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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편이냐? 그리고 너는 어떤 길을 걸어왔느냐?

1960년대 미국에서 반전운동이 거세질 때 이런 노래가 있었다. “너는 어느 편이냐?” 1980년대 격동의 시대가 지난 후 한국에서 어느 시인이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고 노래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전선이 분명했지. 그리고 각자가 그 전선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전선에 오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묻지 않았지.’

지금은 둘 다를 묻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조국 법무부장관 가족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고, 또 조국 법무부 장관 자신에 대해서는 그가 서 있는 자리와 그가 걸어온 길이 부합하는지를 묻는다. 그러면서 그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묻지 않는다. “검찰 개혁”이라는 말이 허공에 맴돌 뿐이다.

1960년대의 미국과 오늘날의 한국은 분명 다르다. 베트남에서는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투하했던 폭탄보다 더 많은 폭탄이 터지고 있었다. 이때 “너는 어느 편이냐?”라고 묻는 것은 거리감은 있었을지언정 가상에 기초한 질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우리 편 아니면 저쪽 편”이라고 하는 단정은 다양한 욕망과 전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성립하는 상상적 질문의 폭력이다.

물론 “검찰 개혁 대 법무부 장관 사퇴”라는 구도 속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은 순진하거나 적의 편을 드는 말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편에 서는가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전선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그 전선에서 싸워서 얻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도 최소한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시절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에게 서 있는 자리만큼이나 걸어온 길이 중요하다며 물을 때, 거기에는 분명 세대 논쟁이 있다. 데이터에 기반한 복잡한 사회학적 논구를 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386세대”라고 부르는 특정 연령층이 사회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여기에는 두 가지 반론이 가능하다. 하나는 인간의 생물학적 순환에서 특정 시기에 특정 연령층이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 혹은 운fortuna이 특정 연령층에 그런 행운의 결과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령 변수를 제거하더라도 386세대가 ‘과잉 대표’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또 역사나 운명의 여신이 벌인 장난이었다면 그건 온전히 자신의 몫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대학 학생들이 “공정”이라는 구호 아래 벌이는 움직임이 달가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가 공정을 말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이 그럴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해야 한다. 좀 더 나은 조건과 그렇지 않은 조건 사이의 공정은 더 큰 사회적 그림 속에서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에 불과할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새로운 사회 연대성의 수립이 필요할 텐데, 그 기반은 시민성의 보장이다. 시민성의 보장은 모든 차별의 금지와 삶의 보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는 사회적 권리를 복지국가 황금시대에 서구가 보장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원리적인 의미에서 근대성의 확보가 필요하다. 개인의 해방이야말로 근대성의 원리라 할 수 있는데, 오늘날 한국 사회는 다양한 연원이 있는 전근대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근대성의 확보를 위해서는 법률적 조치뿐만 아니라 “문화 전쟁” 또한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문화 전쟁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라도 시민성의 보장이 필요하다.

그러니 “너는 어느 편이냐?”라는 질문에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나는……”이라고 대답할 용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10월호 통권72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