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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진실, 분개의 정치

 

세월호 5주년을 지나면서 거리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많아졌다. “기억 너머 진실로.” 세월호 사건 속에서 함께 아파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의미에 대해 회의하고 고민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 문구가 주는 의미는 작지 않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또 그 속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출발점으로 “진실”이 필요하기때문이다. 그리고 진실이 드러날 때 “기억”은 격정을 멈추고 온전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무뎌지는 게 아니라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리라. 하나는 세월호에 대해 끊이지 않고 나오는 폄훼와 왜곡이다. 지면에 옮기기조차 저어되는 모욕은 사건 자체를 넘어 인간성 자체에 대한 회의를 낳을 뿐이다. 다른 하나는 세월호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건의 총체적 진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러저러한 사실조차 밝혀진 것이 많지 않다.

하지만 진실에 대한 기대와 인간의 존엄에 대한 바람이 우리가 “기억 너머”로 나아갈 때 다가올 것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떤 기억을 가지는가에 따라 진실도 다르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기억은 하나의 틀이며, 가변적인 쟁점이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과 진실은 아마 왕복운동을 하면서 각각을 특유한 방식으로 구성할 것이다.

 

기억과 진실, 과거와 현재의 가변성은 5월 광주민중항쟁을 둘러싼 쟁투 혹은 그 역사적 사건의 이용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꽤 오랫동안 광주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자 한 “신군부”에 맞선 민주화 투쟁과 폭도들에 의한 무질서 사이에 형성된 전선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거대 서사 속에서 비무장 시민을 향한 무차별 총격이라든가 북한군과 간첩의 개입 등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등장인물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1987년 이후 민주주의가 수립되면서 광주는 이 나라를 만든 가장 최근의 민중 항쟁으로, 민주화를 향한 거대한 발걸음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물론 그 이후로도 항쟁 이후의 광주의 삶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핑계로 그 역사적 의미를 온전히 평가하려 하지 않거나, 이른바 흠집을 내기 위한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 형식적으로 광주항쟁을 부정할 수는 없었는데, 아마 우리는 여기서 민주주의 담론이 가지는 힘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광주의 운명을 감안할 때 최근에 도드라지게 보이는 광주에 대한 폄훼, 모욕, 왜곡은 의아해 보일 수도 있다. 당연히 첫 반응은 이럴 수 있다. “광주에 대한 평가는 이제 끝난 것 아닌가?” “도대체 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지?” 하지만 반복될 뿐만 아니라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은 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광주에 대한 폄훼, 모욕, 왜곡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오늘날 가짜 뉴스 혹은 사실 왜곡을 통한 대중 동원은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이를 “포퓰리즘”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을 텐데, 이때 포퓰리즘은 사회를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는 정치 전선을 구축하는 담론적 전략이다. 이 전략에는 다양한 소재와 정체성이 동원될 수 있고, 우리의 경우 분단과 반공주의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반공이 시대착오적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의 배치를 감안할 때 포퓰리즘적 동원 전략의 일순위인 것은 분명하다. 이런 이유로 모호할 것이 하나도 없는 북한군 개입설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포퓰리즘과 관련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동원을 위해 거짓 뉴스나 악의적 왜곡을 하는 발화자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듣는 수신자의 처지다. 오늘날 포퓰리즘의 발흥을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따라 경제적 손실을 입고 정체성 정치 속에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지위가 하락한 것으로 느끼는 사람들, 예컨대 백인 노동자계급의 “분개의 정치”로 설명하는 것은 이런 점에 주목한 것이다. 과거에 자신이 사회의 주역이었고 자기 목소리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때 분개의 정치의 조건이 형성된다.

따라서 이 조건을 바꾸는 것이 문제다. 정체성의 정치가 가져온 성취, 즉 어떤 집단에 속하는 것이 배제당하거나 차별받는 것이 아닌 일이 되게 만든 것을 보존하면서도, 정체성의 정치가 가져온 또 다른 분할선이 대립선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 필요한 일이다. 이는 결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공통성에 근거하고, 모두에게 동등하게 보이는 보편성을 설정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한때 자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가 특유하게 결합해서 적절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 시절이 있었다. 자본주의 황금기 혹은 복지국가 황금기라 불리던 때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양적 성장에 힘입어 주로 남성 시민에게 완전고용이라는 정책적 목표 아래 적절한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노동자-시민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여성은 배제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고, 오늘날 더 이상 양적 성장이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파괴적인 기술 변화가 진행 중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면, 과거처럼 노동자-시민의 구성으로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활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만약 기본소득이 모두의 것인 공유부에 대한 몫으로 정의되고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새로운 보편성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설정할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은 이해당사자-시민일 것이다. 이는 인민주권에 맞먹는 새로운 권리의 지평을 여는 일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05월호 통권68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