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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만난 아이디어의 실행과 구현을 위하여

― 기본소득 전문가들과의 인터뷰

 

이건민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 수료

 

기본소득은 진정 리드Howard Reed와 랜슬리Stewart Lansley의 책 제목처럼 “때를 만난 아이디어”인가? 실로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실험(사회적 실험, 모의실험, 사고실험, 기타 다양한 실천들)의 형태로든 현실 정책 및 제도의 형태로든 실제로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 이전의 두 번의 물결과 같이 현재의 세 번째 물결 역시 잠깐 출렁였다가 이내 사그라지는 운명에 처하고 말 것이다.* 현재 전 세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기본소득(과 관련된) 실험들, 기본소득 정책을 법제화하고자 하는 일련의 운동들, 기본소득의 기대 효과와 잠재적 영향에 관한 연구, 기고, 기사 등의 급증은 세 번째 물결로 우리에게 다시 찾아온 기본소득을 비단 아이디어와 실험 차원에서 멈추게 하지 않고 우리 시대의 현실로 구현하기 위한 열망과 바람을 담은 것일 테다.

지난 9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개최되었던 제17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의 제목은 바로 “기본소득 실행하기Implementing Basic Income”였다. 김주온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함께 이번 대회 참가자 및 대회 조직위원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9월 20일에 총 14명에게 서면 인터뷰 또는 현장 인터뷰를 요청하는 이메일을 발송하였다. 서면으로 3명이, 그리고 현장에서 3명이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이 글은 서면 인터뷰 세 건을 대화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도 익히 잘 알려진 벨기에 루뱅대학교의 필립 판 빠레이스Philippe Van Parijs 교수는 “기본소득의 경제적 지속 가능성Economic Sustainability of Basic Income”에 대해 말한다. 폴란드 아담미츠키에비츠대학교Adam Mickiewicz University in Poznań의 마치에이 슐린데르Maciej Szlinder 박사는 “일자리보장Job Guarantee(JG) 대 기본소득보장Basic Income Guarantee(BIG)”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논의한다. 마지막으로 P2P 이론가이자 P2P재단 P2P Foundation의 설립자로 유명한 벨기에의 미셸 바우엔Michel Bauwens은 사회적 지식 경제social knowledge economy와 도시 공유재urban commons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첫 번째 인터뷰: 기본소득의 경제적 지속 가능성 – 필립 판 빠레이스

이건민: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건민이라고 합니다. 먼저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해 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필립 판 빠레이스: 반갑습니다. 필립 판 빠레이스입니다. 인터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민: 여기서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기본소득의 경제적 지속 가능성”입니다. 말콤 토리Malcolm Torry 박사는 작년에 나온 저서 『시민소득의 실현 가능성The Feasibility of Citizen’s Income』에서 기본소득의 재정적 실현 가능성으로 “정부의 재정적 실현 가능성”과 “가구의 재정적 실현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저는 기본소득이 도입되어 있지 않다가 도입되는 이행 과정과 관련한 다양한 실현 가능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와 더불어 교수님께서 야닉 판더보르트Yannick Vanderborght 브뤼셀대학 교수와 함께 쓰신 책 『기본소득: 자유로운 사회와 건전한 경제를 위한 제안 Basic Income: A Radical Proposal for a Free Society and a Sane Economy』(2017년) 제6장에서 다룬 기본소득의 “경제적 지속 가능성”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만약 아직까지 도입되지 않은 어떠한 정책이 미래에 채택된다는 가정 하에서 그것이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일반적으로 예측된다면,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널리 판단되는 그 정책을 현실에서 도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립 판 빠레이스: 네. 그렇습니다.

이건민: 제가 보기에 기본소득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에서 들고 있는 주요한 논거는 다음의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본소득이 도입될 경우, 1) 대다수 사람들이 전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2) 높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다, 3) 심각한 경제적 변동성과 불균형성을 낳을 것이다. 하나씩 여쭈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필립 판 빠레이스: 설문조사, 인터뷰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만약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당신은 계속 일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거의 대다수는 자신은 계속해서 일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반면 “만약 기본소득이 도입될 경우 사람들이 계속 일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상당수 사람은 많은 이들이 일을 그만둘 것이라고 응답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타인이 무엇을 할 것이냐보다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전자에 대한 대답이 후자에 대한 대답보다는 기본소득이 초래할 결과들을 추측하는 데 더 나은 지침이라 하겠습니다.

