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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어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아서 쾨슬러의 소설 제목 『정오의 어둠』에서 따오는 것은 변주이긴 하지만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유토피아적 이념의 고양과 환멸이 교차했다면, 촛불혁명의 밝음은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어둠과 대조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추상적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구체적인 인격에 투사했지만, 일상의 삶은 추상적인 패러다임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는 사립 유치원 원장들이 가장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바로 재산권의 신성함이다. 물론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은 부동산이다.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들의 삶을 상관하지 않고 더 나아가 짓밟는 사태가 재산권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설령 많이 양보한다 하더라도 자기 노동에 기초하지 않는 재산권이 지배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런 사태의 배후에 신자유주의가 있다고 간단하게 말해 버렸을 것이다. ‘자유’라는 이름 아래 그 무엇보다 경제적 자유를 우선시하는 신자유주의가 기소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교육을 사유화/사영화하고, 토지와 주택을 절대적 소유로 바라보는 태도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환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도리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집단적 심성을 파악하는 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시인 김수영은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라고 노래했지만,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식민지, 분단, 전쟁을 거치면서 이 땅에는 그 어떤 도덕적 준거점도 남지 않고 오직 개인과 ‘가족’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개인주의가 가장 강한 나라가 미국이라 할 수 있는데, 미국의 경우 개인주의가 하나의 이념인 반면 우리의 경우에는 강요된 삶의 태도라는 점이 차이다.

사실 우리에게 이념적 지표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근대화/산업화, 민주화, 통일 등이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보다 하위 범주로 진보, 복지, 인권 등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어느것도 이 정치체의 ‘좌표’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저 돈과 땅에 대한 사랑만이 넘쳐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기에 절차적, 추상적 민주주의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준거점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땅에서 진보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헌법 애국주의’에 기대고 싶은 유혹이 들 것이다. 하지만 헌법이 사회적 관계를 규제하는 틀이라 해도 이 틀은 다시 사회적 관계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 할 때, 헌법에 대한 호소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엇에 기초하여 사회적 관계를 바꾸려 해야하는가? 그것은 공동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노력에서 나올 것이다.

어떤 정치체의 공동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은 그 물질적 기초의 공동성을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은 토지와 자연자원, 사회적 생산 등에 대해 모두가 몫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는 거의 신성시되고 있는 재산권의 범위를 재규정하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현재의 정치적 지형을 볼 때 이는 새로운 ‘좌파’의 출현을 요청한다. 이 좌파는 낡은 체제의 위기에서 자양분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이제 출현하고 있는 미래에서 정당성과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새롭게 출현하고 있는 디지털 경제에 대한 지적 인식, 공동성의 실천을위한 도덕적 헌신,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 도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좌파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2천 년 전에 어느 랍비의 말을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니라면 누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이 일을 하겠는가?”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11월호 통권63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