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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시대가 변하고 있는가?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지난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일부 언론과 이데올로그들이 합의문에 확실한 북한의 비핵화 원칙, 이른바 CVID가 담겨 있지 않다고 당연한 시비를 걸긴 했지만, 대체로 보아 새로운 시대를 향한 첫 걸음을 떼었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열린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원내에서 진보로 분류되는 정의당의 성과는 애매하지만 제법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유권자의 의사가 투명하게 반영되지 않는 현행 선거제도로 인해, 그리고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이 현재 누리고 있는 인기 덕분에 더불어민주당이 커다란 승리를 거둔 것이 당장 눈에 들어오는 일이긴 하지만, 자유한국당의 몰락이 아마 더 큰 사태라는 점에도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당연히 자유한국당은 ‘쇄신’의 노력을 할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적응’하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당내의 분파 투쟁을 제외하더라도 현재로서는 쇄신의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그건 이들의 진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흐름이 더 이상 시대 변화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좀 더 시간이 흐른 후 자유한국당을 지지했던 대중의 열망과 욕망을 받아 안을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유한국당의 지배를 가능하게 했던 조건을 많은 사람은 냉전과 분단,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찾을 것이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민주주의에서 이데올로기가 주는 환상적 만족이나 억압만으로 장기간 통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대중이 누렸을 실질적 이득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우리가 ‘산업화’라고 부르는 한국 경제의 성장과 그에 따른 어느 정도의 분배였을 것이다. 냉전이라는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이 (이 속에서 희생당한 사람들과 무관하게) 한국 경제의 성장을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냉전과 반공은 최소한 한반도에서는 동전의 양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균열을 가져온 것이 이른바 ‘97년 체제’하의 사회 양극화였다. 성장과 고용의 ‘선순환’이 깨지면서, 다수에게는 당장의 삶이 어려워졌다. 또한 저성장 국면에서 자본은 투기에 의한 수탈, 보조금을 통한 강탈, 임금 비용의 절감을 통한 초과 착취에 몰두했다. ‘갑질’은 이런 양태가 두드러지게 드러난 일일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신자유주의에 포획당하면서 이런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할 수 없었다. 진보라는 세력조차 방어적인 투쟁에 몰두하던 시절에 당시 정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경제성장에 대한 욕망이 이명박이라는 일그러진 인물로 통해 투사된 것은 냉전과 반공이라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이를 대신할 그 어떤 공공선도 눈에 잡히지 않을 때 대중이 선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일그러진 초상화가 아니었을까? 이런 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후광과 자신의 묘한 아우라 덕분에 대통령이 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반사회적 가족과 개인만이 삶의 준거점이 된 시절에 그나마 대중을 통합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미지 덕을 입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그의 오랜 벗이 드러나고 자신의 시간은 드러나지 않은 채 산산조각이 났다.

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일종의 경로 의존성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두 가지 과제는 각각 무겁기도 하고 서로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하나는 “적폐 청산”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좀 더 민주적이고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자리 창출을 통해 사람도 살리고 경제도 살리는 일일 것이다.

우선 적폐 청산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크다. 사회의 나머지 부분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어딘가에, 주로는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겠지만, 잘못된 관행이 쌓여 왔다는 것으로 쓰이는 게 적폐다. 하지만 적폐 따로 정상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적폐만을 암세포 적출하듯이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자리 창출의 경우, 공공부문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어느 정도 만드는 것은 가능하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과잉생산의 덫에 빠진 현 국면에서, 특히 수출 주도형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 경제가 적절한 수준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현 정부가 기대하는 것은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내수 활성화, 공정한 거래를 감독함으로써 다수 고용을 유지하고 있는 중소기업의 활력 제고다. 그런데 전자는 제한적인 효과만 있을 것이고, 후자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양자를 관통하는 남북 관계의 개선이 있긴 하다. 하지만 아직 불확정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다. 물론 이것은 앞서 말한 자본주의의 현 국면을 반영하는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적’ 방식이다. 문제는 이것이 한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최근 거세진 반페미니즘, 예멘 난민의 제주도 입국으로 불거진 포비아 등을 볼 때 적폐를 청산하고 돌아갈 우리의 정상적인 과거는 없다. 또한 최저임금 인상이나 일자리 창출 같은 방식으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정상적인 경제란 것도 없다. 사태는 언제나 중층적이고 정상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요구할 뿐이다.

자신의 삶의 비참함 때문에 타인을 혐오하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 새로운 사태를 상상할 수 있는 여유와 기회를 가지는 것만이 언제나 위기의 물결을 새로운 ‘정상’으로 데려다줄 물길로 만들 수 있다. 만약 기본소득을 포함해서 우리가 넓은 의미의 경제민주화라는 것을 달성할 수 있다면, 우리는 큰 파도 너머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먼저 적폐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익숙함이라는 적폐 말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07~08월호 통권60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