노동 공급 측면에서 기본소득 제안이 부딪히는 진정한 도전 지점은 많은 사람이 전혀 일하지 않게 될 가능성보다는 많은 사람이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하고, 경력 단절 기간을 더 길게 가지며, 비록 보수는 좋지 않지만 더 높은 내재적 가치(특질)를 갖는 일자리를 취할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효과들은 추상적인 견지에서inabstracto 기본소득의 지속 가능성을 논의할 때 고려되어서는 곤란하며, 특정한 기본소득 제안들의 지속 가능성을 논할 때 감안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본소득의 지급 수준이 어떠한지, 기본소득이 무엇을 대체하고 무엇을 보완하는지, 기본소득의 재원이 어떻게 조달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따져 보아야만 합니다.

 

  • *   칼 와이더키스트Karl Widerquist는 2016년 서울에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트 대회의 한 발표에서, 사회정의의 기초로서 기본소득이 부상했던 20세기 초를 기본소득의 첫 번째 물결로, 복지권운동, 민권운동을 비롯한 여러 사회운동이 펼쳐졌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기본소득의 두 번째 물결로, 현재를 기본소득의 세 번째 물결로 지칭하였다.
  • ** “정부의 재정적 실현 가능성fiscal feasibility”이란 정부에서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 있는 재원을 조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가구의 재정적 실현 가능성household financial feasibility”이란 기본소득 도입으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되는 저소득층이 거의 없어야 함과 동시에 고소득층의 손실이 지나치게 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말콤 토리는 이러한 “재정적 실현 가능성” 외에도 “심리적 실현 가능성psychological feasibility”, “행정적 실현 가능성administrative feasibility”, “행태적 실현 가능성behavioural feasibility”, “정치적 실현 가능성political feasibility”, “정책 과정 실현 가능성policy process feasibility”을 특정 사회에서 특정한 기본소득이 충족시켜야 할 실현 가능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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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실험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

 

2008년 경제 위기는 1929년 대공황Great Depression과 비교되면서 대불황Great Recession이라 불렸다.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대공황은 뉴딜을 비롯한 ‘대안’의 제출과 실행으로 이어졌지만, 대불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과거에는 국민국가라는 파라미터와 총력전의 경험과 전망 속에서 경제를 다시 사회 속에 묻으려는 시도가 가능했다면, 오늘날 지구화된 자본주의는 그런 제약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위로부터의 대안’은 없었지만, 경제 위기에 대한 기성 질서의 해결 방식은 ‘아래로부터의 분노’를 낳았다. 특히 경제 위기가 부채 위기로 이어지고, 구제금융이 긴축을 강제한 남유럽에서는 대중의 저항이 거셌고, 이는 기성 정치질서 자체를 바꾸는 것으로 나아갔다.

가장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곳은 그리스였다. 이곳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트로이카(유럽연합, 국제통화기금, 유럽중앙은행)의 압력 하에서 긴축 조치를 실시한 사회민주주의정당인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PASOK이 완전히 몰락하고, 2015년 1월 급진좌파인 시리자(‘급진좌파연합’)가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시리자의 권력 장악보다 더 극적이었던 것은 시리자가 트로이카에 굴복한 일이었다. ‘채무 조정’과 반反긴축을 내걸고 집권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투표를 통해 긴축 거부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까지 확인했지만, 시리자는 결국 3차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트로이카의 요구를 수용하는, 사실상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 과정은 좌파에게 두 가지 교훈이자 과제를 남겨 주었다. 하나는 긴축을 받아들인 사회민주주의의 몰락이다. (긴축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 사회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가 되어 있었다.) 이를 역사적인 것으로 볼 것인지 정세적으로 볼 것인지는 아직 남은 문제이긴 하지만, 지지층에 반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의 결과는 분명해 보인다. 다른 하나는 특히 유럽에서 문제인데, 오늘날 국민국가 수준에서의 주권, 특히 경제 주권의 회복이 가능하고 또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문제다.

