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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인식과 새로운 문제

 

토머스 페인은 『상식』 머리말에서 “시간은 이성보다 더 많은 개종자를 만들어 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들에게 시간보다 더 강한 원군은 없는 것 같다. 비록 유토피아가 저 멀리 지평선에 아스라이 보일지라도 꾸준히 가다 보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만큼 강한 동력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태극기 부대와 자유한국당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5·18 망언’과 이를 부추기고 있는 인식, 의도, 발언 등을 보면 페인의 말이 꼭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가 진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뒤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커진다.

사실 5·18이 북한군이 개입해서 만든 폭동이라는 망언의 의도와 인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나라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반공을 기초해서 만들어졌다는 것과 분단의 초기 단계를 넘어서려는 폭력적인 시도였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유아기를 보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주도한 냉전-반공 세력이 이른바 개발독재 체제를 통해 지배력을 강화해 갔다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정통성의 문제이건 이념의 문제이건 아니면 일상생활의 문제이건, 체제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만큼이나 그에 대한 저항도 커졌던 것이 한국 현대사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5·18은 사실 하나의 비가역적인 지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이 몸으로 저항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따라서 아무리 군대의 힘으로 이를 억압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이것이 일시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최후의 수단을 장기적으로 막을 다른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전히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면, 그 진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이유로 1980년대 초반, 시절이 아무리 암울하다고 느꼈다 할지라도 커다란 충돌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고, 이는 1987년에 사실이 되었다. 이후 우리는 이른바 ‘87년 체제’에 살게 되었다.

87년 체제에서 냉전반공주의는 여전히 살아남았지만 최소한 폭압적인 군부독재는 정당성을 상실했고, 냉전-반공 세력은 새롭게 보수라는 이름을 걸쳐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서 보수주의가 그 적절한 내용을 갖추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에서 보수는 ‘친자본’이라는 지향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없는 벌거벗은 세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신자유주의 하에서 그럴 듯하게 포장된 것이 그들로서는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라는 인물은 자기 역사에서 보수의 기반을 확보하려 했다는 의미에서 보수주의를 나름대로 재건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당한 자기 역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 보수주의는 침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는 촛불혁명과 탄핵이라는 폭풍우에 휩쓸려갔다.

5·18 망언은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갈등의 축을 옮김으로써 자기 정당성과 자기 활동성을 확보하려는 냉전반공주의의 끔찍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든 지지 기반을 확보하려는 자유한국당에게 이는 강렬한 유혹일 텐데, 결국 ‘독이 든 사과’로 판명 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그 내용이 가짜라서만이 아니라 반공주의를 가능케 한 냉전이라는 지형이 세계사적으로는 철지난 것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조차 서서히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냉전의 원인은 꼭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 효과는 이념적이었다. 1989∼91년에 냉전이 끝나고 자유주의 이외에 다른 이념은 없다는 이념이 잠시 지배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트럼프주의의 발흥에서 볼 수 있듯이 지나간 일이 되었다. 아마 국제 질서는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지정학의 부활’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사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정학의 부활의 국내적 효과는 갈등의 축을 외부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국가 내부의 갈등의 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사회 양극화와 여기에 수반되는 사회적 지위의 변동 등은 해당 사회의 제도적, 문화적 배치 속에서 다양한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태극기 부대가 그저 냉전반공주의에 사로잡혀 거리로 나온다고 생각할 만큼 순진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에 더해 기존에 누리던 상상적, 실제적 지위가 무너지는 경험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며, 이는 어찌되었든 배출구를 필요로 한다. 태극기 부대와 5·18 망언은 이런 배출구가 퇴행적인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급격한 사회변동을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에서 감당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드는 완충제와 그 사회변동의 긍정적인 방향을 함께 모색할 수 있는 공론장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5·18 망언은 낡은 것이지만, 이러한 사태가 제기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03월호 통권66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