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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4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식

양지혜 청년정치공동체 ‘너머’ 공동대표

세월호 4주기, 기억이라는 투쟁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세월호 침몰은 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검토된 비용이었다. 정부는 경제적 효용을 위해 운영 제한 규제를 완화했고, 기업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후한 선박을 부활시켰다. 이윤 앞에서 인간은 ‘감수할 수 있는 비용’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에게 펼쳐진 세계는 ‘깨어진 상식’의 세계였다. 우리는 책임지지 않는 국가를 보았다. 구조가 가능한 골든타임동안, 박근혜 씨는 침몰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박근혜 씨를 움직이게 한 것은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가 아니라 최측근인 최순실 씨의 연락이었다. 언론은 ‘전원 구출’ 오보를 낸 것으로도 모자라, 높은 조회 수의 특종을 위해 자극적이고 저열한 보도를 이어 갔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불안과 참혹함을 거름 삼아 보험 영업을 했다.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유가족의 투쟁은 정치권의 야합에 가로막혔다. 2014년 8월, 여야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빠진 특별법을 밀실에서 야합으로 처리했다. 2015년, 간신히 결성된 세월호참사특별진상조사위원회는 당시 여당 새누리당의 방해로 무력화되었다. 유족들이 간절히 외쳐 왔던 세월호 인양은 3년이 넘도록 이뤄지지 못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긴 시간을 차디찬 바다 앞에서 버텨야 했다.

2017년 4월, 홍준표를 제외한 대선 후보자들은 모두 안산으로 달려갔다. 후보들은 저마다 미수습자 수습, 진상 규명, 추모 공원 조성 등을 약속했다. 그간 특조위를 무력화하고 “세월호특별법보다 민생 문제가 우선”(2016년 4월 18일 국민의당 최고의원 회의)이라고 밝혀 온 정치세력들이 한 일이었다. 그렇게 세월호는 ‘기억’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4월, 우리는 한 치도 변하지 않은 세상을 마주한다. 1기 특별조사위원회를 방해한 황전원 위원이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임명되었다. 황전원 위원이 조사를 거부했던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이 밝혀지며 진상 규명은 간신히 시작되었을 뿐이다. 모든 후보가 약속했던 추모 공원 조성은 지역 야당의 반대로 난항을 겪고 있다. 안산 화랑유원지에 위치한 정부합동분향소는 4주기 영결식을 끝으로 철거된다.

세월호는 조금도 제대로 ‘기억’되지 못했다. 우리는 아직 이 참사가 무엇인지조차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기억하는 일은 투쟁이었다. ‘순수한 추모’만을 허용하는 세력에 맞서,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라’라는 요구에 맞서, ‘추모가 변질되었다’라고 선전하는 보수 언론에 맞서, 우리는 기억의 투쟁을 이어 왔다. 청년정치공동체 ‘너머’는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아, 기억의 투쟁을 이어 가기 위해 안산을 방문했다. 교육청 옆으로 이관된 기억교실을 찾았고, 영결식이 끝나고 나면 철거될 정부합동분향소를 들렀다.

여느 때와 다르게 기억교실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기억교실은 수학여행 전 날까지 피해자들이 머물었던 흔적, 피해자를 그리워하고 참사를 추모하는 이들의 메시지로 가득했다. 한 반에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희생자가 되었다. 방명록에는 유가족들의 방문 편지가 남아 있었다. 문장을 다 마무리하지 못한 채 눈물로 얼룩진 편지가 있었다. 기억교실은 한 번 이전했던 역사가 있다. 참사 이후, 더 이상 교실을 존속할 수 없다는 학교 입장에 따라 현재 교육청 옆 건물로 이전했다. 지난 2016년 교실이 이전될 때, 세월호 유가족들은 희생자들의 유품을 옮기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책상과 걸상을 옮길 상자를 설치하기 위한 차량에는 “이사”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새 교실에는 유품을 놓을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참사 이후에도 유가족들은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기억교실을 둘러보며, 내가 세월호 참사를 처음 만난 순간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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