유럽연합에서 다섯 번째로 경제 규모가 큰 스페인은 약간 다른 양상을 보였다. 시리자가 규모는 작지만 기성 정당이었다면, 스페인의 경우에는 포데모스Podemos라는 완전히 새로운 ‘좌파’정당이 출현했다. 이는 2011년 5월에 시작된 ‘분노한 사람들Los Indignados’의 운동이 이후 다양한 사회운동의 흐름을 형성한 것을 다시 모아 정치적 매듭을 만들어 낸 것인데, 일종의 포퓰리즘적 계기를 정치적으로 포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와 달리 스페인사회당PSOE이 완전히 몰락하지 않고 여전히 주요한 정치 세력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의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과 달리 오래된 정당으로서 여전히 전통적인 지지층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끝으로 오른쪽에서도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시우다다노스Ciudadanos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페인 정치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2015년 12월 총선 결과 다수파 정부가 등장하지 못했고, 이후 2016년 6월 총선에서도 마찬가지 결과를 낳았다. ‘국민당PP-시우다다노스’ 조합도, ‘사회당-포데모스’ 조합도 다수파 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다. 물론 후자는 사회당 내 우파의 반대로 시도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기성 질서의 일부가 된 사회민주주의정당은 자기 왼쪽에 있는 정당과 연합하는 것을 일종의 터부로 삼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유럽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작은 나라 포르투갈은 두 가지 점에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나는 2015년 10월 총선에서 32.3퍼센트를 득표하여 제2당이 된 사회당Partido Socialista이 왼쪽의 좌파블록 및 연합민주동맹CDU(공산당과 녹색당의 정치연합)과 함께 정부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 선거에서 우파 연합인 전진포르투갈(사민당과 국민당의 정치연합)이 38.6퍼센트를 득표하여 의석의 46퍼센트를 확보하긴 했지만 다수를 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렇게 형성된 사회당 주도 정부가 반긴축 정책을 펼쳤으며, 현상적으로 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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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샌드박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김찬휘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경쟁을 제한하는 규제와 진입 장벽을 전면 개선해 활력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다.” “규제프리존특별법은 대기업 특혜가 아니다.”“ 규제프리존특별법이 국회에서 입법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

눈을 크게 뜨고 기사의 날짜를 다시 체크해 본다. 혹시 2016년은 아닐까? 분명히 2017년, 그것도 5월 10일 이후의 것이다. 박근혜 정부 때나 나왔을 성 싶은 이 발언들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 수장’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규제프리존특별법」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박근혜는 2015년 신년기자회견에서 “조금씩 해서는 한이 없으니 과감하게 단두대에 올려서 한꺼번에 해결하겠다”라고 규제 철거를 공언했다. 그 이후 박근혜는 2016년 1월 13일 대국민 담화에서「규제프리존법」,「서비스발전기본법」등의 국회 통과를 요청했는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K스포츠재단이 설립된 날이었다. 결국 3월 24일 새누리당 의원 13인의 발의로 「지역전략산업육성을 위한 규제프리존의 지정과 운영에 관한 특별법안」이 19대 국회에 제출되었고, 19대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된 이 법안은 5월 30일 새누리당 의원 전원과 국민의당 3인에 의해 20대 국회 1호 법안으로 다시 발의되어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이다.

박근혜-최순실 정부의 희대의 악법이 문재인 정부 하에서 부활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조짐은 정부 출범 초기부터 있어 왔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5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지금도 민주당 소속 시·도지사들은 규제프리존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밝히면서 “당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겠다”라고 말했다. 이낙연 총리는 박근혜 정권 당시 전남도지사로서 「규제프리존법」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건의했던 바 있다. 7월에는 김부겸 행자부 장관이 “규제 개혁 차원에서 규제프리존법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겠다”라고 발언했고, 여당 일각에서는 “내년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면서 이름을 바꿔서라도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7월 2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추경예산 심사 보고서에는, “규제프리존특별법 통과를 전제로 반영된 목적예비비 2천억원이 연내 집행될 수 있도록 법안 통과에 최대한 노력한다”라는 부대 의견이 달렸다.

