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현충일 대통령 추념사로 김원봉 선생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박종철출판사에서 나온 김성동 선생님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에 실린 김원봉 편이 여러분의 판단에 도움을 줄 것으로 믿고 여기 올립니다.
아울러 『시대』 2019년 7/8월호 합본호에는 이번 사태에 대한 안재성 작가의 글이 실릴 예정임을 알려 드립니다.

보난대로 죽이리라! 의열단 의백
김 원 봉(1898~미상)

김성동 소설가

“아무래도 여기를 떠야 할 것 같구려.”
“뜨시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인민공화당 당직자들을 바라보던 김원봉 당수는 구슬픈 목소리로 말하였다.
“여기서는…… 왜놈들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오.”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니면 북반부로?”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 대륙에서 왜놈들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적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조선의용대 목대잡던 그때 김원봉.

1947년 4월 9일. 며칠 전 미군정청이 군정포고령을 위반하였다며 묶어두었다가 풀어준 인민공화당 사무실이었다. 조국 광복의 큰 꿈을 안고 「의열단」을 세웠던 22살 때부터 해방을 맞아 귀국한 48살 때까지 26년 동안 강도 일제와 끊임없이 싸우면서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창피였다.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끈덕지게 뒤밟아 오는 왜경이었으나 한 번도 붙잡히지 않았던 김원봉 장군이다. 그런데 해방되었다는 조국에서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 부림을 받는 친일 경찰에게 붙잡혔던 것이다. 이른바 좌익이라는 딱지가 붙은 독립투사들이 다 그랬듯이 김원봉 또한 인간적 업신여김과 함께 심한 족대기질을 겪었다.
미국 기자 마크 게인이 『해방과 미군정』에서 그린 경찰서 유치장 모습이다.

나는 경찰이 각이 날카로운 나무몽둥이로 사람들의 정강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읍니다. 경찰들은 사람 손톱 밑에 뾰족한 나무 조각을 쑤셔넣기도 했지요. 또 내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물고문을 받는 것을 보았읍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의 입에다 고무틈으로 계속 물을 퍼부어 거의 질식할 지경으로 만들어놓았읍니다. 또한 경찰들이 쇠몽둥이로 한 사람의 어깨를 갈기고 쇠고리에 매달아놓는 것도 보았어요.

김원봉이 철창 속에 있는 동안 두 번째 아들을 보게 된다. 철창 안에서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철근(鐵根)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큰소리로 울었다. 「민족자주연맹」 대표였던 송남헌(宋南憲)이 쓴 『해방3년사』에 그때 꼴이 나온다.
“김원봉을 붙잡아간 사람은 노덕술(盧德述, 1899~?)이었다. 일제 때 종로경찰서 형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모지락스런 고문을 하던 악질 친일 경찰로, 김원봉 장군이 거느리던 항일결사 의열단 칠가살(七可殺) 발기에 올라있던 자였다.”
“김원봉이를 반드시 잡아오라”고 특명을 내린 사람은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張澤相)이다. 송남헌 증언이다.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이 군자금을 모집하던 광복회원에게 불응하다 살해됐는데 장택상은 이 원한 때문에 ‘진보적 해외 지도자’ 김원봉을 수도청에 구금하였다는 설이 있다.”
노덕술이 김원봉을 묶어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을 때였다. 두둑한 포상금을 받고 일계급 특진까지 할 꿈에 부풀어 있던 노덕술은 “하이!” 하고 입에 밴 왜말을 뱉으며 차렷 자세를 취하였다. 하늘 같은 청장님이 꽥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이 바보 같은 자야! 정중히 모셔 오랬지 이렇게 불경스럽게 하라고 했나?”
그러면서 짐짓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손수 묶인 것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장택상은 이승만 정권 때 초대 외무부장관과 국무총리를 하였으며 77살로 죽자 국민장을 치러 국립묘지에 ‘모셔져’ 있다. 6월항쟁 때 국본에서 이른바 두 김씨를 불러 “존경하는 역사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한 사람은 ‘녹두장군’이라고 하였고 한 사람은 ‘창랑 선생’이라고 하였다. 창랑(滄浪)은 장택상 아호였고 그 김씨는 창랑 장택상 비서로 정치를 시작한 사람이었다.
