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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국면(?), 무엇을 할 것인가?

개헌국면(?), 무엇을 할 것인가

19세기 전반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1772~1837)는 자신의 ‘사상’과 미래 계획을 구성하면서 인간의 변덕스러움을 주요한 전제로 삼았다. 이를 사회적, 기술적 혁신의 동기에 적용하든 생물학적 돌연변이에 대입하든 그럴듯하다. 하지만 인간은 꽤나 보수적이고 완강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일 년 전 가을과 겨울에 우리는 이를 경험했다. 거의 십 년에 가까운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지나면서 극악한 정치적, 사상적 탄압을 경험했음에도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행동의 의지는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지 터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광포한 신자유주의 시절을 이십 년쯤 겪었음에도 ‘이윤보다 인간’을 바라는 우리의 또 다른 욕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87년 민주항쟁이 30주년을 지나면서 우리가 새삼 깨닫는 것은 (민주주의) 제도와 기성 정치의 완강함이다. 거리의 정치가 탄핵이라는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했지만, 제도의 완강함은 제도의 정치적, 법적 절차를 따라가도록 했고, 이 경로 의존성은 결국 새로운 대통령의 선출로 끝났다. 물론 이렇게 선출된 대통령은 대중의 열망뿐만 아니라 그 과정도 잘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는 분명 기성 제도의 대통령이며 그 구조를 쉽게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구조 속에서도 적절하게 통치 혹은 협치의 방법을 배워야 하고, 또 사회운동을 활성화하면서 변화의 힘을 끌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럴 조짐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 대통령이 일 년만 기다려 달라고 한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시간의 필요성만 말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 어떤 전략적 판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회운동의 힘을 끌어내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통치 혹은 협치도 기성 정치 내에서 쉽지 않을 것이고, 이는 결국 대중에게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 줄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런 이유로, “촛불은 개헌으로 완성된다”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제도 자체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편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개헌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제도 속에서 제도를 바꾸려는 움직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라는 어떤 전임 대통령의 말처럼, 그렇게 제도 안에서 제도를 바꾸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개헌 자체에 대한 요구는 광범위하고 또 강력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권력 구조의 문제다. 박정희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제왕적”이라는 수식어는 구체적인 인격에 따라 사실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 반대편에 있는 것이 ‘5년 단임제’다. 이는 충분한 역 사적 근거가 있는 제도이긴 하지만 대의제 정당정치의 책임성이라는 문제를 회피하게 만든다. (아예 모든 선출직의 단임제를 다른 시각에서 시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직업적 정치가’라는 범주 자체가 사라져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권한이 인격에 따라 광범위하게 남용될 수 있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한다 해도 이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갈린다. 하나는 임기 4년에 중임이 가능한 대통령제다. 다른 하나는 이원집정부제라 불리는 사실상의 내각제다. 여기에 순수 내각제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대의제 정부라는 형태에서 이들 이외에 다른 것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스위스 같은 예도 물론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대중적 호소력을 얻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대통령제와 내각제 가운데 어느 것이 대의제 정부에 적절한지를 따지자면 논리적으로는 내각제가 합당할 것이다. 대통령제는 유권자에 의해 선출된 두 개의 기관이 병립해 있는 양상이며, 현실적으로 대통령이 더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입헌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입법 기능은 분명 의회에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왕이 부재한 체제에서 왕 대신에 꼭대기에 있는 자리를 만든 게 대통령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최소한 한국의 대통령은 대중의 열망을 대변하며 그 에너지를 하나의 방향으로 집행하는 힘이기도 했다. 게다가 기성 정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내각제를 새로운 카스트를 위한 장식물에 불과하다고 보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의제에 맞게 의회를 구성하고 의회가 적절한 권한을 가지도록 하는 개혁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한 선거제도의 개혁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개헌은 권력 구조 때문에만 나온 의제는 아니다. 우선 ‘국민’의 기본권을 제대로 보장하기 위해 헌법 내용을 수정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서 개헌에 대한 요구가 나왔다. 이때 기본권 보장은 두 가지 방향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거나 무시했던 권리를 새로운 헌법에 분명히 새겨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정체성’에 근거한 권리로 표현되며,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차별의 금지다. 다른 하나는 추상적으로만 표현되어 있거나 국가의 의무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 부분을 구체화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이는 특히 ‘사회권’과 관련이 있다.

기본권 보장과 관련한 개헌의 요구는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의 성숙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제기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기존의 기본권 보장이 역사적이고 특수한 것이며 새로운 지평에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도 제기된다. 예컨대 ‘양성평등’이라는 자유주의적 표현 대신 ‘성평등’이라는 규범을 제시할 때 이것이 현재의 지배적인 사회 질서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함께 담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본권 보장의 요구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질서가 넓은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와 양립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근원적으로 소유권 보장 및 이윤 추구의 자유라는 가치 위에 자리 잡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모두가 동등하게 공공의 업무respublica에 참여하는 민주적 공화주의는 충돌하기 마련이다. 물론 역사 적으로 이러한 모순적 결합의 체제는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기도 하고 조작하기도 하면서 유지되어 왔으며, 특히 제2차 대전 이후 상당한 활력을 보이기까지 했다. 여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러시아혁명으로 성립한 사회주의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압력, 총력전에 따른 사회적 압력, 자본주의경제의 내적 모순에 따른 경제적 압력 등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세기말 이러한 압력은 여러 이유로 인해 사라졌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그 극한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는 금융자본과 대기업의 지배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존재하나 그 실질은 사라진 형해화된 민주주의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

이런 의문은 사회권 보장을 아주 획기적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주장과 경제적 질서의 바탕을 바꾸어야 한다는 견해로 이어진다. 전자의 대표적인 것이 기본소득이며, 후자의 경우 토지 공개념의 강화 및 사회적 경제를 새로운 헌법에 적절하게 포함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개헌은 분명 1987년의 헌법 개정에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일 수 있는 커다란 변화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제도적 방식의 제도 변화인 ‘개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기성 질서의 요구에 따른 개헌 이외에 의미 있는 개헌, 사실상의 제헌은 혁명이나 이에 준하는 상황 속에서만 가능했다. 물론 지금이 촛불의 연장선에 있는지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었는지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한 것처럼 광화문에 모였던 대중의 힘은 대통령에게 많은 것을 의탁한 후 뒤로 물러섰다. 이 힘이 제도적 제도 변경인 개헌으로 모일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쨌든 부분적으로라도 긍정적인 내용을 담은, 즉 대통령이 말하듯이 기본권 보장과 지방 분권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헌을 6월에 이루어내기 위해 힘을 모을 것인가 아니면 좀 더 포괄적이고 제대로 된 개혁의 내용을 담은 개헌을 계속해서 ‘주장’할 것인가? 물론 현실에서 둘은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실제 개헌은 국회의 정치과정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의 정치 지형에는 다른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어리석었지만 가장 길게 효과를 미친 것은 (실패한) 커다란 변동 뒤에 곧바로 그러한 변동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촛불혁명이 그만큼 성공했고 또 그만큼 실패한 것이라면, 금세 마찬가지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우리야말로 완강한 제도와 변화된 정치 지형 속에서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를 ‘개헌 국면’에서 실행하는 일은 개헌이 사실상 ‘제헌’이 되도록 하는 활동일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개헌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 이 속에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이후를 위한 새로운 주체와 조직의 형성일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01~02월호 통권55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