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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해방, 사회주의

 

얼마 전 한 라디오방송과 기본소득을 주제로 짧게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미리 받아 본 질문지에 적힌 내용은 꼭 필요한 질문이긴 했지만, 꼭 필요하다는 것은 이런 식의 인터뷰를 여러 번 했던 사람에게는 흥미가 떨어진 것이었다는 말도 된다. 그렇다고 해서 짧은 시간에, 그것도 어떤 영국 작가가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에서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는 전화를 통해 조리 있게 대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인터뷰가 끝나고 나면 누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이건 저렇게 대답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꼭 필요한, 다시 말해 흔한 질문 가운데 그렇지 않은 질문이 하나 끼어 있었다. 대략 질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소득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면 사회주의/공산주의와는 어떻게 다른가?’ 인터뷰 때에는 이 질문을 살짝 틀어서 ‘정의의 문제’로 바꾼 다음, “공유부에 기초한 기본소득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고전적인 정의의 원칙”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좀 더 시간이 많고 대면한 상태의 인터뷰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설마 농담이시겠죠? 사회주의/공산주의야말로 노동에 따른 분배에 충실한 사회입니다. 도리어 자본주의가 노동에 따른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사회죠.’

내 대답이 여기에 그쳤다면 특정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해 해설하는 일을 한 셈이다. 그러면서 진짜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바뵈프에서 시작하는 현대 공산주의는 ‘공동 소유, 공동 노동, 공동 향유’라는 원칙을 간직해 왔다. 물론 현실사회주의에서 이 원칙이 얼마나 철저하게 관철되었는지는 의문이다. 현실사회주의가 ‘전 인민의 소유’나 ‘국가 소유’라는 방식으로 공동 소유를 설사 실현했다고 하더라도, 실제 나타난 결과가 권력에 따른 위계와 불평등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권력의 문제, 국가의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형식적 소유의 문제와 상관없이 노동과정에서도 관철되는 문제였다는 것도 드러났다.

추상적인 수준에서 혹은 선동적인 수준에서 현대 사회주의/공산주의가 하고자 한 일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을 종식하고 진정한 인간의 역사를 열겠다는 것이었다면, 포스트자본주의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유토피아를 포함하지 않은 세계지도는 쳐다볼 가치조차 없다” 라는 말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의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1891년)은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글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사회주의가 “공동체의 각 구성원에게 물질적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다시 말해 “삶에 필요한 기반과 적절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주의다. 이때 그가 말하는 “진정으로 아름답고 건강한 개인주의”는 “그 누구도 재물과 재물의 상징들을 쌓아가는 데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오스카 와일드가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예술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예술이다. 그리고 그 기초가 개인주의다.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예술은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개인주의의 발현이다. 나는 심지어 예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개인주의의 발현이라고 말하고 싶다.”

20세기 최대의 아이러니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한다는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다시 억압적 체제로 바뀐 것이다. 물론 이 아이러니는 민중 혁명 속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해소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공산주의를 해방의 프로젝트라고 한다면 이 아이러니는 언제고 다시 등장할 것인데, 이때 우리는 어떤 방향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해결책을 찾기 위한 전제는 사회주의/공산주의를 공동의 향유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공동의 향유는 말 그대로 개인들의 삶의 토대를 확보하는 일이 된다. 물질적인 것을 말 그대로 물질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그 위에서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각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때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개인주의의 참뜻이 드러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로봇, 자동화 등에 대해 일자리를 빼앗긴다고 우려할 일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미 이렇게 선언한다. “마치 시골의 신사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풀은 자라나는 것처럼, 인류가 삶을 즐기면서 노동 대신 인간의 목적이 되어야 할 우아한 여가를 보내거나,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고 아름다운 것들을 읽거나 그저 세상을 관조하며 감탄과 기쁨을 느끼는 동안, 기계는 필요하고 힘든 일들을 모두 처리하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사회주의/공산주의는 20세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경제적 권력이기를 멈추고, 말 그대로 인간적 삶의 토대가 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07~08월호 통권70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