김원봉(金元鳳)은 1898년 경남 밀양(密陽)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개화 세례를 받은 진보적 중인 집안으로 부농이었다. 서당에서 진서를 배우다가 소학교를 다녔고, 민족주의자 전홍표(全鴻杓, 1869~1928)가 아람치 털어 세운 동화중학 2학년에 껴들어갔다.
전홍표를 위험인물로 점찍은 일제에 의해 동화중학이 문 닫자 소년 김원봉은 5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표충사(表忠寺)에 들어가 한 1년 동안 『손자』 『오자』같은 병서를 읽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 이끌고 왜국 침략군을 무찌른 사명대사를 기려 세운 절이다. 대지르는 얼이 남달리 센 밀양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이 사명대사와 김종직(金宗直)이다. 김종직은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 자리를 빼앗은 세조를 꾸짖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다가 연산군한테 부관참시당한 뼈센 선비였다. 김원봉의 억센 무력항쟁이 나오게 되는 뒷그림이다.
서울로 올라가 중앙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이름난 산과 내를 찾아 나그넷길을 떠나니, 열일고여덟살 때였다. 차분하게 배움에만 골똘하기에는 어지러운 시대였다. 여기저기서 독립운동 동아리들이 생겨나고 있었고 무장력을 기르고자 중국 대륙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무엇보다도 애국애족 피가 뜨거웠던 소년이었다.
이 무렵 김원봉 소년을 놀라게 하였던 것은 스승이며 고모부였던 황상규(黃尙奎, 1890~1931)가 세운이 가운데 하나였던 「대한광복회」였다. 경술국치 바로 뒤 가장 덩치가 컸던 「대한광복회」 총사령은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이었다. 1908년 13도창의군 군사장(軍師將)으로 흥인지문 밖 20리까지 무찔러 들어갔다가 서대문감옥 사형수 1호로 자리개미당한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한테 글을 배우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던 박상진은 경남 울산 사람이다. 1904년 양정의숙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판사시험에 입격한 것이 1910년.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으나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부귀공명이 뒷받침된 판사 자리를 버린다. 1913년 「대한광복회」를 얽이잡아 총사령이 되었으니, 중국에 갔을 때 본 신해혁명에서 배운 바가 컸던 탓이었다. 혁명을 위해서는 인민대중을 불지르는 암살·폭동 같은 무장투쟁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100여군데에 발판을 마련하여 무장독립군으로 하여금 한꺼번에 일어나 일제를 거꾸러뜨리겠다는 밑그림을 잡고 군자금 마련에 나서게 된다.
이름난 친일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내라는 글월을 보낸 다음 내치는 친일 부호는 죽이기로 하고 대구 시내 친일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거두려다 잡혀 6개월 징역을 살게 된다. 「대한광복회」에서는 상동(上東)광산과 직산(稷山)광산 그리고 경주에서 우편차를 덮쳐 군자금을 모았으며 온 나라 부호들 발기를 만들어 돈을 거두어 들였는데― 장승원(張承遠)·박용하(朴容夏)·양재학(梁在學:보성)·서도현(徐道賢:벌교) 같은 못된 부호는 죽여 버렸다. 옥에서 나온 그의 분부로 광복회원들이 벌인 일이 1917년 11월 경북 칠곡 대지주 장승원한테 군자금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자금을 내겠다던 다짐을 어기고 왜경에게 찔러박는 바람에 군자금을 받으러 갔던 동지만 제삿고기 만든 「대한광복회」에서 경북관찰사였던 장승원을 죽이게 되었고, 1918년 1월에는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죽이게 된다.
『제1공화국과 친일세력』에 나오는 대문이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필자는 몇 사람들의 특징적인 인간 드라마를 생각해본다. 그 하나가 해방 후 군정청××청장에 올랐던 C씨의 에피소드이다.
