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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을 생각한다

인간 지식의 불완전함과 인식의 불철저함으로 인해 우리는 끊임없이 다시 보기revision를 해야 한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학을 보자면, 새로운 사료(사실)의 발견이나 증거를 다루는 새로운 방식이 나타날 경우 혹은 둘 다일 경우 과거를 다시 보는 작업이 집중적으로 벌어진다. 하지만 이 바탕에 가치나 지향이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혁명을 ‘위대한 부르주아 + 민중의 혁명’으로 보지 않고 어중이떠중이(민중)가 정치라는 장에 난입하여 올바른 개혁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고 보는 ‘수정주의’가 냉전 자유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듯이, ‘광주사태’가 ‘광주의 민주화 운동’ 혹은 ‘광주민중항쟁’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87년 체제의 형성과 완성을 향한 움직임을 반영한다.

사실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내뱉는 말 ‘이러려고 * * 했나?’라는 말도 같은 행위다. 요즘 같아서는 이 말을 ‘이러려고 촛불혁명 했나?’ 혹은 ‘이러려고 그 추운 겨울에 우리가 거리에 나갔나?’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촛불혁명은 21세기에 비폭력적이면서도 상당히 합법적인 방식으로 시민의 의지에 반하는 권력을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기무사가 당시 대통령과의 ‘교감’ 속에 계엄령을 ‘준비’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문건들이 나오긴 했지만, 거꾸로 보면 계엄령을 실시하고픈 마음은 있었겠지만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제도나 심성이라는 면에서 꽤나 완강하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사실 사태가 그렇게 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그 일당이 보인 너무나 터무니없는 행태 때문이긴 하다. 당시 새누리당조차 탄핵에 동의했다는 것은 그저 대중의 움직임에 편승하려는 기회주의적 태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에 우리는 민주적이고 개혁적이면서도 가깝게 느껴지는 스타일의 대통령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감동을 주었다. 격식 문제에서부터 과거사에 대한 이해까지 그는 사람들이 대체로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비핵화를 향한 남북 관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경제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면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정권이 지난 두 번의 정권과 다른 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른바 “소득 주도 성장”의 유일한 정책 수단인 최저임금 인상 추진도 어려운 경제 여건 앞에서 스스로 철회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집값 안정과 적절한 재분배를 위해서 꼭 필요한 토지 관련 세금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이 정부의 경제철학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을 두고 간단하게 ‘부르주아 정권’의 본질이 드러났다고 비난하는 것은 편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본질’을 간과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좀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정부는 자유주의 개혁 세력과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의 연합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자유주의자들의 오랜 꿈은 정상적인 자본주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베를린장벽의 붕괴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민주주의로 미끄러져 갔고 1997년의 실질적인 평화적 정권 교체 속에서 제도적, 실천적 가능성을 발견한 후자는 실현 가능한 복지국가를 자신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들의 공통분모를 찾자면 “경제적 공포”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성장을 지상 목표로 삼고, 여기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신자유주의자들과 유일하게 다른 점은 성장의 과실이 좀 더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생각일 것인데, 이는 무엇보다 고용의 증대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 또 하나의 강박을 더해야 할 것이다. 87년 체제를 거치면서 한국 현대사를 해석하는 두 개의 핵심어로 산업화와 민주화가 떠올랐다. 이 두 단어는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자랑스럽게 내세울 때 등장한다. 문제는 둘 사이의 관계다. 산업화는 개발 독재에 의해, 민주화는 그 속에서 민중의 저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통속적인 이해 방식이다. 이것이 지난 20여 년 정도 지속되고있는, 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의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집권한 민주개혁 세력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자본축적, 고용 안정, 복지 등의 순환적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게 현대 국가라는 인식에서 이들도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집권의 이유를 보여 주는 것은 이를 더 잘 수행 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 주는 것 이외에는 없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정책 수단이 신자유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문제다. 따라서 의지는 산업화를 민주화에 수렴시키려 하나 현실은 민주화를 산업화에 수렴시키는 것이며, 이는 어쩌면 이전 정권보다 더한 경제적 배치와 상황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 정부가 경제와 관련해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게 그저 이들의 본질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자유한국당이 촛불혁명 당시 탄핵에 동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 정부도 대중의 움직임에 의해 탄생했고 또 거기에 신경 쓰고 있다. 문제는 무엇이 촛불 정신인가다. 눈에 보이는 촛불혁명의 한 가지 공통된 목표는 물론 대통령 탄핵 혹은 퇴진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다양한 열망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세월호 참사의 억울함부터 청년의 불안한 미래와 여성에 대한 차별까지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표출한 불만과 간직한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탄핵이라는 공통의 목표 이외의 것은 억압당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서로 갈등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이는 현행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과도한 믿음에서 나왔거나 민주개혁 세력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촛불혁명은 최소한 현재까지는 87년 체제에 대한 일종의 보수 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87년 체제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른바 ‘경제문제’가 눈앞의 과제가 되면서 갈등의 지형이 퇴행하고 있다. 현재의 정치 지형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촛불혁명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갈등의 지형 자체를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 물론 짧은 시간 내에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성장, 고용, 복지의 관계가 이미 어긋한 시대, 제4차 산업혁명의 전망이 어른거리는 시절에 이는 꼭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10월호 통권62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