이런 와중에서 급기야 10월 11일 4차산업혁명위원회 출범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신산업 분야는 일정 기간 규제 없이 사업할 수 있도록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하고, 18일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는 “테스트베드형 지역특구” 도입을 추진하기로 발표했다. 여당 내부의 주장대로 ‘규제프리존’을 이름을 바꿔서라도 실시하는 것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난감한 일이 있다. 박근혜 정부건 문재인 정부건 영어를 쓴다는 것이다. 마치 그 본질을 모든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는 양, 그들의 정책은 알 수 없는 영어로 가득 차 있다. “규제프리존”에서 ‘프리free’는 ‘자유롭다’라고 번역해도 좋지만 ‘없다’라고 번역할 때 더 이해하기 쉽다. 즉 ‘규제프리존’이란 ‘무無규제 구역’이다. “테스트베드형 지역특구”에서 ‘테스트베드test bed’는 ‘시험장’이다. 성능, 효과, 안정성, 피해 등이 입증되지 않은 제품 및 기술을 시장에 판매하여 시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 반응”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자가 ‘마루타’가 되는 것이다.

제일 어려운 단어가 남았다. “규제 샌드박스regulatory sandbox.”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샌드박스’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대답이 돌아 왔다. “권투할 때 쓰는 샌드백 같은 거예요? 규제를 막 패는 건가요?” 역시 외국어는 뭔가를 숨기려고 하는 자들이 이용하기에 좋은 도구다. 샌드박스가 뭔지 사진으로 보도록 하자.

나무로 된 박스(box) 안에 모래(sand)가 채워져 있는 이것이 샌드박스다. 모래놀이터를 만들어서 이 ‘구역’ 안에서는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부모/어른의 간섭 ‘없이’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규제 샌드박스”에서 정부 규제는 부모/어른에 해당하고 뛰어노는 어린이들은 대기업을 위시한 특혜 기업이다. ‘정부가 간섭하지 않을 테니 기업은 자유롭게 놀고 싶은 대로 맘대로 뛰어노세요.’ 이것이 ‘규제 샌드박스’다.

“규제 샌드박스”는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될 때 일정 기간 동안 기존 규제를 면제하거나 유예해 주는 제도로서, 영국에서 금융과 IT를 융합한 ‘핀테크FinTech’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처음 시작되었다. 사업자가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규제 샌드박스 적용을 신청하면, 법령을 개정하지 않고도 심사를 거쳐 시범 사업, 임시 허가등으로 규제를 면제, 유예해 그동안 규제로 인해 출시할 수 없었던 상품을 빠르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도록 하고, 출시 이후 문제가 있으면 사후 규제하는 방식이다.

최근 11월 10일 베트남에서 열린 APEC 회의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신산업·신기술 육성을 위해 규제 법체계를 사전 허용·사후 규제 방식의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하는 한편 일정 기간 규제 적용 없이 혁신 서비스나 제품을 출시해 테스트할 수 있게 하는 ‘규제샌드박스’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규제프리존 부활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과연 규제프리존은 어떤 것이기에 신정부가 이렇듯 우선적으로 적극 추진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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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변화의 첫 단추, 선거제도 개혁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촛불 1주년, 정치 개혁이 핵심이어야

대통령 탄핵을 거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한 사람 바뀌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크게 진전하는 것은 아니고, ‘헬조선’이 ‘행복조선’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지금 상황은 정확하게 대통령 한 사람만 바뀌었을 뿐이다. 한국 사회의 기득권 구조에는 전혀 바뀐 것이 없다.