일제하에서 C씨에게는 본인의 친일행위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 부친은 한말의 관찰사 출신으로 경북에서 갑부로 이름이 높았다. 1915년, 광복단 단장 박상진(朴尙鎭)이 군자금을 청하러 갔을 때 C씨의 부친은 형사에게 밀고해서 매복을 하게 하였다. (『중앙일보』, 「잃어버린 36년」 제29회. 복면한 박상진에게 네 정체를 안다고 말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는 또 하나의 설도 있다.) 격분한 박상진이 현장에서 그를 사살해 버린 사건 1막이 있었다.
C씨의 부친에게는 아들 3형제가 있었다. 장남은 구한국 관료 출신으로 일제하에서 경북 모 은행장이었다. 차남은 중추원참의를 수차 중임했으며, 대구부의(府議)·대구도의(道議)·대구상의(商議) 회두(會頭)·총력련맹 평의원·대화동맹(大和同盟) 심의원 기타를 한 사람이다. 이러한 계보로서 볼 때 3남인 C씨는 본인의 친일행위는 없었지만, 그 가문이 친일계층에 속했던 것만은 부인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해방 후 C씨가 군정청××청장에 기용됐을 때 몇 사람이 국일관에서 C씨를 만나 말했다.
“이제 군정의 ××권을 가지셨으니 독립운동자에게도 잘해야 안되겠읍니까?”
이에 대한 C씨의 답변은 냉정했다.
“나는 그들을 동정할 수 없어! 내 아버지가 독립운동자에게 죽었는데 어떻게 동정하겠느냐 말이오.” (『중앙일보』, 위와 같음. 「의열단원」이었던 유석현(劉錫鉉) 증언)

해방 뒤 김 구, 이시영, 김규식 들과 함께한 김원봉. 뒷 줄 오른쪽 우뚝 선이다.

 

친일 면장 박용하를 죽인 것이 「대한광복회」임이 드러나면서 총사령 박상진이 붙잡혀 대구 감옥에서 자리개미당하게 되니, 1921년 38살 때였다. 「대한광복회」라는 이름의 암살단 이념과 인맥은 「의열단」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내뺐다가 나중에 들통나자 세차게 싸우던 끝에 왜경 여럿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 끊은 김상옥(金相玉) 열사와 권 준(權 俊)이 그들이다.
김원봉이 중국 천진(天津)으로 건너가 독일 사람이 꾸려가는 덕화학당(德華學堂)에 들어간 것은 19살 때인 1916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치러지고 있었는데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다. 독일로 갈 생각을 하고 덕화학당에 들어갔던 것이니, 독일에 힘을 보태주면 독립을 할 수 있으리라는 그때 선배 애국자들 형편 읽기에 따른 것이었다. 독일말을 배우기 앞서 먼저 중국말을 배우다가 1917년 여름방학을 맞아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애국자들 꿈과 다르게 중국이 일본 쪽에 붙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는 바람에 덕화학당은 문을 닫고 김원봉은 1년쯤 조선에 머물게 되는데, 그때에 사귀게 되는 사람이 김두전(金枓全)과 이명건(李明鍵)이었다. 고모부인 황상규가 세 사람에게 호를 지어주며 의형제를 맺게 하였고, 세 사람은 바다 밖으로 나가 민족해방운동을 벌이기로 굳게 다짐한다. 황상규는 세 소년에게 어떤 경우에도 조국 산천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산과 물과 별을 속뜻으로 하는 호를 지어주었으니― 김원봉은 약산(若山), 김두전은 약수(若水), 이명건은 여성(如星)이 된다.
1918년 9월, 김약산·김약수·이여성 세 동지는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에 들어간다. 미국인이 꾸려가는 기독교 갈래 학교로 여운형이 신학과를 마친 것이 그 전해였다. 세 사람이 들어간 곳은 영어과였다. 1919년이 되자 여운형이 나라 안팎 애국동지들을 상해로 불러 모으고 있었다. 여운형이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연희전문학교 세운 언더우드 양아들로 영어에 밝고 중국 국적을 갖고 있어 바다 밖 나들이에 걸림이 없는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조선 대표로 보내어 조선독립을 세계만방에 비대발괄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강도 나라들이 조선 같은 힘없는 겨레를 위하여 저희들과 같은 자리인 일본제국주의와 싸워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약산은 길림으로 간다. 김약수·이여성과 만나 조국독립을 위한 둔전병(屯田兵) 양성을 상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주 서간도에서 군대를 기르자는 것이 그때 독립운동 두럭들 똑같은 생각이었다.
