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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동부터 조국까지, 인사청문회로 드러난 ‘인싸’의 세상

김태호 박종철출판사 대표

조국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우여곡절 끝에 임명 직전에야 열렸다. 여느냐 마느냐 다툼이 있는 와중에 집권당과 후보자는 국회 본청에서 청문회가 아닌 기자간담회를 열었고, 야당은 반박 기자간담회로 대응했으나 결국 청문회를 열기로 합의하게 됐다. 법으로 정해진 기한에 쫓겨 열린 청문회였고, 여야 합의로 채택한 열한 명의 증인 가운데 한 명만 출석했다.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 검찰이 후보자의 가족을 기소하는 일도 벌어졌다. 대통령은 “의혹만으로 임명 안 하면 나쁜 선례”라며 임명을 강행했다.

조국 법무부 장관의 임명을 둘러싼 논란, 임명 이후에도 검찰 개혁과 관련하여 또는 장관과 그 가족에 대한 수사와 관련하여 이어지는 논란, 또는 임명 철회를 요구하는 야당의 이러저러한 움직임 등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아니다. 이 글은 이제까지의 인사청문회 제도 자체와 인사청문회를 통해 국민이 알게 된 것, 특히 조국 후보자 청문회를 통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을 확인하려 할 뿐이다.

어쩌면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을 굳이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이유다.

5공 청문회의 추억

대한민국 국민에게 국회 청문회의 시작은 인사청문회가 아니다.

조금 오래된 이야기에서 시작하기로 하자.

1988년 12월,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의 청문회가 열렸다.

1987년 6월까지 이어진 국민의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민주정의당은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승리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치러진 1988년 4월 총선에서 민주정의당은 299석 가운데 125석을 얻었다. 일반적인 안건도 단독으로 통과시키기에는 25석 부족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이른바 “여소 야대” 국회였다. 아울러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70석,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59석,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35석 등, 대통령 후보로서 경쟁했던 네 후보가 각각 이끄는 4당 체제의 국회였다.

서울올림픽이 몇 달 뒤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올림픽을 탈 없이 개최하려면 대통령과 여당은 야당들에게 무언가를 양보해야 했고, 지난 정권이 저질렀던 일을 파헤치는 청문회의 개최가 합의됐다. 1988년 6월 15일 「 국회법」 개정으로 청문회는 법률적으로 준비를 마쳤다.

협상의 결과, 5공 청문회는 올림픽이 끝난 뒤 열렸다. 1988년 11월 2일에 시작된 청문회는 여당의 방해로 흐지부지되었지만, 1989년 12월에 다시 청문회가 열렸다. 그해 마지막 날 국회는 강원도의 한 사찰에 머물며 버티던 제5공화국의 유일한 대통령 전두환을 청문회장으로 불러냈다. 당시 초선의 야당 의원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을 “청문회 스타”라 부르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청문회에서 밝혀진 혐의로 인해 여럿이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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