설’)이다. 하지만 프레이저가 보기에 전자는 “계급관계만을 정치투쟁의 으뜸가는 혹은 유일한 터전으로 보면서 사회적 지위의 여러 관계들을 고찰”하지 못하고 있으며, 후자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 이외에 적절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어 프레이저는 폴라니 식의 이중 운동이라는 틀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현재의 지형을 삼중 운동이라고 부르자고 한다. 이때 고려되는 투쟁은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해서 확산된 여러 해방운동이다. “반인종주의운동, 반제국주의운동, 반전운동, 신좌파, 여성주의 제2세대, 성소수자해방운동, 다문화운동” 등이 그것이며, 이 운동들은 “재분배보다 사회적 인정에 더 초점을 두는 경우가 많았으며, 전후 기간의 복지국가와 발전국가에 제도화되어 있던 여러 형태의 사회보호 장치들에 지극히 비판적일 때가 많았다.” 이런 해방운동들도 총체적인 시장화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시장을 절대악으로 바라보면서 사회보호를 찬양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노동시장의 임금소득은 해방운동의 주요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삼중 운동의 각 항을 차지하는 세 가지 운동은 서로 교차하고 충돌하며, 원리 상 “세 세력들 각각은 다른 둘 중 하나와 동맹을 맺고 나머지 하나와 맞설 수 있다”라고 프레이저는 말한다. 그러니 사태는 복잡하며 사회정의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수용할 것을 요청한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해방의 프로젝트가 “신자유주의와의 위험한 내통 관계를 끊어버리고 사회보호운동과 일정한 원칙에 입각한 새로운 동맹”을 형성하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의 삼중 운동이라는 입론은 신자유주의의 위기 속에서도 왜 대안이 없는지, 혹은 왜 사람들이 대안으로 모이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된다. 물론 우리가 감각적으로 모르고 있던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프레이저 식으로 말하면,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 혹은 넓은 의미의 해방투쟁이라는 단일한 프로젝트를 형성하기 위해 어디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삼중 운동이라는 틀도 현재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생태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혹자는 생태주의운동을 프레이저가 말하는 해방운동에 넣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흐름은 인정을 추구하기보다 자연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을 통해 인간성을 재정립하려는 시도이며, 따라서 또 다른 항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성격은 녹색이 다양한 지향의 수식어로 이용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를 보호하는 투쟁이나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자 하는 투쟁과 갈등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우리가 추구하는 단일한 해방의 프로젝트는 ‘노동 중심성’으로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로도 환경보호로도 혹은 그 어떤 개별 정체성의 인정으로도 환원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것의 정치적 표현도 특정한 정당으로 축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쨌든 동맹의 형태를 띨 것이며, 이 속에 쟁투로서의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말 이름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불안정노동과 민주주의의 위기에 관한 금민의 두 편의 글은 프레이저 식 구분법에 따르면 금융화 가설에 근거한 입론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기본소득 도입 등의 패키지 정책을 대안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겨냥하는 지점은 훨씬 폭넓은 것이며, 다양한 해방운동 및 생태운동과 만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팽창적이다. 이런 접속과 팽창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동맹이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이번 호로 안재성 선생의 ‘식민지 시대 사회운동사’가 끝을 맺는다.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보고 달리는 우리에게 언제나 뒤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글이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아쉽다. 아마 새해부터는 또 다른 형식의 글로 독자를 찾아갈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해서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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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20호(2014년 12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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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6, 2015

[제18호(14년10월호)] |책 머리에| 자기 비하가 아니라 전망을/ 안효상

■ 책 머리에

자기 비하가 아니라 전망을!

나비 효과라는 말을 억지로라도 떠올리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및 국정원의 선거 개입 재판은 “정치 개입은 인정하나 선거 개입은 아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판결로 일단락되었고, 세월호 참사에 대해 최종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며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하겠다고 했던 대통령은 언제나처럼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과정 자체가 훼손되고 책임 정치가 실종되었는데도 커다란 움직임은 없다. 도리어 ‘폭식 시위’라는 철면피하면서도 자기 비하적인 ‘정치’행위만이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이런 현상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은 많은 사람들이 다루었으니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는 점만 확인하고 넘어가자. 다만 한 가지, 새로운 윤리는 관념의 변화로만 생겨나지 않으며 적절한 물질적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도 함께 확인해 두자.