봉천(奉天)에서 세 사람이 만났을 때 고국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을 듣게 되었다. 김약수·이여성은 “독립운동은 반드시 해외에 나와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국내로 돌아가 인민대중을 토대로 하여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조선으로 돌아갔고, 약산은 “무장력을 갖췄을 때만이 독립을 이룰 수 있다”며 의군부(義軍府)가 있는 길림으로 간다. 의군부 고갱이는 「대한광복회」 회원이던 황상규·김좌진·손일민이었다.
3·1운동을 일으킨 인민대중 무서운 힘을 보게 된 약산은 지금까지 품어왔던 생각을 바꾸게 된다. 군대를 길러서 세계 최강인 왜적과 맞싸운다는 것이 이길 수 있고 없고는 다음이고 우선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에 꿈이 깨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다다른 마무리가 암살·파괴 투쟁이었다. 3·1운동에서 인민대중 힘을 믿게 되었고, 그 인민대중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 불쏘시개 구실을 하자는 것이었다. 작지만 억센 동아리를 만들어 적 한바닥 난사람들을 죽여버리고 적 고갱이 두럭들을 부숴버림으로써 인민대중 속에 들어 있는 사나운 혁명깜냥을 이끌어내는 불쏘시개가 되자는 것이었다.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농군 반 아무개 집에 약산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였다. 모두 13명인데, 얼추 밀양·대구 테두리에서 3·1만세시위를 목대잡다가 만주로 내뺀 사람들이었다.
약산·윤세주(尹世冑)·이성우(李成宇)·곽 경(郭 敬)·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鐘巖)·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 준(權 俊).
황상규가 의백(義伯)으로 모셔졌는데, 「의열단(義烈團)」이라는 이름이었다. 공약 제1조에 <천하의 정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에서 정의 ‘의’와 맹렬 ‘열’을 따온 것이었다.
암살할 사람으로 못박은 것이 일곱 가지 갈래였으니, 칠가살(七可殺)이다.
①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③ 대만총독
④ 매국적
⑤ 친일파 거두
⑥ 적의 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
다음은 부숴버릴 곳들이다.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주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주요기관

만주 길림(吉林)에 세워진 「의열단」은 바탕자리를 북경으로 옮긴다. 1920년 늦봄에서 초여름쯤이었다. 중국 정치 한바닥인 북경에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가 내세우는 외교독립노선에 맞서는 조선인들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의열단」이 맨 처음 치른 일은 조선총독부를 터뜨려 부수려는 딴이름 ‘밀양폭파사건’이었다. 하지만 곽재기·이성우·신철휴·김수득·한봉근·윤세주 6명이 서울 인사동 어떤 중국 요릿집에 모여 있다가 독립운동자를 잡아들이는 것으로 못된 이름을 떨치던 김태석(金泰錫) 경부와 그 졸개들에게 붙잡힘으로써 허방치게 된다. 1920년 6월 16일 모두 16명이 붙잡힌 ‘암살 파괴의 대음모 사건’ 주범으로 찍힌 곽재기는 8년 만기를 채웠고, 이성우가 세상 구경을 다시 하게 된 것은 1928년 3월 8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황상규·이성우 같은 선배들이 붙잡혀 들어감으로써 약산은 ‘의백’이라는 이름의 단장을 맡게 된다.
제2차 거사를 책임 맡은 것은 부산 출신 박재혁(朴載赫)이었다. 「의열단」이 노린 것은 많은 동지들이 잡혀간 부산경찰서였다. 1920년 9월 14일, 예전책 장사꾼으로 꾸미고 서장실로 들어간 박재혁은 고서 속에 숨겨두었던 폭탄을 던졌다. 서장실이 박살나면서 하시모토(橋本) 서장은 중상을 입었고 박재혁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박재혁은 낟알기를 끊기 아흐레 만에 숨을 거두었으니, “왜놈 관리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다”는 생각에서였다.
