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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선택이다

앙드레 지드가 자신의 유일한 ‘소설’이라고 한 『위폐범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제도와 인습에 대한 반항뿐만 아니라 거짓된 세계 속에서 “진정한 삶과 의미”를 찾을 가능성 혹은 이를 위한 분투를 경험하는 일이 될 것이다.

과거에 반항해야 할 혹은 전복해야 할 제도와 인습은 좌파에게 꽤나 명료해 보였다.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라든가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혹은 “독점자본의 정치적 지배의 테러적인 형태”인 파시즘이거나 이것도 아니면 “부르주아지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집행위원회”로서의 국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1989∼91년 이후 이런 현대의 신화는 종말을 고했다. 물론 그 신화를 구성했던 신화소神話素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데, 이는 “맑스주의를 낳았던 상황을 넘어서지 않는 한 맑스주의는 우리 시대의 철학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했던 사르트르의 말과 비슷한 맥락에서 그러할 뿐이다.

계속해서 좌파라는 말을 사용하자면, 좌파에게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역사의 담지자 혹은 혁명의 주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혁명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노동자계급”이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전히 노동자가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회적으로 그만큼의 중요성만 있는 사회학적 범주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의미의 노동자마저 사라져갈 운명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 자칫하면 신화는 그 비극성마저 잃어버리고 희극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진정한 삶과 의미를 찾는 일이 세계와 분리될 수 없는 일이라 할 때 전복의 대상을 상실한 것은 삶과 의미를 구성할 틀을 상실했다는 것과 같은 일이 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 데도 계속해서 하던 일을 하는 것은 제도와 인습을 전복하는 일이 아니라 인습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인습의 포로가 된 것은 한편으로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신화와 정신적 사랑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육체적 패배 속에서도 지속되는 정신적 사랑.

육체적 패배와 정신적 사랑의 위태로운 동거를 끝내기 위해서는 사건의 경험 속에서 삶과 의미를 재발견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사건은 저절로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건을 경험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사건을 구성하고 사건 속으로 돌진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어떤 정향이 필요하다. 이 정향의 설정은 결단의 다른 말이기도 할 텐데, 이 결단이 불장난이나 가망 없는 도박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세계를 제대로 바라볼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앙드레 지드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던 외사촌누나를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는 흔히 말하는 신비주의적 사랑이었고, 이는 결혼한 이후에도 신비주의적 사랑의 행태, 즉 육체적 관계나 쾌락이 없는 정신적 사랑으로 지속되었다. 이런 정신적 사랑은 북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경험한 대지와 동성애의 발견이라는 대립적 상관물과 병치된다. 그리고 이러한 병치는 그의 정신적 위기의 지속적인 근거가 된다. 하지만 청년 마르크 알레그레와의 사랑, 이를 알게 된 아내 마들렌이 지드가 마들렌에게 평생 보냈던 편지를 불태워 버린 사건 등을 겪으면서 그는 1926년에 발표한 자서전을 통해 동성애 경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내가 편지를 불태운 사건은 앙드레 지드에게 해방이자 부채 청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청산해야 할 부채는 무엇이고, 맞이할 해방은 무엇일까?

사르트르를 다시 떠올리면 우리의 과거를 낳았던 상황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철학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몫은 여전히 남아 있겠지만 그것은 과거의 상황을 연장시키는 것, 새로운 상황을 지연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는가가 삶과 의미를 찾는 문턱을 넘는 일이 될 것이다. 비록 지옥의 문 앞에 서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04월호 통권67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