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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판결과 ‘권리들을 가질 권리’

‘포스트-’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이중의 고통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과거가 무겁게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미래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미래는 우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시작해서 포스트포디즘을 거쳐 포스트신자유주의를 지나 포스트자본주의까지. 여기에 포스트파시즘과 포스트트루스까지. 뭔가를 지나왔지만 여전히 그 속에 머물고 있으며, 세상은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지만 도리어 뒤로 떠미는 바람이 더 거센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뒤로 떠미는 거센 바람에 과거의 것이 실려 오면서 “귀환”이 포스트 시대의 주조인 것처럼 보인다. 직접적으로는 강제징용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치적 대응으로 시작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경제 전쟁’과 대중적, 민족적 대립은 역사적 잔해의 귀환이다. 물론 이 사태가 단순한 귀환은 아닐 것이다. 분명 여기에는 미래를 향한 불씨가 있다. 다만 역사적 잔해 속에 묻혀 있을 뿐이다.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누구 말대로 “지정학의 귀환”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장기적으로 자유주의적 국제 체제의 붕괴를 가리키는 지정학의 귀환은 중국의 부상, 러시아의 지역 패권 추구, 터키와 인도 등의 새로운 위치 잡기 등으로 나타났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전쟁할 수 있는 보통 국가’를 추구하는 일본의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태세 전환의 시도가 도드라져 보인다. 북한이 핵무장과 그 해결 과정에서 추구하고 있다고 알려진 “정상국가화”라든가 한국 정부가 이 속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 일본과의 대립 속에서 주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모두 지정학 속에서 행위자로서 자리 잡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당연한 일지만 이러한 지정학의 귀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민족주의다. 서구에서 근대국가가 ‘민족-국가’라는 특유한 형태를 취했고 20세기 이후 이것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낯선 일은 아니다. 지구화 속에서 민족주의의 시대가,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주장이 나온 바로 그 시점부터 에스닉과 종교 등 다른 갈등이 터져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의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적 침략의 이데올로기적 기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국가의 추구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억압적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민족주의의 귀환’은 봉인된 파괴적 힘이 풀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제국주의적 침략에 저항한 피억압 민족의 민족주의에도 예외는 아니다. 민족주의가 인류 공동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과도적인 단계라는 자유주의자들의 바람과 달리 민족주의의 일반화는 중첩된 갈등을 낳았다. 크게 보아 지배적인 민족일지라도 특정 지역에서 ‘소수민족’일 경우 억압을 피하지 못했으며, 제국주의에 지배받는 피억압 민족도 자기보다 하위에 있는 민족 집단에 대해 제국주의와 유사한 태도를 보였다. 이른바 민족 내부에서는 민족 대 반민족의 이름으로 소수자나 반대파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일본과의 대립 속에서 기술 자립을 위해 노동조건의 악화를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든가, 불매운동에서 민족(?)자본에 대한 옹호가 나타나는 것은 위에서 말한 우려가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격렬한 싸움은 가끔 그 싸움이 왜 일어났는지를 잊게 한다. 한일간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도 비슷한 양상이다. 하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원인을 빼고 해법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직접적 발단은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에 대해 해당 일본 기업에 손해 배상 판결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쟁점은 강제징용 자체가 있었는지 여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 한국이 받은 3억 달러의 성격, 그리고 이것으로 개인들의 청구권이 소멸했는지 여부다.

우선 강제징용 문제는 두 가지 다른 쟁점을 제기한다. 하나는 일제강점기 식민지민의 법적 지위에 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 중첩되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 어떤 체제 하에 살던 개인이 인간으로 누려야 하는 권리에 관한 문제다. 1910년 대한제국과 일본은 “한일병합에 관한 조약”을 맺어 대한제국 전체에 관한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양여하기로 한다. 이로써 한국 인민은 법적으로 일본 황제의 신민이 되었다. 이런 사태가 1965년 이후 무효화되긴 했지만, 한국은 원천 무효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일본은 당시에는 유효했으나 대한민국 수립 이후 무효화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당연히 이는 일제강점기 한국 인민의 ‘강제동원’에 대한 입장 차이를 수반한다. 하지만 설사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에 대해 ‘합법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하더라도, 강제징용된 개인의 권리까지 무효화될 수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이런 개인의 권리를 통치권과 무관한 차원에서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통한 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는 개인의 권리와 관련해서 좀 더 일반적인 시사점을 준다. 두 나라는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도 맺었는데, 일본은 이로써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본다. 여기에는 청구권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국가 간의 조약으로 개인의 권리가 무효화될 수 있는가라는 쟁점이 있다. 청구권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관련이 있는데, 앞서 보았듯이 양국 사이에는 여전히 이견이 있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일본 측에서도 국가가 가지는 외교 보호권을 포기한 것이지 개인의 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 의미로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외교 보호권의 포기와 개인 청구권이 유효함은 양립가능한 일인가? 여기서 우리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깨달음과 마주한다. 20세기의 가장 특유한 정치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말처럼 상황과 우연의 결과물로 미국으로 건너가 1951년에 미국 시민이 될 수 있었지만, 그 이전까지 거의 20년간 국적 없는 난민으로 살았다. 이 경험 속에서 그는 권리들을 가지려면 단지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체험했다. 권리를 가지려면 인간은 우선 정치공동체의 일원이어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구체적인 권리들에 앞선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확인할 수 있다.

아렌트의 이런 깨달음은 근대의 인간의 권리라는 주장이 가진 추상성을 드러내며, 현실에서 이것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말해 준다. 물론 한나 아렌트가 “권리들을 가질 권리”에 대해 말한 바로 그때부터 인간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제적인 제도와 활동의 발전이 있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적 없는 사람들과 난민들은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글로벌 자본주의 아래에서 설사 정치공동체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게다가 오늘날 지정학의 귀환은 ‘민족-국가’와 민족주의의 이름 아래 정치공동체 내부에서 많은 사람의 권리를 박탈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강제징용 손해 배상 판결은, 어느 정도로 실효성이 있을지 아직 모르지만, 최소한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려 주는 의미 있는 일이다.

누구나 과거를 딛고 내일로 나아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특히 동아시아 세계에서 일본의 침략과 만행으로 벌어진 과거사에 대한 청산 없이 의미 있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때 청산은 국가 대 국가 사이의 관계 재설정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극단의 시대이자 진보와 야만이 교차한 지난 세기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어떤 정치공동체도 모든 사람의 좋은 삶을 보장하지 않고서는 존재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보고 있는 인권의 목록이다. 하지만 그러한 인권 자체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다시금 정치공동체가 필요하다고 할 때, 그리고 그러한 인권 자체가 다시금 후퇴한다고 여겨지는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19세기에 프랑스의 종교사가인 에르네스트 르낭은 민족을 “나날의 국민투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오늘날 인간의 권리, 이 권리를 보장한다는 정치공동체도 이와 같은 것은 아닐까? 권리들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공동체를 나날이 형성하는 투쟁이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보장하고 행사하는 길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어떤 권리를 가진다는 주장은 그러한 권리를 위한 투쟁 속에서만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09월호 통권71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