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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의 역사적 운명

지난 5월 19일, 독일 메르켈 총리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온라인으로 합동 기자회견을 열어, 5천억 유로의 유럽 공동 구제기금을 조성하는 데 합의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십 년 동안 우리가 보던 유럽의 모습, 즉 이른바 북유럽과 남유럽의 긴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유럽의 단결과 공동 대응을 가져온 것이다. 이렇게 된 배경은 그 자리에서 메르켈 총리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상한 상황은 비상한 조치를 요구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라는 비상한 상황에서 나온 비상한 조치 가운데 하나는 모든 사람에 대한 긴급한 현금 지원이다. 홍콩에서 시작해서 미국, 한국, 일본 등이 이런 조치를 취했거나 취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된 하나의 이유는 어려운 상황에 맞서 사람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적절한 제도가 이런 나라들에는 취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점은 상황에 맞추어 긴급하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어떤 정책도 진공상태에서 논의되거나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상황에 맞는 적절한 판단과 행동이 정책 실시의 주요한 경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 지지자가 “비상사태 기본소득Emergency Basic Income”을 주장했지만, 현 상황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가장 활발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재난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의 긴급 지원이 실시된 곳은 한국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앞서 말했듯이 소득보장 제도가 취약하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재난 상황은 소득보장에 대한 열망을 자극했고, 이는 기초연금과 아동수당 실시의 경험과 겹쳐져서 보편적인 권리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런 열망을 기본소득이라는 기표로 고정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다. 이는 기본소득 연구자, 운동가, 정책가 등의 업무였다. 기본소득당에서 시작해서 LAB2050, 시대전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그리고 여러 개인이 이 일을 담당했다. 이들은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무차별하며 무엇보다 긴급한 대처가 요구되기 때문에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을 원칙으로 하는 기본소득 방식의 지원이 가장 적합할 뿐만 아니라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재난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고정되게 만들고 이후 한국의 복지체제가 기본소득을 포함해야만 한다는 방향으로 논의가 가게 만든 것은 정치가들의 몫이었다. 경남의 김경수 지사는 그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상징성으로 인해, 경기의 이재명 지사는 수행 능력으로 인해, 재난 기본소득을 중심적인 의제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총선이 지난 지금 기본소득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지형이 바뀌었다.

 

이렇게 몇 년 전만 해도 진기한 아이디어에 불과했던 기본소득이 아젠다 테이블의 중심으로 진입하자 이에 대한 노골적 반대도 당연히 따라 나오고 있다. 이 반대는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3년 전에 있었던 작은 논쟁의 반복이기도 하다. 대통령 탄핵 이후에 벌어진 2017년 대선에서 거의 모든 야당 후보가 기본소득이라는 정책을 내건 적이 있었다. 문제는 한 후보를 제외하곤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적절하지 않은 정책을 그런 이름으로 포장했다는 것이다. 아동이나 노령층에 주는 현금 수당에다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을 단번에 실시할 경우에 드는 재정 부담과 복지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현금 수당을 감안할 때, 그런 식의 정책을 내건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혼란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의 공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기본소득이 아닌 것에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여 혹세무민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본소득을 제대로 실시하려면 막대한 재정이 소요된다는 것, 그리고 이럴 경우 다른 사회서비스를 제대로 확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깔려 있는 기본 전제는 기존의 복지국가 모델이 여전히 적실성이 있다는 것, 하지만 한국에서 재정을 확대하는 게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3년의 세월이 흐르고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도,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의 공격은 같은 무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재난 기본소득, 정명(正名)이 아닌 이유」라는 글에서 “기본소득제도 주창자들이 이런 엉터리 용어를 만들고 유포”했다고 말하면서 크게 우려를 표시한다. 그러면서 기본소득제도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핵심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 정기성, 충분성을 든다. 이에 따르면 모든 도민에게 지급한 경기도 재난 기본소득조차 정기성과 충분성의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이 공동대표가 재난 기본소득을 기본소득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는 제대로 된 기본소득을 하자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서비스 중심의 보편적 복지국가”가 여전히 적실성이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그가 보기에 보편적 복지국가의 핵심 내용은 “보편적 복지가 경제 및 일자리와 유기적으로 연계, 통합돼”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복지국가의 기둥인 사회보험이 “근로를 통해 소득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강제로 가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가 또 다른 핵심으로 보는 사회서비스가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을 육성하고, 모든 국민에게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서비스는 “사람의 능력을 키울 기회를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일자리에 대한 접근 형평성을 높여” 준다는 것이다.

