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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의제를 선도하다, 김종철

안재성 소설가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은 의제를 선도하는 사람이다. 1991년에 격월간지 『녹색평론』의 창간으로 한국에서 생태주의의 문을 열었고, 2012년에는 녹색당을 창당하는 데 적극 나섰다. 이후에 제시한 기본소득은 수년 만에 이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으며, 소농 공동체를 지향하는 운동도 ‘진정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던져 주었다. 최근에 제시한 ‘추첨제 민주주의’라는 독특한 의제도 새로운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새로운 주장을 내세운다는 것은 기존의 논리에 대한 비판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생산력 발전을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보는 발전론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한국의 문화 풍토와 문학 평론에 만연한 지적 허영심에 이르기까지, 그의 날카로운 비평을 피해갈 대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가, 오해도 많다. 당면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주의적 원칙만을 강조하는 원리주의자일 거라는 선입견은 인터뷰에 나선 필자도 긴장시켰다. 발전 반대론자인 만큼 핸드폰 같은 건 안 쓸 거라든지, 원리 원칙만 이야기하며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날카롭게 지적하리라는 예상이었다.

예상은 틀렸다. 2017년 8월 8일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시작된 만남은 술자리까지 거의 6시간이나 계속되었고, 선생이 하는 이야기마다 폭소를 터뜨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보운동권을 포함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냉엄한 비평이 필자와 공감대를 이루는 부분이 많은 데다, 다른 글에서는 볼 수 없던 선생의 성장기도 재미가 있었다.

문학, 정치, 환경, 경제 등 다방면에 걸친 선생의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지면이 허락하지도 않거니와 직접 본인의 글을 읽어 보는 게 가장 정확하리라. 『녹색평론』과 여타 지면에 실리는 글들과 『시와 역사적 상상력』, 『간디의 물레』,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등의 저서들은 주제가 명쾌하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으로 이뤄져 퍽 읽기 쉽다. 요즘 지겹도록 보게 되는 번역체 문장들의 비비 꼬인 난해함이며 외래어도 아닌 외국어의 나열이 없어서 좋다. 대학을 나온 이들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문장을 쓰는 이들은 김종철 선생에게 되게 맞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시하는 의제들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특정 정책의 변화나 특정 법률의 개폐를 주장하는 소승적인 범주를 뛰어넘어, 이 사회, 나아가 인간 사회 전체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본원적인 지향을 갖고 있기에 꼭 읽어 볼 만하다.

 

1. 전쟁의 기억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이라고 하면 대구 사람일 거라는 추측도 여러 오해 중 하나다. 영남대에서 오래 교편을 잡은 결과 생긴 오해다. 지금도 영남대 교수라고 알고 있는 이들도 많지만 그만두고 서울로 옮긴 지가 13년이나 되었다.

고향은 경남 진동이다. 진동은 오늘날에는 행정구역상 창원시에 포함되어 있는, 마산에서 서쪽으로 길고 험한 진동고개를 넘어가면 나오는 아늑한 어촌 겸 농촌 마을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이 지역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머니는 딸 없이 아들만 다섯을 낳아 키웠는데, 그는 막내였다. 해방되고 이태 뒤 1947년 1월에 태어났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까지는 진주에서 살았다. 둘째 아들이던 아버지가 일제 치하에서 상업학교를 나와 금융조합에서 서기로 일하다가 진주의 한 운수회사에 회계과장으로 옮기면서 이사를 갔던 것이다.

국내에 대학이 거의 없던 식민지 시대의 상업학교나 농업학교는 아주 가난하지는 않되 일본으로 유학 갈 경제력은 안 되는 청년들이 택하던 기술학교였다. 금융조합 서기 중에는 친일파라 불릴 정도로 협조적인 사람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일상 업무에 충실한 그저 고지식한 소시민이었다. 진급이나 출세에 관심이 없을 뿐더러 자식들을 큰 인물로 만들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진주의 생활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어린애의 시선으로 본 규모지만 마당이 무척 넓은 집으로 꽤 큰 텃밭에 토마토가 주렁주렁했던 것을 그는 기억한다. 집의 한편에 있던 광에 들어가면 늘 떡이나 곶감같은 게 있었다. 전기도 들어왔고 개인집으로는 꽤 넓은 우물도 집안에 있었다.

짧은 호사는 전쟁으로 박살났다. 1950년 6월 25일 개전과 함께 밀물처럼 쓸고 내려온 인민군은 한 달여 만에 진주까지 점령했다. 진주를 거점으로 마산을 함락시키기 위한 인민군의 대공세가 시작된다. 인민군은 진동까지 진출했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후퇴하기까지 진동고개에서 국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진동고개만 넘으면 마산 시내였고, 마산에서 부산까지는 평지라 일사천리로 진군할 수 있었다. 진주에서 제법 컸던 그의 집은 인민군에 의해 징발되었다. 아버지는 식구들을 이끌고 거제 근처 무인도로 피난을 갔는데, 김종철의 기억에는 두 장면이 선명히 남아 있다.

쪽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데 미군 함정이 나타나더니 조사를 한다며 키가 큰 미군 하나가 훌쩍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거의 뒤집어질듯이 배가 한쪽으로 확 기울 때의 그 공포감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섬에 도착해 보니 이미 몇 가족이 피난 와 있었는데 샘이 없었다. 바위 틈새로 한 방울씩 흘러내리는 물을 받기 위해 온종일 바가지를 들고 줄을 서 있던 광경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야 어려서 기억도 안 나지만, 인민군은 아이들을 모아 놓고 노래를 가르쳐 주는 등 우호적으로 사람들을 대했다죠. 그래도 우리 부모님과 형들은 반공 보수주의자들이 되었어요. 어쨌든 전쟁을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으니까요. 농민들도 그랬다지요. 불완전하나마 조봉암이 주도했던 농지개혁으로 이미 내 땅이 생긴 다수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인민군이 반가울 리 없었죠. 농민은 기질적으로 원래 보수적이잖아요. 김일성은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면 농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지만, 착각한 거죠.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데 일등 공신은 조봉암 선생이었죠. 그 조봉암 선생을 나중에 이승만이 간첩죄를 씌워 처형했으니, 참 말도 안 되는 아이러니죠.”

인민군 주력은 두 달 만에 물러났으나 전쟁은 계속되었다.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부 전역에서 빨치산이 되어 3년 가까이 교전을 계속한다. 김종철의 식구가 진주를 떠나 고향 마산으로 돌아간 것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53년, 그가 국민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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