박재혁 열사 거사가 있은 지 두 달 뒤인 1920년 11월, 이번에는 밀양경찰서가 폭탄 세례를 받았다. 밀양 사람으로 동화학원을 다녔던 약산 친구 최수봉(崔壽鳳)에 의해서였다. 부산경찰서폭파사건 때 밀양에 들어온 의열단원을 만나 단에 들어간 최수봉은 폭탄을 던진 다음 뒤쫓는 왜경을 피해 도망치다가 길이 막히자 단도로 제 목을 찔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21살 나이였다.
1921년 9월 12일 상오 10시 10분쯤, 남산 밑 왜성대(倭城臺, 이제 서울 중구 예장동에 있던) 일제 식민통치 총본산인 총독부 건물에서 폭탄이 터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용산 철도국 노동자 출신 김익상(金益相) 열사 거사였는데, 경성 얼안 모두 계엄령에 버금가게 에워싼 속에 이 잡듯이 뒤졌으나 깜깜속이었다. 누가 어떻게 무시무시한 총독부에 들어와 2층에 있는 회계과를 터뜨려 부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1922년 3월 28일 하오 3시 반, 상해 황포탄 나루터는 대일본제국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마중하기 위한 사람들 물결로 백차일을 친 듯하였다. 사다리를 내려온 다나카가 줄지어 늘어선 마중꾼과 손잡으며 걸어 나오는 순간, 총질 솜씨꾼인 오성륜(吳成崙) 단총이 불을 뿜었다. 총알은 그러나 마침 다나카 앞으로 나서는 서양 여자 가슴에 박혔고, 다나카는 재빨리 사람들 사이로 엎드렸다. 제2선을 맡았던 김익상이 아수라장을 이룬 군중을 헤치고 다나카 뒤를 쫓으며 연달아 두 방을 쏘았으나 두 방 모두 다나카가 쓴 모자를 꿰뚫었을 뿐이었다. 재빨리 마차를 타고 도망치는 다나카를 제3선을 맡은 이종암이 쫓아가며 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았다. 일본영사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오성륜은 유치장을 부수고 도망쳤고, 김익상은 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던 것이 드러나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에서 다시 20년으로 감형 받아 나온 1942년 뒤로는 자취를 모른다. 오성륜이 한 말이다.
“일본의 대신·대장을 암살한다 해서 독립을 성취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암살로 말미암아 자연 사방의 정세가 독립을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암살수단을 채택하게 되었다.”
뛰어난 무장 투쟁가였던 오성륜은 1941년 더러워져 왜경에 붙었는데, 1947년 첫때 임서(林西)에서 죽었다. 팔로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는 말도 있다.

신채호가 지은 대문장 「조선혁명선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지어준 「조선혁명선언」을 「의열단」 근본철학으로 한 약산은 다시 암살·파괴 밑그림에 들어간다. 최종덕·이종암을 국내에 들여보내어 공산주의자 김 한과 암살·파괴 공작을 벌이려는데, 김 한이 붙잡힌다. 다시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들었다가 돌아온 김시현(金始顯, 1883~1966)과 김시현이 끌어들인 경기도 경찰부 경부 황 옥(黃 鈺)에게 폭탄과 「조선혁명선언」과 단원들을 보내었다. 서울을 사북으로 온 나라 여러 곳에서 넓은 폭동이 일어날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의열단」 안으로 파고든 염알이꾼 김 아무개 쏘개질로 꺾여버리고 만다. 빼앗긴 물품만 건물 파괴용 6개, 방화용 17개, 암살용 13개 등 폭탄 36개, 뇌관 6개, 도화선 6개, 도화선과 닿게 되는 시계 6개, 권총 6자루, 실탄 155발, 「조선혁명선언」361부, 「조선총독부 소속 관공리에게」라는 협박문 548장이었다.
