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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68년 혁명’ 당시에 나왔던 유명한 슬로건 가운데 하나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다. 물론 “리얼리스트가 되라!”라는 슬로건과 함께이긴 했지만, 이 슬로건은 68 혁명의 유토피아적 성격을 상징하는 어떤 것이 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없다!”라는 주문 속에 ‘혁명성’이 거세된 좌파의 소심함을 꾸짖는 목소리가 되었다.

유토피아적 기운이 가득했던 시절에서 꽤 긴 시간을 지나온 오늘날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불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혹은 우리가 말하는 변화는 어디까지인가?

과거의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인간의 해방을 ‘생산력의 발전’에 건 도박이었다면, 아마 지금이야말로 해방을 이룰 확률이 가장 높은 시기일지 모른다. 생산력의 발전이 단순히 물질적 풍요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 시간인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 시간을 확대할 수 있을 때 해방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좁은 의미의 경제적 변화가 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하며, 이런 점에서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새로운 국면을 연 여성운동과 반인종주의운동은 경제적 해방이 그 자체로 인간의 해방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역설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 민주주의와 해방을 요구한다고 하는 신좌파운동, 노동운동 내에서 기성 질서의 차별이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폭로하는 과정이 있었다. 이는 여성과 특정 인간 집단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또 다른 구조와 문화가 존재하며 거기에 맞는 또 다른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또 다른 변화의 방향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 있다. 이는 자유란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헤겔적인 의미에서만 해방적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근대의 해방이라는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에는 ‘자연의 정복’을 통해 인간의 물질적, 자연적 제약을 극복한다는 방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프로젝트를 통한 자연의 정복이 인간적 삶을 발밑에서 허물고 있다는 자각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재인식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것은 논리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 해방을 지향할 수 있는 오늘날, 사회 양극화는 더욱 심하고, 바로 그 때문인지 조금이라도 물질적 향상을 이룰 수 있다면 거기서 위안을 찾을 것만 같은 상황이다. 여성해방과 인종해방 같은 주제는 보편적인 것으로 고양되기는커녕 특정 집단의 요구로 폄훼되고 있고, 이에 따라 사회적 분할을 자극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재인식은 발화자의 현실적 위치에 따라 너무나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으며, 이는 행동을 가로막는 것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방이라는 유토피아적 프로젝트는 더 이상 불가능하며,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인가? 물론 포스트 공산주의 시대,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없다’라는 시절을 거쳐 온 우리에게는 ‘최소 원칙’이라는 게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개인의 권리, 생태적 지속 가능성, 차별의 부재 등이다. 말 자체로는 상식적이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불가능한 일이다.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보장이 없는 권리는 추상적 문구이며, 산업주의를 뒤집는 실질적 조치가 없는 생태적 지속 가능성은 헛된 구호이며, 무조건적 평등과 반권위주의가 관철되지 않고서는 차별의 철폐가 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각각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 마련된다는 것 자체가 그 조건들 사이의 충돌을 수반할지도 모르는 일이며, 그 조건들을 조화시킨다는 것 자체가 진정으로 불가능한 요구일지 모른다. 이를 가능케 하는 거의 유일한 근대적 요구는 평등-자유égaliberté일 것이다. 평등-자유는 개인과 모든 사물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자는 요청인데, 이때 각 개인들은 존 던John Donne이 노래했던 다음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도 나를 작아지게 하나니, 그것은 내가 인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냐고 묻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므로.”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06월호 통권59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