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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포퓰리즘

시대 74호(2019/12)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을 지나면서 정권에 대한 일종의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아무런 대책도, 자신에게 맞는 색깔도 보여 주지 못하는 자유한국당이나, 도대체 알 수 없는 정신세계 속에서 사는 극우파 집단의 공격은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이 정권을 지지했거나 최소한 이 정권이 자기 논리에 충실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착잡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지난 2년 반 동안 이 정부가 실행했던 정책이나 보인 태도가 누군가에게는 배신으로 느껴지며, 또 누군가에게는 나쁜 쪽으로의 방향 전환을 보인다. 또 누군가에게는 이 정권의 본질이 드러난 것일 뿐 대단한 어떤 일이 일어난 게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비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모름지기 비판이란 비판의 대상을 적절한 위치에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약속 위반이거나 방향 전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가장 크게 내세운 이른바 소득 주도 성장의 형해화가 있다. 이는 소득 주도 성장하면 최저임금 인상이 떠오를 정도로 다른 정책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이 넚은 의미에서 노동소득분배율을 높이기보다는 영세자영업자를 압박하는 양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득 주도 성장은 ILO 등이 주장한 임금 주도 성장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으며, 이윤 주도 성장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수요 중심 성장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요의 기반이 되는 임금을 높이기 위해서는 최저임금 인상도 필요하겠지만, 노사 간의 협상을 통해 임금 인상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노동조합 조직률,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법 제도 등이 포함된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에만 몰두하지 말고 노동계의 힘이 커질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경우 소득 주도 성장이 이루어지려면, 노사관계뿐만 아니라 대기업 대 중소기업으로 대표되는 불공정거래의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다수를 고용하는 중소기업의 재정 여력이 확보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약탈적인 금융 부문의 통제, 소득의 많은 부분을 잠식하는 부동산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얼마 안 되는 혜택마저 오른손으로 주소 왼손으로 빼앗는 꼴이 된다. 그런데 이 정부는 이와 관련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정반대로 했다. “(정부가) 국민 가슴에 가장 상처를 준 것은 부동산”이라는 말을 이 정부의 주요 인사가 하는 상황이다.

이 정부가 해야 했던 일 가운데 하지 않은 일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장 간단한 이해 방식은 이 정권의 담당자들이 ‘좀 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만들고 싶었으나 이마저도 할 용기가 없었거나 무능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무능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있다. 소득 주도 성장을 말하면서도 최저임금 인상 외에는 별다른 정책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물론 여기에는 조기 대선으로 인수위 설치 등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상황 논리가 더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용기가 없었단고 말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여기서 용기는 그저 정서적 고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의 현실을 맑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태도이고, 이에 따라 오래된 인습으로 보자면 낯선 것일지라도 받아들이는 것이며, 무엇보다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플랫폼 자본주의라는 변화된 상황,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한국적인 ‘천민적 자본주의’의 모습, 기후위기라는 비상사태 등이 시대의 현실이라면, 이에 대한 처방도 이 사태를 잘 이해하는 속에서 나와야 하지 않을까?

위와 같은 양상 속에서 불평등을 줄이는 첫 번째 방법은 마틴 루서 킹이 말한 것처럼 소득을 직접 보장하는 것이다. 이 정부가 이런 길로 나서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정신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일자리를 통하지 않는 소득의 이전은 말 그대로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만 한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런 소득 보장에는 상당한 돈이 들며 이를 마련하는 길은 결과적으로 부유층이 더 많이 부담하는 것이 될 텐데, 이를 강제할 경우 성장이 안 되거나 반발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다.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도 소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때에 따라서는 기만적이기까지 하다. 그레타 툰베리의 호소가 천둥소리라면, 베네치아의 침수는 기후위기의 소나타가 이미 2악장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0%까지 늘리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 물론 이마저도 화석연료 동맹 세력의 반발 속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현 상황이다.

한국의 여러 난맥상을 개혁할 수 있는 검찰 개혁이나 정치 개혁의 과제도 마찬가지다. 마치 공수처가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하거나 비례대표를 겨우 75석으로 늘리는 안건조차 불안해하면서 처리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도대체 이들이 정치를 왜 하는 것인지, 위임받은 권력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닌지 등등 수많은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몇몇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사태가 이러니 주당 52시간 노동의 후퇴는 당연한 일인 듯 지나가고 있고, 아마 사회경제적 후퇴 속에서도 그나마 지지를 얻었던 일본과의 대립도 지소미아 종료 연장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꼴로 끝날지 모른다.

이런 비난을 늘어놓은 것은 그저 문재인 정보의 용기 없음을 비꼬기 위해서가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용기 없음은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한 데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래도 남은 문제가 있다. 왜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가? 무엇이 이를 가로막고 있는가? 그건 아마 이 정권의 탄생 배경에 있을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권의 탄생과 유지에 대한 정권 자신의 인식이다.

이 정권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고 ‘노무현 정권 2.0’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정권의 탄생과 유지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연료로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가 되는 과정이나 탄핵을 넘어서고 다수당을 형성하는 과정 자체가 흔히 ‘포퓰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열망을 올곧은 방향으로 가져가지 못한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노무현의 유산이 남은 것은 그가 성공과 실패 모두를 짊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그늘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와 유사한 과정을, 아니 더 폭발적인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하지만 반복은 언제나 차이 속에서 나타날 뿐이다. 그 차이는 상황의 변화를 제외하면 지난 정권이 무엇을 잘못했는가에 대한 자기평가에서 나온다. 그건 추측건대 한국 사회의 주류를 포획하지 못했다는 인식일 것이다. 그리고 개혁을 추구하되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는 인식일 텐데, 이는 사실상 하지 않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큰 위태로운 길이다.

물론 이 정부에만 현 상황의 책임을 묻는 것은 편파적인 일이 될 것이다. 여기 말하고 싶은 것은 박근혜 정부를 물러나게 하고 현 정부를 만드는 데 사실상 원동력이 된 촛불혁명의 폭력성이다. 여기서 ‘폭력성’은 대중의 삶의 요구를 오직 탄핵과 정권 교체라는 방향으로만 몰고 가는 그 내용을 문제 삼지 않는 양상을 말한다. 물론 그 배경에는 한국 사회 주류의 비뚤어진 자화상이 있다. 그 어떤 공통성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사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헤게모니 없는 지배’를 행사하고 있는 집단의 초상 말이다. 이 속에서 대중의 에너지는 결국 제도 내에서 엘리트 집단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물론 가끔은 퍼팅할 때 카메라를 터트리거나 기침을 하는 예의 없는 갤러리가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다이내믹하긴 하다.

이렇게 보면 현 정부는 어떤 때는 세련되게, 또 어떤 때는 수줍게 포퓰리즘을 동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에너지를 절대로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가져가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스타일에서는 포퓰리즘이나 이데올로기 혹은 민주주의의 병리학으로서의 포퓰리즘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악의 포퓰리즘이다. 민주주의를 심화하거나 확대하는 것도 아니고 한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도 아닌, 오직 정권의 유지에만 봉사하는 포퓰리즘.

반복은 차이 속에서 나타나며, 앞의 것이 비극이었다면 그다음 것은 비극이 아니라 소극笑劇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것이 필연적인 일은 아닐 텐데, 소극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대중의 에너지를 흐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록 그것을 자기가 통제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19년 12월호 통권74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