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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확장과 ‘혁명적 개혁’

민주주의의 확장과 혁명적 개혁

 

지난 10월 20일에 있었던 신고리5,6호기공론화위원회의 공론 조사 결과 발표 및 최종 정책권고안 제시는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우선 탈핵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이중적인 태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장 문제가 된 신고리 5, 6호기 건설의 중단과 재개에 대해서는 시민참여단의 59.5퍼센트가 건설 재개에 찬성표를 던져 신고리 5, 6호기는 한국 원자력발전소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의 축소, 유지, 확대’와 관련해서는 축소가 53.2퍼센트, 확대가 9.7퍼센트로 ‘장기적으로’ 탈핵으로 가는데 찬성했다. 471명의 시민참여단이 얼마나 대표성이 있는가,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숙의와 토론 과정을 얼마나 의미 있게 볼 것인가와 상관없이, 장기적으로는 탈핵에 찬성하는 경향이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현상 유지를 택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텐데, 당장 쟁점이 된 건설 중단이냐 재개냐와 관련해서는 이른바 ‘매몰 비용’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건설 재개 찬성 쪽에서 제시한 ‘수출’, ‘국익’ 같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결국 ‘경제적 공포’를 부추긴 것이고 여기서 안전과 가치 등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후 탈핵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의미 있는 로드맵을 제시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정부는 10월 24일 국무회의를 통해 ‘탈원전 로드맵’을 의결했다. 이에 따르면 신고리 5, 6호기를 제외한 신규 원전 6기 건설 백지화, 노후 원전 14기의 수명 연장 불허 등을 통해 2038년까지 원전을 14기로 줄인다고 한다. 이와 함께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20퍼센트로 높인다고 한다. 끝으로 해당 지역과 산업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한다.

이런 로드맵을 보면서 우선 떠오르는 것은 시간이 매우 길다는 것이다. 탈원전은 직접적으로는 ‘위험한 에너지’를 더 이상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지만,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기존의 화석에너지 체제에서 재생에너지 중심의 새로운 에너지 체제로 전환하자는 맥락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이를 감안할 때 좁은 의미의 탈핵이 아니라 에너지 체제 전환이라는 큰 맥락에서 시간 계획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에너지 체제의 전환만이 아니라 사회적 전환을 포함하는 것이 될 텐데, 과연 집권 세력이 이러한 상상력과 의지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시민이 참여하는 공론화 과정에 대해서는 대체로 여론이 호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과거 정권에 ‘불통’이라는 트레이드 마크가 있었기 때문에 시민의 직접 참여, 토론, 의견 개진 등의 과정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주목을 받았고, 이후 발전시켜야 할 어떤 것의 지위를 얻었다. 그런데 이 자체를 발전시키는 것과 별개로 기존의 정치과정에 시민의 참여를 어떻게 폭넓게 보장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예컨대 한국의 헌법은 입법발의권이나 소환 등 직접민주주의의 요소가 하나도 없다. 또한 숙의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시간과 돈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다. 이것도 에너지 체제 전환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경제사회적 삶과 양립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더 커다란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신고리 5, 6호기를 둘러싼 공론화 과정은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변화 혹은 이행을 추구할 때 나타나는 난점을 보여 준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저널리즘 용어로 말할 수 있는 기성 질서의 강고함이다. 사실 동어반복이긴 하지만 강고하고 지배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성 질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성 질서의 강고함과 그 강고함을 유지하기 위한 유연함은 사실 87년 체제에서도 이미 경험한 바가 있다. 물론 민주주의 체제가 가지는 개방성으로 인해 권리의 진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체제 자체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적응력과 맞물린 기성 질서의 강고함과 유연함은 언제나 ‘포섭’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특히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혁명 혹은 대중의 봉기마저 흡수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완고함이다. 이때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절차적 정당성뿐만 아니라 소유적 개인주의까지도 어느 정도는 확고하게 자신의 정당한 내용으로 삼고 있다. 현 정권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는 ‘촛불혁명’조차 이런 민주주의 앞에서 무력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 혁명의 주된 요구가 제한된 의미의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적절한 수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 커다란 변화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 아마 변화의 가능성은 민주주의의 확장과 이 속에서 나타날 틈새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는 민주주의를 다시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며, 현 체제의 난점과 모순을 찾아내는 일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기본소득개헌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로 기본소득 보장을 새로운 헌법에 넣고자 하는 시도는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다. 현행 헌법에도 있듯이 현대 국가가 그 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은 공히 인정되는 바다. 하지만 보장의 정도와 방법은 정해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사회경제적 체제 속에서 사실상 보장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을 권리로서 보장하자는 것은 구체적인 방도를 헌법에 넣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다. 따라서 이는 커다란 충돌을 가져오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당할 시도다. 하지만 담론 투쟁으로서의 이런 시도는 틈새에서 일어날 구체적인 투쟁의 나침반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하게 하려는 노력이다.

아마 틈새는 기성 질서와 실제 사이의 모순 혹은 충돌에서 찾게 될 것이다. 우리가 ‘청년문제’에 주목하면서 청년배당을 실시하는 것이 충분한 기본소득으로 가는 중요한 교두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식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런 방향을 지시한다. 제4차 산업혁명과 일자리 없는 미래라는 테제도 거대한 전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완전고용의 신화와 노동 중심성에 머물러 있는 기성질서의 틈새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만큼 심각한 것이 재생산 위기와 ‘초고령화 사회’라는 전망이다.

 

틈새를 파고드는 전략은 지난 9월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BIEN Congress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기본소득의 실시Implementing a Basic Income”이라는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소득의 제도화가 구체적인 시야에 들어왔다는 인식 하에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기본소득을 제도화할 수 있는가라는 발표가 제법 있었다. 예를 들어 음의 소득세(또는 마이너스소득세)를 “보편적인 방향”으로 개선해서 기본소득에 접근하자라든가 기본소득이 아니라 최저소득 보장을 우선적으로 제기한다든가 하는 접근법 등이다(리스본 대회에 관해 좀 더 자세한 것은 다음 호에 실릴 것이다).

이런 접근법을 그저 기각할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틈새를 찾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틈새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기성질서에 포섭되는 것인지는 그러한 개혁 조치에 대한 면밀한 검토 속에서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에 비추어 여러 시도를 기각하는 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개혁 조치들이 전면적 변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민주주의를 다시 정의하며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사실 지금 현 정부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경멸의 폭포수’가 흐르고 있다면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사회 연대성’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지향 사이의 절연이다. 물론 촛불혁명은 죽었고 1주년은 추도식이 될 것이기 때문에 대칭적인 대립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할 때만 우리의 싸움은 한 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7년 11월호 통권53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