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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국민주권 시대, 새로운 사회 구성의 연대를 위하여

새로운 국민주권시대,새로운 사회 구성의 연대를 위하여

 

1848년혁명 당시 민주파의 지도자였던 르드뤼-롤랭Ledru-Rollin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현대 대중 정치의 중요한 측면을 드러냈다. “나는 저들의 지도자다. 나는 저들을 따라가야 한다.” 물론 좀 더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원하던 사람들은 그의 이 말을 조롱거리로 삼기도 했으며, 이를 가리키는 꽤 오래된 말이 있다. 대중 추수주의! 하지만 계몽, 이성, 지도라는 말로 행해졌던 참혹한 20세기의 사건들을 뒤로 한 이후, 누구도 함부로 ‘전위의 지도’를 말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포스트민주주의 하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거나 철면피하거나 아무 생각이 없는 정치 지도자를 경험한 이후에는, 도대체 지도자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피해 갈 수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르드뤼-롤랭의 말을 예시적인 것으로 읽으면서 긍정성을 부여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여전히 또 다른 질문이 남아 있다. “따라가야” 할 “저들”이 어디에 있는가? 좀 더 근본적으로, “따라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전자는 ‘대중의 형성’ 혹은 ‘주체의 형성’이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후자는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 혹은 ‘지도자가 하는 행위에 대한 파악’으로 재개념화할 수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치적) 주체화를 경험하는 것은 호명과 요구의 발화를 통해서다. 이때 호명은 사건에 의해 이루어지고, 요구의 발화는 처지의 인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런 계기 자체에 대한 이해도 문제이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호명과 요구의 발화가 얼마나 넓은 지반 위에서 이루어지는가, 다시 말해 다수를 동원할 정도로 공통성이 있는가다. 한때 노동자 ‘계급’이 양적으로 다수일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의 ‘사명’을 지닌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의 파편화, 다른 요구 집단의 등장으로 인해 전반적인 변화의 공통 지반과 공통 요구가 무엇인지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함께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연대’라는 개념이다. 원래 연대는 중세적 질서가 해체된 이후 공적 단위인 국가와 개인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회를 구성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고용노동과 사회보험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면서 현대 국가와 사회의 기본적인 구성 원리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연대는 서로 다른 요구 집단 사이의 이해, 관용, 협력 등을 가리킨다. 간단하게 말해, 다르지만 함께할 수 있는 여지와 목표를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와 관련해서 우리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라는 초월적 이해(베버), 고차원적 의식의 투입 및 청교도적 삶이라는 변증법적이면서도 도덕적인 이해(레닌),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생물학적 이해(그람시) 등의 전범典範이 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결과론적 이해이기 때문에 이를 성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경로를 파악하기 어렵다. 레닌의 이해 방식은 앞서 말한 역사적 결과물 때문에, 그리고 개인들의 역량과 감수성의 고양 때문에 환영받기 어렵다. 유기적 지식인은 목표와 태도를 가리키기는 하지만 생물학적 비유가 초월적 인식과 난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과정에 대한 인식을 어렵게한다.

오늘날에는 지도자보다 집단 지성과 자발적 행위가 강조되고 있다. 물론 반대편에서는 ‘스타’에 대한 열망이 있다. 하지만 스타는 집단적 열망과 개인들의 바람이 잠시 머무르는 고정점이라고 할 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집단적 열망과 개인들의 바람이 흐르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중조직에 대한 스탈린적 의미 부여(전달 벨트)와 반대의 의미에서 통로(채널)라는 관점에서 조직과 활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00일을 맞이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진정한 국민주권 시대가 시작되었다”라고 천명했다. ‘촛불혁명’의 힘으로 기존의 정치과정이 변경되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사람이기에 당연한 말을 했다고 할 수 있고, 어쨌든 현행 헌법 체제 하에서도 할 만한 평범한 말로 치부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립 서비스’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 있어 보이며, 아니 우리가 거기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구성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어떤 의미로 국민주권을 말했는지는 사실 불분명하지만, 개헌에 관해 언급하면서 약간의 실마리를 주긴 했다. 그는 중앙 권력 구조 개편에 대한 정치권(국회)의 합의가 없더라도 “지방분권과 국민 기본권 확대” 개헌을 대통령과 행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민주주의가 제도화된 오늘날 왜 국민 기본권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한 가지는 역사적, 진화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프랑스혁명이 인간과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천명했지만 현실에서는 일부만이 이를 향유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이후의 역사는 사실상 인간과 시민에 포함되지 못했던 사람들이 동등한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한 역사라는 이해가 그것이다. 이러한 일은 “차별 철폐”라는 구호 아래 계속되어 온 일이다. 다른 한 가지는 최소한 2차 대전 이후 형식적으로는 자유와 평등,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특히 최근 들어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해 방식이다. 이를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화합과 불화”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특정한 시기, 예컨대 장기 호황의 황금기에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번성했고 또 민주주의의 토대를 일정 정도 마련했지만,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발흥 속에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침식했고 둘의 관계는 불화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본권 확대가 다시 형식적 명문화의 과잉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87년 체제를 경험하면서 모두가 분명하게 느낀 것은 헌법이 한계를 정해 주긴 하지만 그 자체로 포지티브한 현실의 결과물을 그냥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권리 확대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른바 당사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 때 헌법에 보장된 권리는 현실의 꽃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재 사회 각계에서 ‘개헌운동’을 벌이고자 하는 것은 이런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침식당한 민주주의의 토대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꽤 오래 전부터 기본소득을 포함한 새로운 경제체제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물론 이 자체가 여전히 충분히 구체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건 우리의 사고실험이 게을러서만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구체적 요소들을 발견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의 승리를 가져올 이성적인 사람들의 구성이 필요했다. 전자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경제의 구조적 변동과 연관된 것이며, 후자는 촛불혁명의 뒤를 이을,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려는 에너지의 결합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새롭게 사회라는 것을 구성할 수 있는 개인과 집단들의 연대일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시대』 2017년 09월호 통권51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