자기 비하적인 정치적 양상은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며 만들어진 새정치민주연합도 마찬가지로 보이고 있다. 권력투쟁을 벌이는 것이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적절한 포지션도 방향도 설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하나의 정치세력이라고 보기 어렵게 한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강력한 구심점 혹은 지도력의 부재 탓이라고 하는데, 죽은 이의 무덤에서 오고가는 말을 들어보면 아주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디아도코이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마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진보정치 혹은 좌파정치를 한다는 입장에서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장기지속 중인 ‘진보 재편’ 논의도 속을 들여다보면 별반 다를 바 없다. 최소한 2010년 하반기부터 시작되어 2012년 중반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태 및 정의당 창당으로 일단락된 당시 ‘진보대연합’ 논의와 실천에 대해 평가는 고사하고 기억조차 하지 않은 채 또 다시 슬며시 고개를 내민 진보 재편 논의를 보면 백치병과 과대망상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언제나 근거는 ‘이대로는 안 된다’ 혹은 ‘우리만으로는 안 된다’다. 가장 노골적인 자기 비하!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지금의 어떤 세력과 함께하거나 하지 않을 것인가가 아니다. 의지의 행위인 정치가 과거 및 현재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미래를 향한 행위라 할 때, 전망의 공유 없는 재편은 반복을 낳을 뿐이고,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소극笑劇으로 끝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전망을 노동시간 단축 및 기본소득의 도입을 통한 ‘노동’사회의 재구성, 생태사회주의로 전환하는 데 필요하거나 교차하는 사회적 전환, 노동조합운동 전략의 재구성 등에서 찾고자 한다. 물론 이런 전망 혹은 프로젝트가 정치적으로 현실에서 성공할지, 그러기 위해 사람과 집단이 어떻게 모여야 하는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정치는 군사작전이나 치안 활동과 같은 완벽한 도상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자. 새로운 인식이 시차視差에서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정치도 시차時差에서 구성된다. 이때 필요한 것은 그 간극에 놓이는 고통과 두려움을 견디는 의지다.

 

이번 호에는 현재 그리고 가까운 미래와 관련하여 우리의 전망의 일단을 내놓는다. 「기획: ‘우리’의 정치를 위하여」에서 정진우와 금민은 각각 낡은 (진보)정치가 터 잡고 있던 계급과 정체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 주체의 구성 문제와 위기 시대를 넘어서는 프로그램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저 세력 재편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기를 원하는 모든 이에게 토론을 제기한다. 물론 우리의 전망은 관념의 조합이나 사고실험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응시와 참여 속에서도 그 근거를 끌어온다.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 통신비정규직, 그리고 그냥 ‘알바’ 등은 우리 프로그램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한편 ‘구체적 보편성’의 추구라는 무거운 책임도 지운다.

새들의 심상치 않은 날갯짓이 폭풍우가 닥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날갯짓이 폭풍우를 몰아올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찻잔 속의 태풍을 일으키는 날갯짓이 아니라 폭풍우를 타고 넘을 수 있는 넓고 튼튼한 날개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해서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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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18호(2014년 10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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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6, 2015

[제17호(14년9월호)] |책 머리에| 꽤나 어려운 패러다임 전환/ 안효상

■ 책 머리에

꽤나 어려운 패러다임 전환

파파 프란치스코의 방문은 뭔가 단단히 막혀 있는 한국 사회가 환기구를 만난 느낌을 주게 했다. 메시지가 아니라 수많은 ‘아픈’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만나고 소탈하게 대화하는 모습 자체로서 그런 역할을 한 것 같다. 언제부턴가 한국 ‘정치 지도자들’의 특징이 된 불통과 대조되어 특히 그런 것으로 보인다. 새삼스럽게 대중민주주의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역설한 막스 베버가 떠오르기도 한다. 어쨌거나 한국 정치가 그 원리로 삼고 있는 대의제민주주의의 기준으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사람들은 살아야 하기에 이를 뚫고 나가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다. 몇 년전 영도의 한진중공업에서 시작된 ‘희망버스’는 밀양을 거쳐 이제 구미의 스타케미칼로 이어졌으며, ‘유민 아빠’의 단식은 40일이 넘었다. 위대한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은 40일의 단식으로 깨달음을 얻었건만 이 땅의 지도자들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 ‘아이스버킷 챌린지’에도 공감과 연대의 느낌이 묻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불거진 군대 내 폭행 사건(과 언제나 그렇듯이 이를 은폐하고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모습)은 다시 한 번 (대한민국)국가 자체를 도마 위에 오르게 했다. 그렇다면 왜 국가가 문제인가? 세월호 사건이든 군대 내 폭력이든 주류 언론을 비롯해 많은 사람은 이런 사건을 정상적인 국가의 작동 불능 상태로 본다. 그나마 개인들의 일탈로 보지 않는 게 다행이긴 하지만, 한 번도 ‘정상적으로’ 작동한 적이 없는 국가를 가지고 정상/비정상을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혹시 정상은 이상理想을 잘못 쓴 말인가?