1923년 1월 5일, 김지섭(金祉燮, 1884~1928)이 동경으로 갔다. 황궁 정문 앞에 있는 이중교(二重橋) 다리에 폭탄을 던져 북새통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 황궁으로 들어가 왜왕을 죽이려고 폭탄을 던지기는 하였으나 곧 붙잡히고 말았다.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왜경한테 당한 살인적 족대기질과 단식투쟁으로 몸이 약해져 한 달 보름 만에 옥사하고 말았다. 김지섭 열사 동경 거사 뒤에도 여러 차례 「의열단」원들이 한 암살·파괴 사건이 일어나지만, 동경 거사가 허방짚으면서 「의열단」 싸움은 막상 가림천을 내린다. 북경으로 단바탕자리를 옮긴 1924년에는 한 70명 결사단원을 거느릴 만큼 힘이 늘어나― 테러리즘의 테두리를 깨닫고 무장투쟁으로 그 운동 노선을 바꾼 것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조선의용대」였다. 그 때에 김원봉이 부르짖었던 말이다.
“일대 무장투쟁이 아니고서는 강도 일제를 구축할 도리가 없다!”
「의열단」 싸움만이 아니었으니, 올라간 다음에는 내려오게 마련인 것이 운동법칙인 때문인가. 3·1운동과 함께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나라 안팎 독립운동은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왜군과 맞붙었던 만주독립군은 홍범도 장군 봉오동대첩(1920년 6월)과 김좌진 장군 청산리대첩(1920년 10월)을 마지막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고, 자본주의 힘센 나라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비대발괄하는 외교 청원을 주된 노선으로 한 상해임정은 일제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는 제국주의 힘센 나라들 모르쇠와 집안싸움으로 겉치레만 남았으며, 나라 안에 있는 부르주아계급이 벌이던 실력양성론은 민족해방을 손 떼는 이른바 민족개량주의운동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을 본받아 일어난 공산주의운동은 아직 그 힘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캄캄한 일됨새에서 끈덕지게 이어졌던 「의열단」 싸움은 절망 벼랑 끝에 내몰린 조선 인민들에게 비쳐주는 한 점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약산이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들어간 것은 1926년 1월이다. 신 악·이영준·김 종·이인홍·양 검·이병희 같은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한 투쟁노선 바뀜에 따른 것이니, ‘결사적인 항일군대’를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광동(廣東)코뮌이 끔찍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맞섬을 놓고 많은 생각을 하며 상해 거쳐 북경으로 간 약산은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세워 조국해방을 위한 대들보들을 키워낸다. 그들을 나라 안으로 들여보내어 노동자·농민·학생과 대중운동을 벌이게 하고, 장개석과 합작을 밀고 나갔으나 장개석의 우물쭈물하는 항일노선 탓에 꺾여버린 다음, 남경으로가서 ‘혁명간부학교’를 세운다.
1935년 7월 4일, 독립운동 두럭 9개를 묶어 민족혁명당을 만들고 총서기가 되었다. 1938년 10월 1일,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만들고 대장이 되었다. 물밀 듯 쳐들어오는 왜병에 맞선 무한 방위전에 들어가는 것을 첫코로 여러 군데를 옮겨 다니며 항일싸움을 하던 「조선의용대」는 화북으로 가서 무 정 장군이 얽이잡은 「조선의용군」이 된다. 중경에서 「조선의용대」에 대한 입김을 지키려고 힘쓰던 약산은 김 구가 채잡는 임정에 들어가 군무부장을 맡게 되는데, 일제가 거꾸러질 날이 멀지 않았음을 내다본 것이었다.
약산이 해방을 맞아 개인 감목으로 서울에 온 것은 1945년 12월 3일이었다. 중경과 상해에서부터 임정 보수파들과 싸우며 임정개조론을 펴던 약산은 임정은 조선을 대표하는 정권이 될 수 없다고 보고 반동세력을 뺀 모든 민주주의 세력 모임 두럭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얽는 데 들어가 여운형·허 헌·박헌영·백남운과 더불어 공동의장이 되었다. 박헌영이 월북하고 여운형이 좌우 양쪽으로부터 따돌림당하는 셈판에서 허 헌·백남운과 함께 민전을 이끌던 약산은 1947년 6월 1일 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다시 짠다. 약산이 귀국했을 때 했던 말이다.

