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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주도 성장의 시대착오

촛불혁명에 뒤이은 문재인 정부의 등장은 최소한 두 가지를 보여 주었다. 하나는 한국 민중의 완강한 저항이 폭발적 계기 속에서건 누적된 불만 속에서건 언제든지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역사의 반복이며, 다른 하나는 매우 온건하고 질서 있고 상당히 기성 질서 안으로 편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그 저항의 고유한 성격이다. 특히 후자에 대한 분석은 훨씬 더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므로 여기서 다루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촛불혁명으로 인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는 문재인 정부의 모호한 성격이다. 아니 촛불혁명의 요구를 특정한 방향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정부의 태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것은 원래 의미와는 다르지만 “질서 있는 자본주의”를 만들겠다는 한국의 상상적 자유주의자의 오랜 꿈을 실현하려는 것일지 모르겠다.

문재인 정부의 성격이 모호하다는 것은 우선 폭발적인 대중의 지지 속에 당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요인으로 인해 그 이전 어느 대통령도 누려 보지 못한 지지도를 보이는 정부가 어떻게 이토록 소심한 태도를 보이는가다. 혹자는 최근의 논란 속에서도 이른바 “소득 주도 성장”을 지속적일 뿐만 아니라 발 빠르게 추진하겠다는 정부의 태도 속에서 그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부가 말하는 소득 주도 성장은 사실 그 말과 달리 소심함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일부 우파가 여전히 “규제 완화”를 떠들긴 하지만 그런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임금 주도 성장”이며, 이것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소득 주도 성장”으로 탈바꿈했다. 이름이야 어떠하든 넓은 의미에서 케인스주의의 부활인 것만은 분명하다. 피고용인의 소득이 어느 정도 보장될 때 경제적으로는 유효한 소비가 보장될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재생산의 조건이 보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경제 운영 방식이나 사회제도가 피고용인의 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요소와 배열이 있는가고, 다른 하나는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사회적인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재생산이 가능한가다.

케인스주의가 경제학에 혁명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전후 자본주의와 복지국가 황금기는 고유한 역사적 배치와 내적 요인들에 의해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의 생명 정치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전쟁 기계로서의 국가의 역할을 강조할 텐데, 최대의 총력전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여기서 중요한 배경이 될 것이다. 계급 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사태를 보는 사람들은 그 이전에 있었던 계급투쟁의 격화와 타협의 드라마를 그릴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시각 사이에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대중의 주체화일 것이다. 전쟁기계로서의 국가의 국민 혹은 시민이건 계급투쟁에 나서는 계급 주체이건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 둘은 겹쳐 있다. 경제 운영과 국가 운영의 주체로서 말이다. 이 밑에 깔려 있는 것이 보통 ‘포드주의’라고 말하는 경제 운영 방식이었다. 고정자본의 대량 투입으로 인한 대량생산은 한편으로는 규율 있는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적 욕망을 자극받은 소비자를 필요로 했다. 이는 제도적으로 (산업)노동조합과 (부르주아적) 가족으로 나타났다. 물론 여기에 냉전과 탈식민화를 더해야겠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어떤 시기에는 천천히 또 어떤 때는 급격하게 사태가 바뀌었다. 그 사태의 변화는 신자유주의화와 탈냉전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소득 주도 성장론과 관련해서만 살펴보자면 과거에 피고용인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소득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대량생산 방식과 강력한 노동조합의 존재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변화했다. 공장의 해외 이전으로 시작된 노동의 유연화는 글로벌 노동력의 확대, 여성의 노동 참가 확대, 유연한 생산방식의 도입으로 이어져, 오늘날에는 “영구 임시직”이라는 새로운 범주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일부 나라에서는 여전히 노동조합이 강력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조직률은 절반에서 2/3까지 떨어졌고, 새로운 존재방식의 노동력을 조직할 특별한 방법도 눈에 띄지 않는다.

또 다른 변화는 금융자본주의의 새로운 등장이다. 이를 완전히 새로운 양상이라고 볼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의 반복된 이행 국면에서 나타나는 금융화 현상이라고 볼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생산과 유리되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금융자본은 자본주의의 약탈적 성격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이 속에서 이른바 ‘자본소득’이라고 분류되는 이윤이 크게 늘어났고, 이는 사회 양극화를 가속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장려세제EITC 같은 수단밖에 없는 소득 주도 성장은 사태의 일부만 보고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소득 불평등이 큰 것은 사실이고 현재의 최저임금이 생활임금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일 때, 최저임금 인상은 거쳐야 할 하나의 과정이긴 하다. 하지만 강력한 노동조합과 같은 제도 없이 법정 최저임금을 소득 주도 성장의 주된 수단으로 삼는다면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더 큰 문제는 소득 불평등이 아니라 이른바 자산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사태다. 상상할 수 없는 서울의 주택가격은 하나의 징후일 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현 정부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지만,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적절한 선택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질서 있는 자본주의”를 다른 말로 하면 ‘능력주의’일 것이다. 엘리트 대학을 나온, 선한 자유주의자들인 그들이 보기에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은 능력에 따른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것이 총칼을 가진 군부 때문이건, 돈을 가진 재벌 때문이건 말이다. 그들이 소득 주도 성장과 함께 “혁신 성장”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문재인 정부는 19세기 말 미국에서 있었던 ‘혁신주의 운동progressive Movement’을 떠올린다. 기득권층에 맞서 현대화된 중간계급이 일으킨 반부패 운동 말이다. 물론 오늘날 적폐 청산이라고 부르는 이런 과제는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만이 적폐일까? 그들이 말하는 적폐를 청산하면 공정과 정의가 확보될까?

사실 정의를 위한 투쟁은 무엇이 정의인가를 둘러싼 싸움이기도하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갈라져 있는 현대사회에서 정의가 하나일 리 없다. 소득 주도 성장을 둘러싸고 표면적으로는 현 정부와 야당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싸움은 거기서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만인의 적절한 생존을 위한 요구를 넘어서는 정의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촛불혁명과 문재인 정부의 탄생이 하나의 포퓰리즘적 계기였다면, 이제 이 국면이 지나가고 새로운 국면을 열 때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09월호 통권61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