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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작년 가을과 겨울, 사람들은 광장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게 나라냐?” 이 외침은 근대의 정상 국가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으며, 한국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났던 통치의 양상에 대한 조소를 띠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이어지고 있는 한반도 위기(?)는 국가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낳을 수밖에 없다. 국가라는 것의 논리는 무엇인가? 여기서 국가는 물론 정상 국가다.

사실 두 질문은 겹쳐 있다. 후일 역사가들이 좀 더 상세하게 분석하고 치밀하게 서술하겠지만,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는 사태의 주요한 계기가 ‘세월호 참사’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통치 권력이 국가 구성원, 즉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대중의 인식은 탄핵으로 이어지는 큰 흐름을 형성했다. 이것이 ‘스캔들’이었던 것은 안전을 책임지지 못한 게 통치자의 무능 때문만이 아니라 무책임과 사사로운 일 때문이었다는 (혹은 대중이 그렇게 느꼈다는) 점 때문이다. 더 나아가 현대 국가의 통치자가 대중과 완전히 분리되어 더 높은 곳 혹은 저 깊숙한 곳에 거처하고 있다는 인식은 자유와 평등의 관념으로 무장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사실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대통령이 등장했을 때 대중은 환호했다. 이 환호는 어려운 시기에 영웅의 등장을 기대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자신과 같은 지평 위에 서 있는 보통사람에 대한 동일시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리고 당장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적폐 청산’과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정상화’이기 때문에 과제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방향의 제시만으로도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 위기 속에서 강행되고 있는 사드 배치는 국가의 정상화가 아니라 정상 국가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국가안보’라는 주장은, 사드는 목표로 하는 것을 달성할 수 없는 무기 체계라는 합리적 비판조차 무의미하게 만들며, 더 나아가 강정과 밀양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듯이 해당 지역 보통사람들의 물질적, 사적 삶 자체를 파괴하는 것도 용인하게 한다. 여기서 ‘자유를 위해 자유를 제한한다’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역설이 발생한다. 사람들의 삶의 안전을 파괴하는 국가 안보는 도대체 무엇인가? 물론 여기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든가, 외적 압력 앞에서 정치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단결해야 한다든가 따위의 대답 말이다.

문제는 이런 답변을 그리 쉽게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수자의 권리’는 좌우를 막론하고 국가 정치와 큰 담론에 가로막혔으며, 그나마 어느 정도 이런 권리들이 인정받은 20세기 후반 이후에도 반복적인 다툼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국가와 국가 사이의 충돌을 바라보는 ‘현실주의’ 논리를 넘어서는 틀과 행동도 여전히 발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의 논리는 불가피하게 국가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부딪혀 축소될 운명인가? 이러한 축소는 힘의 충돌 속에서 결국 자유와 평등의 실현 불가능성으로 이어지는가? 이런 체념을 반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시 이상주의를 불러내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건 선제적 예방 공격이 아니라 원리의 선제적 실현 노력이다. 대표적인 시도는 일방적 군축이다. 물론 전략적 사고까지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자간의 힘의 균형 속에서 일방적 군축을 점진적으로 실현할 경우, 이는 그 무엇보다 현실주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 공동체 내에서 개인과 개별 집단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되는가? 사실 소박하게 말하면 차이를 인정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동성애에 대한 일부 기독교계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차이의 인정은 고사하고 차이를 악마로 보고 처벌하려는 태도가 만연해 있다. 동성애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개인의 성향과 지향대로 살겠다는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대칭성 및 지배의 문제와 만난다. 그저 차이가 아니라 어떤 것은 ‘우월’하고 어떤 것은 ‘열등’하며 또 어떤 것은 지배적이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

이를 타개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경로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급진적 변화다. 하지만 역사의 경험은 급진적 변화조차 또 다른 지배적인 사회질서를 낳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따라서 급진적인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도리어 문제는 변화의 방향과 과정일 수 있다. 특정 집단의 해방인가 개인들의 해방인가, 하나의 지향을 가지는 변화인가 다층적인 변화인가? 물론 여기에는 이런 질문이 따라 나올 수 있다. 해당 사회, 즉 정치 공동체의 공통의 목표란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목표다. 그렇다면 변화의 과정도 계속해서 이러한 목표를 향해 조정되어 가는 경로를 택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변화가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을 확대하고 보장하며 ‘궁극적’으로도 그러한 방향 말이다.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좀 더 현실감 있게 부상하고 있는 오늘날 이런 사고방식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는 주로 그 효과와 필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매우 필요하고 적절하긴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과연 기본소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기본소득은 그 무엇보다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을 위한 것이다. 정말로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이 보장될 수 있다면 정치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내용을 새로운 헌법에 넣자는 시도는 그만큼의 의미가 있다. 다른 무엇보다 개인들의 자유와 존엄의 개인적인 물질적 기초를 이룰 수 있는 기본소득의 보장을 분명한 권리로 확보하고 이를 국가의 의무로 삼는다는 것은 매우 간단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심원한 목표와 역동적인 과정을 겨냥한 것이다. 그러니 당장은 한반도 위기 그리고 기타 정치적 개혁에 가려 크게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지만 기본소득을 헌법으로 보장하자는 요구는 커다란 발걸음이 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7년 10월호 통권52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