정치권에서 개헌을 추진하고 있지만, ‘국민 참여’는 형식에 그치고 있다. 지난 8월 29일부터 한 달 동안 진행된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의 지역 순회 토론회 “헌법개정 국민대토론회”는 형식적인 절차에 그쳤다.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은 되지 못했다. 이런 형식적인 참여 절차에 항의하는 위원회 자문위원들의 의견도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다. 개혁 입법도, 정치 개혁도, 개헌도 모두 안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지난겨울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의 열망이 이런 식으로 끝나 버려서 되겠는가? 정말 답답한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 시민사회, 그리고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돌파구는 정치 개혁일 수밖에 없다. 개혁 입법을 위해서도 국회를 바꾸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개헌도 마찬가지다. 국회 내의 기득권 세력들이 자기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개헌에 관한 합의는 불가능하다. 국회 판을 바꾸지 않고서는 시민들이 바라는 직접민주주의, 지방분권, 기본권 강화와 같은 내용들이 제대로 반영된 개헌은 이뤄질 수 없다.

정치 개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서는 시민사회, 노동계, 개혁적인 정치세력·정치인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기본적인 선거제도 개혁 방향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하는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100대 국정과제”에도 선거제도 개혁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지난 6월 8일 전국 단위의 ‘정치개혁공동행동’이 발족했고, 울산/강원/광주/대구/대전/부산/충북/충남/제주/전북/서울 등지에서 지역별 공동행동이 발족했다. 그만큼 전국과 지역 차원에서 힘을 모을 수 있는 이슈가‘ 정치 개혁’이다.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 지역 정치 개혁을 위해서도 선거제도 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지금의 선거제도를 그대로 두고 내년 지방선거에서 큰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촛불 1주년을 앞둔 지금 시점에 필요한 것은 정치 개혁이고, 핵심은 선거제도 개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루어져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개혁의 첫 단추는 선거제도 개혁

앞서 언급한 지금의 답답한 상황을 풀기 위한 실마리는 무엇일까? 국회를 바꾸는 것이 핵심이다. 대한민국의 온갖 기득권 구조는 결국 국회로 모이게 된다. 기득권을 보장하는 법을 만드는 것도 국회의 역할이다. 대한민국의 국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득권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통로로 기능해 왔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를 상징하는 단어는 ‘남성-기득권-50·60대’다. 국회의원 중 83%가 남성이다. 국회의원 평균 재산이 40억원에 육박한다. 국회의원 당선자의 평균연령이 만 55.5세이고, 20대/30대는 합쳐서 1%에 불과한 게 현실이다. 이런 구성을 그대로 둔 채 시민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서민들과 약자들을 위한 정책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이런 모습의 국회가 아닌 ‘다른 국회’를 만들려면 국회를 구성하는 규칙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선거제도 개혁이다. 핵심은 간단하다. 민심(표심)을 왜곡하는 불공정한 선거제도를 민심 그대로 의석을 배분하는 공정한 제도로 교체하면 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그것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란 각 정당이 얻은 정당 득표율에 따라 전체 의석을 배분하는 제도다. 지금 국회의원이 300명인데, 300명 전체를 각 정당이 받은 득표율대로 배분하자는 것이다.

이 선거제도가 도입되어야 다양한 정당들이 정책으로 경쟁하는 정치가 가능해진다. 각 정당들은 정당 득표를 위해서 노동, 복지, 교육, 농업, 먹을거리, 안전, 환경처럼 시민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 청년, 소수자, 노동자, 농민, 영세자영업자 등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상당수 공천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유권자들이 공약의 진정성을 믿고 표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남성-기득권-50대 이상’의 국회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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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 의한 모두를 위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 포르투갈 기본소득 활동가 미겔 오르타와의 인터뷰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

 

2017년 9월 25-27일에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제17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BIEN Congress가 열렸다. “기본소득의 실시”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대회에는 높아진 기본소득의 지위를 반영하듯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포르투갈 발표자도 적지 않았다. 기본소득이 곧 실시될 수 있다는 기대감, 새로운 아이디어가 구체적인 것이 될 때 가질 수밖에 없는 조심스러움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예전 대회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광범위한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있는 오늘날,  ‘온전한’ 기본소득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단 합의를 통해 기본소득에 가까운 어떤 것을 실시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커졌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기본소득 지지자와 연구자 들 사이에서 하나의 쟁점을 형성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대회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포르투갈 기본소득운동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활동가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미겔 오르타Miguel Horta는 인터뷰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를 거치지 않은 “모두에 의한 모두를 위한 기본소득”을 주장하고 있다. 그가 제출한 계획에 따르면 개인소득세를 폐지하는 대신 모든 사람이 자기 소득의 50퍼센트를 출자하여 매달 동등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매달 분배되는 기본소득은 435유로(한화 약 60만원)다. 참고로, 2016년 포르투갈의 1인당 명목 GDP는 19,759달러(한화 약 2,200만원)정도다. 이런 발상은 사회란 연대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인터뷰는 9월 28일 저녁 리스본의 한 식당에서, 그리고 이메일로 이루어졌다.