사회과학에서 쓰는 ‘조작화’의 방법이나 ‘추상화’의 방법을 통해 나온 어떤 모델이나 이념형은 사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는 현실을 인식하기 위한 주요한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사고 방식이 근대화론이나 진보주의와 결합할 경우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결여로만 파악된다. 결여가 더 나아지려는 욕망을 추동하는 힘이라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반대로 결여에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마취 효과도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은 우선 그동안 우리가 말했던 몇 가지 위기를 말한다. 현재 지구 환경은 지금까지의 산업적 생산방식과 소비 양태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생태적 위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그 어떤 말로 포장한다 하더라도 스스로도 지탱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신자유주의의 위기, 끝으로 처음부터 잘못되었건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해서 그러했건 간에 이른바 진보의 담론과 정치는 이런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아니라 위기와 함께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이라는 성찰이 담긴 진보의 위기 등이다.

하지만 더 큰 위기는 주저와 외면이라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위기다. 주저와 외면의 주된 원인으로 흔히 ‘기득권’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어떤 의미에서건 기득권이 있으며, 이는 관계 속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커다란 사회 내에 있는 작은 주변부 집단 내에서도 안팎의 기득권을 둘러싼 논쟁을 벌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저 기득권이라는 말을 원한의 감정을 담아 정치적 공세로 쓰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그다지 유용해 보이지는 않는다. 도리어 습속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습속habit은 서식지habitat나 주거지habitation와 같이 가지다habeo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고 새로운 방향을 잡기 위해서는 각자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서 사는지를 성찰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 붙들고 있을 것인지, 그곳에서 계속 살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다른 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애써 살펴야 한다. 적대감이 아니라 배우려는 자세로.

눈이 맑은 독자라면 당연히 알아차렸겠지만 우리 지면은 1년 넘게 위기에 대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고찰해 왔다. 최근에는 위기를 설파하는 자에 머물지 않고 구성의 방식과 행동의 방향에 대해 구상하는 건축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본소득을 특정 정책이 아니라 이행의 패러다임이자 다수의 의제로 만들려고 하는 기본소득공동행동(준), 2016년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 유치 등의 활동,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전략노조’에 관한 논의 및 민주노총의 혁신을 위한 노력 등이 그것이다. 더 나아가 이른바 생태주의를 더 급진적으로, 더 민주적으로 만들기 위한 공동의 노력에 참여할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습속을 버리고 기존의 거주지를 떠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것이 꽤나 어려운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습속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아니 그러기 위해서 더욱 현실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이번 호부터 “문학이 죽은 시대”에도 여전히 말과 글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쓰는 작가 집단의 르포를 싣는다. 어려운 사정에도 그리 크지 않은 지면에 글을 보내 준 이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장기 투쟁의 상징이자 신자유주의적 노동형태 가운데 가장 극악한 것이라 할 수 있는 특수고용‘노동자’의 투쟁의 거점인 재능지부의 유명자 전 지부장이 글을 보내왔다. 이제는 꽤 알려져 있지만 재능지부는 사측과의 싸움뿐만 아니라 싸움의 방향, 강도, 절차 등을 둘러싸고 ‘내부적으로도’ 그리고 민주노총이라는 상위조직과도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강종숙, 박경선, 유명자 전 조합원의 글이 사태를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하는 근거가 되기를 바란다. 이 지면은 연단이기도 하지만 포럼이기도 하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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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17호(2014년 9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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