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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당을 위한 변명(?)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세월의 흐름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내는 인내와 영원한 사랑에 대한 찬사로 흔히 읽힌다. 하지만 첫사랑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그 남자가 죽을 때까지 51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그리 간단치 않고 절대로 낭만적이지 않다. 51년 동안 첫사랑을 기다리는 플로렌티노는 결혼만 하지 않았을 뿐 수많은 여성과 사랑을 한다. 하지만 페르미나를 지워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첫사랑 페르미나에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 재물과 명예를 추구한다. 페르미나는 남편인 후베날과 사실 잘 어울리는 사이는 아니다. 페르미나는 사랑이 넘치는 여자이나 후베날은 따분한 가부장적인 남자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시간이 약인 것처럼 두 사람은 생활도 애정도 깊어진다. 그러면서 첫사랑 플로렌티노도 잊고 산다. 그런 그녀 앞에 남편이 죽자마자 나타나 사랑 고백을 하는 플로렌티노는 의심스러운 사람이다. 하지만 둘은 다시 가까워지고 “영원한 허니문”인 여행을 떠난다.

재난 혹은 비상사태가 정상상태가 될지도 모르는 신종코로나 감염증의 대유행(팬데믹) 시대에 기본소득당 같은 이름 없는 정당이 이른바 선거 연합 정당 혹은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이라 불리는 더불어시민당에 합류하여 한 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뛰어든 것은 그리 대단한 일도, 그렇게 주목할 만한 일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에는 몸에서부터 나오는 분노로 삶이 부정당할 일이고, 또 누군가에는 손쉽게 비난하고 지나칠 일이며, 또 어떤 이에게는 이제 우리에게도 국회 연단에서 말할 수 있는 스피커가 생기는 일이라 다행인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수많은 결의 마음이 만나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하면서 흐른다.

오래전에 나는 “지난 사반세기 넘게 한국의 진보 운동은 자신이 함께 만들어낸 87년 체제 속에서 한편으로 87년 체제를 넘어서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 87년 체제 속에 자리 잡기 위해 분투해 왔다”라고 쓴 적이 있다. 당시는 진보신당(+사회당)을 좌파정당으로 전환하고 민주노총을 좌파노총으로 바꾸려는 프로젝트가 막 시작된 때였다. 이 프로젝트는 20세기 좌파운동이었던 진보정당, 조직된 노동자계급에 저마다 근거를 두었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과 결별하고, 조합주의적 성격을 띨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낡아 버린 20세기 사회주의 이념을 자신의 조합주의-개량주의를 가리는 무화과의 잎사귀로 사용하는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었다. 당시 여기에 좌파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인간의 절대적 평등과 사회적 평등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며, 다른 하나는 당대의 과제에 대한 실현 가능한 가장 급진적인 대안의 제시가 근대 역사에서 좌파의 고유성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정책이자 새로운 결집의 구호로 기본소득을 내걸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충분히 논구하기 어렵지만, 이 프로젝트는 실패하기도 하고 좌초하기도 했다. 물론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외면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근거 있는 비판은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리고 배신당한 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실패와 좌초의 궤적에서 지금 기본소득당을 창당한 그룹이 시도한, 노동당의 기본소득당으로의 당명 변경은 돌이켜 보면 절망적 시도였다. 절망적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듯이 퇴적된 낡은 힘의 강함에 관한 것이며, 그래도 시도였다는 것은 자기 그룹의 유지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물론 현실정치에서 두 측면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고 결국은 탈당을 위한 명분이 되었다.

그 이후 기본소득당이 창당되었다. 87년 체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소수의 “좌파”가 제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분투일 수 있으며, 의제라는 점에서 보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파일럿램프를 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분투이건 파일럿램프이건 다음으로 이어질 자원, 전략,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이 지점에서 기본소득당 사태(?)로 이어지는 정치적 판단이 사람들에 따라 갈라졌다. 어떤 사람들에게 기본소득당은 새로운 세대가 새롭게 만든 좌파정당 혹은 진보정당이며, 기성의 보수적인 혹은 부르주아적인 정당과 분명하게 다른 지향과 원칙이 있고, 이는 현재가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실패 혹은 좌초한 과거 프로젝트가 새로운 순환을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좌파가 살아남는 방법이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제도 속에서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애써 켠 파일럿램프 자체가 꺼지는 일이며, 이는 전망 자체를 아예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다. 이런 서술이 누군가에게는 정말로 변명으로 들릴 것이고 또 누군가에는 너무 건조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이런 식의 설명도 있다. 기본소득당은 좌파정당이 아니라 확장과 도약을 위한 플랫폼 정당이다. 비록 이 정당을 좌파가 주도해서 만들었으나 정당 자체의 성격이 그러하기 때문에 보수적인 혹은 부르주아적 세력과 연합하는 게 가능하다. 분석적인 설명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소득당을 주도하는 그룹이 좌파에서 연원하며 여전히 그 색깔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노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위안이 되는 설명은 아니다.

 

현재 유일하게 분명한 것은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기본소득당의 선거 연합 정당 참여 의사를 듣고 “나라면 그런 판단을 하지 않겠지만 그들은 할 수도 있겠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덧붙였다. 이 사달 속에서 “기본소득당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누군가는 기본소득당이 얻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이 될 수도 있는 특정 정치인이 얻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대차대조표는 이 일을 비난하는 사람이건 그래도 지지하는 사람이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이로 지향을 나눌 수는 없지만, 이번 사태 속에서 겉으로는 그렇게 드러나고 있다. 개별적으로나마 좌파의 자리를 지키려는 나이 든(?) 사람들과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젊은 사람들로.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집단으로서의 좌파는 죽었다는 것이다. 좌파의 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재배再拜하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기약 없는 길을 떠날 일이다. 함께 죽지 못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떠도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영원한 사랑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간단치도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으며 보장되어 있는 것도 없다. 유일한 희망은 귀환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물론 이 희망은 의지가 필요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어느 것도 희미하다.

정말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그동안 「책 머리에」를 통해 특정 독자를 겨냥한 혹은 특정 독자에게 호소하는 글을 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거리를 두고 보고 좀 더 일반화된 시각에서 사태를 다루려 노력하긴 했지만, 특정 독자와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위치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꼭 이번 사태 때문은 아니지만, 그런 위치 속에서, 어떤 지점을 겨냥한 글은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 새로운 위치를 확보하는 일이 필요할 텐데 앞서 말한 것처럼 희미하다. 시대의 폭풍우를 앞두고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20년 04월호 통권77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