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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악에 맞서는 정의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보면서 악의 진화를 알아차리고 악의 평범성 혹은 평범한 악에 대해 논구했다. 평범한 악은 추악하거나 기괴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종교적 악과 달리 범속하고 일상적이다. 아렌트는 평범한 악에 맞서 개별적 감수성인 양심을 내세운다. 아렌트 이후 악의 평범성 혹은 평범한 악은 어느덧 상식이 되었다. 우리와 한참 떨어져 있는 거대한 악만큼이나 일상 속에 악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다.

이런 상식에 맞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철학자 김진영은 “부드러운 악”이라는 개념으로 악의 평범성을 대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악은 “선과 악의 경계를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거나 도덕적 양심을 외면하는 그런 의지적인 악이 아니다.” 오늘날 악은 “선악의 경계가 지워진 악, 양심 자체가 이익을 따라서 선과 악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부드러운 악이다.”

김진영은 부드러운 악이라는 개념을 내세운 게 악의 평범성이 시효 만료되어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선과 악의 경계가 지워진 악을 어떻게 확인하고 어떻게 여기에 대처할 수 있는가? 선과 악이라는 구도는 불가피하게 경계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결국 경계를 짓는 일이 필요한데, 부드러운 악이라면 그만큼 경계 짓기가 어렵고 가능하다 하더라도 경계가 유동적일 가능성이 크다.

부드러운 악이라는 개념과 마주하면서 당장 세 가지 정도가 떠오른다. 권력의 절대적 부패 가능성이라는 고전적 테제가 첫 번째이고, 영구 혁명이라는 맑스주의적 테제가 두 번째이며, “단단한 모든 것은 연기처럼 사라진다”라는 근대성 테제가 세 번째다. 물론 이 테제들은 조금씩 수정해야 한다. 권력은 좁은 의미의 정치권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사이에서 작동하는 힘의 관계를 말한다. 맑스주의 전통 속에서의 영구 혁명은 정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공산주의사회를 종착점으로 한다.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면 인간관계로서의 사회는 불가능하며, 아무리 미끄러진다 하더라도 잠정적인 고정점이 필요하다.

다시 부드러운 악이라는 사태에 맞서기 위해 경계를 짓는 일로 돌아가면 지속적인 경계警戒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 물론 경계는 고발을 수반한다. 마키아벨리는 갈등과 대립의 사사화私事化를 방지하기 위한 공적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고발의 중요성을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대립과 갈등을 공개적인 공적 권위를 통해 해결할 수 없을 때 고발은 격심한 사회적 불안정의 요소가 될 것이다. 결국 문제는 공공성publicness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가다. 공적인 것을 가리키는 라틴어 publicus는 ‘성숙한’이라는 뜻의 pubes의 영향을 받아 사람 혹은 인민을 가리키는 populus가 변해서 생긴 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공공성은 인민의 성숙을 조건으로 하며 또 이를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인민의 성숙은 어디서 오며, 어떻게 가능한가? 이에 대한 근대적인 대답은 도야Bildung겠지만, 고대적인 대답은 정의의 실현일 것이다. 정의가 자리 잡을 때만 공적 권위가 유지될 것이고, 이럴 때에만 개인적인 도야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고대적인 의미에서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몫을 가지는 것이다. 이를 근대로 넘기면 소유와 분배의 문제가 될 것이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 그리고 공유에 대한 접근권과 공유부에 대한 몫의 권리 등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산에 대한 공적 통제가 필요하다.

이는 부드러운 악에 맞서기 위한 기반일 뿐이다. 하지만 이 기반이 사람들에게 자율적 시간 혹은 주권적 시간을 부여한다면 부드러운 악에 맞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는 소크라테스에 기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도덕적 감수성을 날카롭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8년 12월호 통권64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