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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을 위하여

해가 바뀌는 것이 자연적인 변화와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인위적인 구분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는 기억과 망각, 성찰과 구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시대』 독자들에게 기억과 망각, 성찰과 구상은 어떤 것일 수 있을까?

기억할 만한 것은 기본소득이 한 번 솟구쳐 올랐다 사라진 의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치적, 정책적 차원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경기도에 기본소득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내년에는 청년배당이 실시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망국적인 부동산 문제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안으로 국토보유세와 연동한 기본소득 제도가 분명한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농촌과 농업의 어려운 현실을 타개할 목적으로 여러 지역에서 ‘농촌/농업 기본소득’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더해 서울시에서 실시하겠다는 ‘청년 기본소득’과 같은 것도 그 내용과 상관없이 언급할 필요는 있겠다.

망각해야 할 것,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망각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건 기본소득 의제를 담아내고 실천할 적절한 정치적 틀과 통로를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아니 더 진솔하게 말하면, 조직적 실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조직 자체를 망가뜨리고 또 추스르느라 다른 것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상황을 망각하고 싶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은 기본소득 의제 자체가 목표로 삼고 있는 ‘자율적인 인간들’의 결사체로서의 정치 조직을 형성하지 못하고, 심하게 말하면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져 갔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의제와 충돌하는 낡은 관계들이라고 말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여러 번 여러 사람이 반복했기에 이제는 진부한 격언처럼 들리는 말이 떠오른다.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그러니 우리는 기억과 망각을 넘어 성찰로 넘어가야 한다. 잠시 숨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혹시라도 이것이 운명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라면 말이다. 인간에게 성찰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긴 하지만, 사실 성찰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점의 이동이 필요한 데, 성찰과 함께 탄생한 근대의 진리의 의지가 시점의 이동을 가로막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찰은 진리의 의지가 좌절된 곳에서, 평범한 말로 하자면 소수파에게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소수파의 좌절된 진리의 의지는 맹목으로 흐를 위험도 있다. 의지의 결사체가 낡은 유대로 전락하고 전략이 음모로 강등되는 상황은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우리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통과해야 한다.

성공한 혁명은 대중과 분리된 전위의 변증법적 결합을 통해서건, 함께 굶주리고 아파하고 싸우는 것을 통해서건, 융합의 파괴력을 통해서 가능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융합의 양식과 윤리가 바뀌었고, 이는 계속 바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로 말하려는 것, 완전고용, 노동조합, 복지국가 등이 시대의 토대이자 사회의 목표가 되는 시절이 지나갔다는 것을 다시금 인정하는 게 필요하다.

낡았지만 익숙한 것과의 이별, 닿지 못했지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한 환상의 섬에서 벗어나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삶이란 어느 한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그 과정 속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기억을 어떻게 이야기하는 가다.” 자연적 수명을 가진 인간이기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말처럼 현재를 구성하는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쩌면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누군가는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숙한 것이 비극이라면 시대착오적인 것은 희극이다. 그리고 희극이 시대를 드러내는 징후라면 비극은 미래를 향한 의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비극과 희극이 교차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대의 비극과 현대의 비극이 평행선을 이룬 비극의 대위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끌려가면서도 이를 거부하려 했던 페르소나와 자신의 힘을 믿으면서도 바로 그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스러져가는 캐릭터 사이의 충돌일 것이다. 물론 의지가 살아 있다면 그 충돌 속에서 그 의지는 다시 미래를 향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여전히 충돌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고, 여진이 있겠지만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의지를 살려내는 일일 것이다. 그러려면 불가피하게 내면의 소리를 듣는 연옥을 통과해야 한다. 그 충돌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고, 아마 진정한 의지는 거기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01~02월호 통권65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