그가 보편적 복지국가와 기본소득을 이렇게 대비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사회서비스 중심의 보편적 복지국가가 가지는 본질적 장점이 여전히 크고, 어떤 선진 복지국가들도 기본소득제도의 도입을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당장 역동적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할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현금 포퓰리즘 논란을 불러올 개연성이 큰 기본소득 이슈가 복지의 외피”를 쓴 채 번져 나가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상이 공동대표가 보편적 복지국가를 사회서비스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데 반해, 연세대 양재진 교수는 「기본소득과 복지국가의 원리는 상충한다」라는 글에서 현대 복지국가는 “거대한 공적 보험 시스템”이라고 하면서, 재원 부담의 보편성과 복지 급여의 필요성을 부각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위험에 빠진 사람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욕구가 있는 시민에게 급여가 제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분노를 유발한 자동차보험의 비유가 나온다. 누구나 자동차보험에 가입하고 보험료를 내지만 자동차 사고가 난 소수의 사람에게, 또 사고의 정도에 따라 보상금을 달리 주는 것과 원리상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도 세상의 변화를 알기에 플랫폼 노동자나 사각지대의 문제를 언급한다. 하지만 소수 취약계층을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로 포괄하려는 노력을 펼치는 게 더 맞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고용보험법」은 사업장 관리에서 인별 관리로 전환하여 가입률을 높이고, 그래도 발생하는 사각지대의 노동자는 일반 재정으로 운영하는 실업 부조 제도를 통해 보호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기본소득은, 그가 보기에 막대한 재정이 든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이런 막대한 돈을 기본소득에 쓰게 되면 분명 공공사업과 서비스, 사회보장 사업이 축소되거나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 아이디어와 정책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할 어떤 것이다.

 

공산주의 이후 “잠정적 유토피아” 혹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가장 나은 사회라는 평가를 받는 북유럽 복지국가를 준거점이자 목표로 삼는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과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보장을 제공하는 것을 통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자는 기본소득 진영 사이에 이렇게 커다란 경멸의 폭포수가 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역사적 감각과 이러한 역사적 감각을 낳는 현실 인식의 차이다.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도 복지국가가 역사적 체제라는 것을 인정하긴 한다. “노동계급의 성장과 함께 만들어진 정치적 산물”이라는 말이 그렇고, “기존의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표현도 그렇다. 하지만 앞서도 인용했듯이 여전히 복지국가 모델이 유용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기본소득에 대한 찬반 논의와 함께 많이 거론되고 있는 기술 변화 및 일자리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도 닿아 있다. 이들은 과거의 예를 들어 기술 변화로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하며,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교육과 재훈련을 통해 사람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거나 거기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복지국가의 임무라고 말한다.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의 이러한 ‘확신’에 비하면 기본소득 진영은 사회체제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고 그 속에서 기본소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한 청사진이 아직 없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할 것이다. 이제 구성해야 할 과제이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잠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본소득이 모든 개인에게 경제적 보장을 제공함으로써 역량을 발휘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기존의 모든 불평등한 관계를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이 생길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기본소득이 경제적, 사회적 활동을 사태 합리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장, 사회적 경제, 공적 부문이 각기 자기 역할을 하면서도 균형을 이루는 전체 체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복지국가 진영과 기본소득 진영을 나누는 더 큰 차이는 서로 다른 정의관에 있는 것 같다. 양재진은 자신의 책 『복지의 원리』에서 복지국가에 합리성이 있으며 그 바탕에는 존 롤스의 정의의 원칙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때 말하는 정의는 “이기적인 개인들이 자발적인 계약을 통해 만들어낸 정의”다. 이런 개인들은 “무지의 베일”에 가린 채 어떤 합의에 도달하는데, 롤스는 이를 두 가지 원칙에 기초한 사회 운영 원리일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자유의 원칙인데, 이를 통해 개인의 선택과 자유로운 발전이 보장된다. 다른 하나는 차등의 원칙으로, 사회적 부가 불운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도록 차등적으로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리는 롤스의 정의관에 대해 논평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롤스가 말하는 정의의 원칙은 구성의 원리가 아니라 현실의 사회, 즉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사회를 설명하거나 변호하는 논리라는 점이다.

이에 반해 기본소득 진영에서 말하는 정의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이다. 이는 주어지거나 함께 만든 자연적, 사회적 부에 대해 모든 개인에게 일정 비율로 동등한 몫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개별적으로 분배되는 것이 정의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현재의 사적 소유에 대해 공산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공유를 분할할 수 없는 것이라 보았다면, 기본소득의 소유관에서는 개인적 소유와 공유가 있으며 공유의 일정 부분은 개별적으로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의관이 등장한 것은 “이중 혁명” 시기였다. 이때는 폭력적, 법률적 인클로저 속에서 사적 소유권이 확립되는 한편,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더욱 확대되어 가던 시기였다. 이는 관습적, 공동체적 권리 속에서, 그리고 도덕 경제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서 생존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자, 새로운 원리인 노동/소유에서 살아가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노동/소유에 대한 세 가지 이데올로기, 즉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의 경합의 역사였고, 최종적으로 지난 세기말에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이른바 “역사의 종말”). 이처럼 한편에서는 역사의 종말이 선언되었지만 자본주의의 인클로저는 지속되고 있었다. 전통적인 공유인 토지에서 시작해서 물, 천연자원, 종자를 지나 디지털혁명 속에서 등장한 공동의 지적 생산물까지 전방위적이었다. 누구는 이를 두고 “제2의 인클로저”라고까지 불렀다.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이런 장기적이면서도 국면적인 맥락 속에서 다시 부상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분명 기존 복지국가의 역사적 한계나 체제적 한계를 드러내긴 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거기에 머물지는 않는다.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이보다 훨씬 오래된 문제인 공유/사적 소유/(재)공유라는 역사적 주기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속에서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추상적 개인이라는 분리된 존재론을 넘어서서 관계의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이 관계의 존재론을 인간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관계론으로 확장하는 것은 우리의 숙제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이 글은 『시대』 2020년 06월호 통권79호에 실린 ‘책 머리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