나는 작년 8·15 그날은 중경 남안에 있었다. 이 남안이란 곳은 중경성 밖 강 하나를 새에 둔 조그만 거리로 우리 조선민족혁명당원들과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나는 그날 오후 7시경 강을 건너 성안에 들어가니 중국인들은 항전승리 만세를 부르며 거리거리 인산인해를 이루어 폭죽을 터뜨리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비로소 일제가 투항한 것을 알고 곧 돌아와 우리 당원과 거주 동포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여 동맹군의 승리로 조국이 해방된 전축회를 열고 기쁨과 감격 속에 철야로 피차의 감상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그때 나의 심경은 단순한 감격보다는 어떤 공허감과 참괴한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절치액완하며 일제를 우리의 힘으로 굴복시키지 못하고 결국 연합군의 힘으로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으로 있어 일제가 투항전야까지 될 수 있는 대로 임정 영도 아래 무장혁명군을 조직하려 하였으나 그것조차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의 힘을 입어 조국해방이 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감회였다. 그리고 만리이역에서 해방된 조국의 장래가 그때부터 걱정되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 중경에 있는 임정이란 기구가 국내에 들어가 인민의 지지를 받는 혁명정권이 되지 못할 것을 예측하고 임정국무위원회를 열어 간수내각(과도적)을 조직해 가지고 국내에 들어가 이 임정의 주권을 전국인민대표 량해 하에 처리케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임정이 해외에 있어 국내 인민과 하등의 연계가 없고 또 국내 인민들은 적의 압박 밑에서 혁명정권을 수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 해외에 있는 소수 독립운동가라도 비록 3천만을 대표하는 임정을 수립한다는 론거가 성립되었으나 동맹국의 힘으로 해방이 되고 보니 국내 인민은 연합국의 원조 밑에서 인민 자신의 정권을 건립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니 자연 임정이 과거에 조선 독립을 령도할만한 공적이 없으면서 조선을 대표하는 정권으로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북으로 간 약산은 남조선으로 치면 국방장관 자리인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이 된다.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자리에서 푸지위된 1958년 9월부터 그 이름은 사라져버린다.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는 설, 감옥에서 자결하였다는 설, 그리고 명예로운 은퇴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
6·25가 터지면서 밀양 지역 「보도연맹」 가입자 400여 명이 학살당하는데, 약산 형제들인 춘봉·작은봉·구봉 등 네 명이 한밤중에 들이닥친 군경 차에 실려 간 다음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80 넘은 약산 부친은 앞뒤 냉갈령 속에 굶어죽었으며, 사촌들까지 잡혀가 오랫동안 수용소에 갇혀 있어야 하였다.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대담, 과격, 치밀하면서도 급진적인 성품의 소유자’로서, ‘거무수룩한 얼굴에 키가 후리후리하고 남성답게 잘생긴 투사형’이었던 김원봉 장군 이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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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1947년 충청남도 보령에서 출생, 한국전쟁 와중에 아버지와 단란한 ‘집’을 빼앗긴 채 유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글지 김성동은, 성장기를 줄곧 전쟁과 이데올로기가 남긴 깊은 상처 속에서 방황하다가 19세가 되던 1965년 입산入山을 결행하였다. 불문佛門의 사문沙門이 되어 12년간 정진하였으나 1976년 하산, 이후 소설가 길을 걷고 있다. 1970년대 후반 독서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화제작으로 구도求道에 목말라 방황하는 한 젊은 사문의 의식과 행적을 그린 장편소설 『만다라』(1978) 출간 이후, 창작집 『피안의 새』(1981), 『오막살이 집 한 채』(1982), 『붉은 단추』(1987)를 펴냈으며, 장편소설 『풍적風笛』(미완, 1983), 『집』(1989),『길』(1991), 『꿈』(2001)을 썼다. 산문집으로 『김성동 천자문』(2004), 『한국 정치 아리랑』(2011),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2014), 『염불처럼 서러워서』(2014)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