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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에서 시대로

시대49호 책머리에 좌파에서 시대로

이 지면의 제호를 “좌파”에서 “시대”로 바꾸는 것이 좌파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 진정으로 인간적인 삶에 대한 좌파의 요구가 어떻게 소멸할 수 있겠는가? 가장 급진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좌파의 근거가 어떻게 무너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좌파”라는 제호를 뒤로 한 것은 이 기호가 그런 가치에, 최소한 한국에서는, 값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가치에 합당한 이름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사회적인 것일 때, 우리의 노력만으로 짧은 시간 내에 그런 소망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름이 아니라 그 실질을 위해 노력하는 게 더 나은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소극적인 의미에서만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좌파”가 위치 혹은 태도를 가리킨다면, “시대”는 상황을 의미한다. 정세적으로 “좌파”는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급진적인 대안을 제출하고 이를 통해 그리고 이를 실현할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자는 요청을 말한다. 하지만 위기 이후 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러저러한 대중의 저항이 있었지만 적절한 대안이 제출되지 못하면서 새로운 정치는 단초를 보여 주었을 뿐이다.

한국의 경우, 좌파의 시도가 미약하게만 나타나면서 단초조차 눈에 띄지 않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올바른 우리의 노선과 대안을 부여잡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꾸준히 무엇을 한다고 원하는 사태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필요한 것은 사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며, 이에 우리의 대안을 맞추어 재조정하는 것이다.

민주적 정부의 출범으로 이어진 2016∼17년 촛불집회를 보면서 우리는 감동과 좌절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수영의 시 「풀」에 대한 통속적인 해석을 비틀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 풀만이 아니라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 풀을 떠올려야 한다. 지난 촛불집회가 그렇게 거대한 물결을 이룬 바탕에는 최소한 2014년 4월의 세월호 참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중의 불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하나의 정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소박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이 체제의 작동 속에서 전혀 그럴 수 없다는 절망을 느낀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만나 분노로 폭발한 것이 촛불집회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보통 사회경제적 불만과 요구라고 말하는 것이 거대한 물결의 심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투표함을 통한 기성의 질서에 대한 약간의 변경으로 제한되고 말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이른바 ‘민주개혁파’가 하나의 실체이자 매우 강력한 힘이라는 것이다. 87년 체제는 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이들은 노무현 정권의 성립과 실패 속에서 적절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정치 개혁, 인권 개선, 분단 체제 관리 등에서 이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일 수 있고, 이것이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와 연동된 두 번째로 여전히 대중은 기성 정치 질서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선적으로 한국의 극우 보수 세력이 민주개혁파를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에 대한 반사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향후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이 세력의 변화에 따라 변동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민주주의 자체가 매우 제한적으로만 이해되는 정치 문화와 관련이 있다. 여기에도 강고한 분단 체제가 작동하고 있겠지만 가깝게는 87년 체제의 형성 과정이 결부되어 있다.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탈구가 계속해서 재생산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를 벗어나는 한 가지 경로는 정치와 경제를 연결시킬 수 있는 정치과정에 대한 개혁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그 어느 때보다 정치 개혁의 열망이 높은 이 시기에 선거법을 포함한 정치 개혁에 우리가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좌파의 무능력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그동안 주로 시대착오성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해 왔다. 시대의 과제와 적절한 주체를 도출하지 못하는 무능력 말이다. 이런 판단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여기에 머무르는 것은 일기예보 담당자의 태도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실적인 능력일 것이다. 현실적인 능력은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겠지만 우선적인 것은 보편적인 감수성에 기초해서 신뢰를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사람들에 따라 ‘보편적인 감수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 있겠으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정치 공동체 구성원의 공통성에 근거하여 개인과 집단들의 요구를 포착하고 정치라는 통로로 흐르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 좌파는 민주주의의 옹호자로 등장해야 하고 민주주의를 삶의 모든 부문으로 확장하는 시도의 선두에 서야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적인 능력이란 목표로 삼은 것을 실제로 달성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면서도 동시대 보통사람들의 감수성과 눈높이에서, 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게 만드는 ‘평범한’ 능력이다. 굳이 전통적인 ‘대중노선’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도리어 집요하게 우리가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위치를 제대로 잡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의 상태로 볼 때 이러한 위치를 잡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정치라는 것이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라 할 때 이 시간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끝으로 현실적인 능력이란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을 끊임없이 조정해 가는 능력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좌파의 미래는 없을 것이고 우리는 시대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시대』 2017년 6월호 통권49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