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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단과 적폐

농단과적폐

 

마지막 달에 내는 잡지의 머리글이니 짧게라도 올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올해’란 2017년 1월부터가 아니라 촛불이 시작된 2016년 10월 말부터 지금까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난 직후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사람, 재단, 기구 따위의 이름을 제외하면 아마도 “농단”일 것이다.

“국정 농단”이라는 어색한 표현에서 ‘농락籠絡’을 떠올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사실 농단과 농락은 전혀 관계가 없는 말이다. ‘농단壟斷/隴斷’은 높은 언덕이라는 말이고,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그런 언덕에 올라 아래를 둘러보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파악하고는 그로 인해 이득을 독점하는 것을 뜻한다.

“국정 농단”은 매우 너그럽고 고상한 표현이었다. 검찰이 박근혜 들을 기소할 때의 죄목은 직권남용, 강요 또는 강요 미수, 뇌물 수수, 공무상 비밀 누설 따위일 뿐이다. 따라서 부정 입학, 문화계 블랙리스트, 보안 손님 따위의 사태를 접하고 누군가 ‘농락’을 생각하게 된다면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남을 교묘한 꾀로 휘잡아 제 마음내로 놀리거나 이용하는 것이 농락이니, 국정을 농락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농단’ 세력에 대한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재판 진행 과정에서도 국민은 농락당하는 느낌이다.

그 인물들에 대한 수사나 재판과는 별도로,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자주 등장한 단어로는 “적폐積弊”가 있다. 하지만 일찍이 2014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당시 대통령 박근혜도 그 단어를 입에 올린 바 있다. “뿌리 깊은 적폐를 해소하지 않고는 국민 안전은 물론 경제 부흥도, 국민 행복도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국민 안전”이 세월호 사건을 생각하고 한 말이라면 참으로 뻔뻔스러운 일이지만, 어쨌든 이때 말한 “적폐”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이와 달리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은 박근혜 정부에서 시작된 것을 겨냥하다가 이명박 정부까지 확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두 정부를 거치며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을 쓸어 없애겠다는 것이 지금의 “적폐 청산”이다. 국정원에 적폐청산태스크포스가 설치되고 국방부에 적폐청산위원회가 설치되어, 박근혜가 당선되던 대통령 선거에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 ‘댓글 부대’를 운영했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의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은 적지 않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며 ‘고위 공직자’들이 하차하는 것이 그렇고, 세월호에서 유골을 발견하고도 쉬쉬하는 것이 그렇고, 청와대 정무수석이 뇌물 혐의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그렇다.

백 번 양보해 이런 것은 일부 개인과 관련된 일이라 치더라도, 정책과 관련해서도 적폐를 청산하지 않고 오히려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모습을 문재인 정부는 보이고 있다. 이번 호에서, 박근혜 시절의 “규제프리존”이 “샌드박스”로 이름만 바뀌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후보 시절 사드 배치 문제는 다음 정부에서 결정하자던 대통령은 사드 배치에 적극적이고, 건설 중인 핵발전소 문제는 공론화위원회라는 틀로 책임을 넘겨 공사를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무엇이 청산할 적폐인지를 놓고 현 정부는 오락가락하고 있다.

행사장에서 대통령 옆에 앉게 되는 사람이 바뀌고, 대통령이 구내식당을 이용하고, ‘국민신문고’가 어느 정권보다 활성화되는 등 직전 정권과는 달리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는 성공한 듯하다. 탄핵된 대통령을 언론에서 아무 직함 없이 그냥 ‘박’으로 쓰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변화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 종식”이 시대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답답할 뿐이다.

답답한 일은 그곳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번으로 두 번째인 민주노총 임원 직접선거는 애초의 취지를 보잘것없게 만들고 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권에 대응하는 전략을 준비해 조합원들과 토론하기보다는 그저 선거 일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른바 ‘좌파’가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던 시도가 있었지만, 공동의 대응이 불가능하게 끝났다. 반전과 평화를 말하려는 행사에 참가하려던 허영구 평등노동자회 대표는 일본 정부의 입국 불허로 인해 오사카공항에서 조사를 받다가 귀국했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갔다. 내년에는 좋은 소식을 기대해 본다. 기본권을 강화하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개헌 권고안이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다거나, 모든 표가 같은 가치를 갖도록 선거제도 개혁이 진행된다거나,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가 이름처럼 많은 국민의 운동을 포괄하는 활동을 한다거나. 한 해 동안 관심과 애정을 보인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김태호

 

이 글은 『시대』 2017년 12월호 통권54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