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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의 행진(!)

유신 독재를 펼치던 박정희가 암살당한 10월 26일이 한국 현대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보다 70년 전 같은 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보다 적을 것이다. 또 그보다 35년 전에 공산주의 혁명가 이재유가 청주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일 것이다.

우연일 수밖에 없는 날짜를 이렇게 늘어놓는 것은 2019년 10월 26일이 또 다른 역사적인 날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날 서울을 비롯한 전 세계 25개 도시에서 기본소득 행진이 벌어졌다. 더 이상 거부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행진을 벌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날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사실 부당한 것에 저항하기 위해, 정당한 요구를 성취하기 위해 사람들이 행진을 벌이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1930년 간디가 주도한 소금 행진이나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유명한 1963년의 워싱턴 행진이 유명한 예이지만, 이외에도 무수한 행진이 있었다.

이렇게 피억압자 혹은 인민이 자신의 신체를 사용해서 어떤 발언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다른 통로가 없거나 통로가 있는 경우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민주주의 이전pre-democratic이거나 민주주의 이후post-democratic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니면 특정 집단이 사실상 배제되어 있다고 느낄 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최근 이른바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포퓰리즘”이라고 지목하는 현상은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인민이 주권자라고 말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인민의 의지를 대변한다고 하는 엘리트가 이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할 때 거리의 정치가 등장한다. 한국에서 지금 촛불과 광장의 정치가 벌어지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엘리트가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었인가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진전 속에서 끊임없이 악화되어 온 경제적 상황이 있다. 전후 복지국가를 뒷받침해 온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실업자가 늘었고, 일자리가 생겨도 낮은 임금의 질 나쁜 일자리였다. 이런 경제 상황은 디지털 경제로 표현되듯, 기술은 분명 날로 발전하는데 자신들은 뒤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되었다. 또한 지구화 속에서, 그리고 지정학적 충돌 속에서 이민과 난민의 물결이 위기라고 표현될 정도로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이민과 난민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게다가 낯선 외부인의 등장으로 주류의 전통적인 가치와 문화가 파괴된다는 감정을 낳았다. 이런 조건은 주로 우파 포퓰리즘의 발흥이라는 상황을 낳았고, 2016년 브렉시트 결정과 트럼프의 당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유사한 양상을 볼 수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포퓰리즘은 기성 정치계급에 대한 불신과 공격 속에서 등장했다. 한국의 경우에도 기성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경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의 포퓰리즘적 에너지가 주로 기성 정치를 수호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는 포퓰리즘이 기성 정치세력의 권력투쟁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기성 정치세력은 조심스럽지만 포퓰리즘을 하나의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렇게만 볼 수 없는 대중의 열망이 있는데, 이는 통상 “정치 개혁”이라 불린다. 현재는 “검찰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넓게 보면 비대한 정치권력, 공정하지 못한 룰과 공정하지 못한 법 집행,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담합과 융합, 권력의 사적 이용 등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거나 “문화 전쟁”을 벌이지 못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검찰 개혁은 분명 성취되어야 할 과제이며 선거법 개정 등 몇 가지 정치 개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문제는 개혁의 방향일 것이다. 공수처가 다른 나라에 유례가 없는 것이 아니라,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기소 독점주의와 기소 편의주의를 모두 누리고 있는 게 유례가 없는 일이다. 수능 시험이 그 나름 훌륭한 제도이고 수시로 선발하는게 다양한 교육과 균형 잡힌 선발을 가능케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개혁의 쟁점은 공수처를 설치한 것인지 말 것인지, 정시냐 수시냐 같이 옆길로 벗어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 사회 전반의 문화와 구조를 그냥 놓아둔 채로는 개별 정책이 아무리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고립된 섬처럼 제 기능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혁명으로도 사회 전반의 문화와 구조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혁명이건 개혁이건 인민이 실질적인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닐 때 전통과 인습이라는 이름의 끈질긴 힘은 언제든지 살아나고 인민의 삶을 무너뜨리려 한다. 이제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인민의 힘 가운데에서도 경제적인 힘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주목을 받는 공유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본소득운동은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힘을 주어야 한다는 운동이다. 이런 경제적 힘은 사람들에게 자율성을 줄 것이고, 그렇다면 좁은 의미의 정치 개혁보다 넓은 사회 전반의 변화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기본소득 행진은 이런 힘을 스스로 찾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몸짓이다. 이런 점에서 2019년 10월 26일은 역사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니 역사적 의미가 있는 날이 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11월호 통권73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