| 먼저 본인 소개를 해 달라.

1995년부터 포르투갈 정부에서 세금 조사관으로 일하고 있다. 나중에 자세히 말하겠지만, “모두에 의한 모두를 위한 기본소득”운동에서는 다른 회원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회원일 뿐이다. 우리는 회원에게 특정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으며 위계제 같은 것도 없다.

|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990년대 초반 나이든 분이 티비에서 “인간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창조하기 위해 태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이래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이 사람의 이름은 아고스티뉴다 실바Agostinho da Silva이며, 포르투갈의 신비주의자이자 시인이다. 그는모든 일을 기계가 하고 인간은 창조하고, 숙고하고, 자신을 개선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썼다. 그의 메시지는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었고, 세월이 흐른 후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것이 아고스티뉴 다 실바가 이야기하던 미래로 가는 길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즉각 이 운동에 뛰어들었다.

| 1990년대 초반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이후 어떤 활동을 했는가?

사실 2013년까지 기본소득과 관련해서 특별히 한 것은 없다. 2013년에 처음으로 인터넷을 통해 조직화된 활동가 그룹을 알게 되었고 거기에 참가했다.

처음 이삼 년 동안은 주로 기본소득에 대한 공적 토론에 참여하고 재원 마련 문제를 연구했다. 나중에는 리스본에서 지역 운동을 만들었고,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토론하는 공개 행사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다른 목적을 가진 조직이나 활동가 그룹과 교류하면서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전하기도 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등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는 기본소득 토론을 조직했다.

인터넷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블로그, 유튜브,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 기본소득의 어떤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기본소득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첫 번째 관심사는 재정 문제였다.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어떤 자원으로 마련할 것인가, 민중과 국가 영역 모두에 미치는 재정적 효과는 무엇인가 등이관심사였다. 그러나 그 이후 초점을 바꾸었다. 현재 나의 주된 관심은 서로 다른 기본소득 모델이 민중의 자유, 물질적 재화의 목적, 민중의 물질적 재화에 대한 태도 따위에 가지는 심원한 함의를 이해하는 것이다.

| 현재 포르투갈 기본소득운동의 상황을 설명해 달라.

기본소득운동이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활동가와 대중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기본소득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최근에 이는 더욱 확대되었다. 기본소득운동이 양적으로만 성장한 게 아니다. ‘기본소득’이 매우 다양한 어떤 것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사람들이 하면서 질적으로도 성숙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리스본에 있는 사람들이 기본소득의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분명하게 옹호하는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 이삼 년 전이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모두에 의한 모두를 위한 기본소득Basic Income of All for All” 운동이다.

| 당신이 구상한 기본소득 계획의 정치적, 철학적 배경은 무엇인가?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사회의 올바른 토대라는 확신이다. 사람들이 상호 연대성으로 연결된 공동체는 모두에게 가능한 가장 좋은 삶을 고취할 것이다. 이를 개인의 성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고대의 모든 인간 사회가 연대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부족사회에서 사냥한 동물은 그 동물을 사냥한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집단 모두에게 속했다. 부족사회에서 모두는 동일한 행운과 자원을 공유했으며, 서로를 돌보았다. 인류는 최초의 복잡한문명과 제국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자본주의의 ‘제국’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 지구상에서 인류가 살았던 거의 모든 시기 동안 – 오랫동안 이렇게 살았다. 오늘날 모든 곳에서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으며, 인간 사회는 협동 대신 경쟁의 가치를, 공유 대신 축적의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다. 분명 이것은 과거의 연대보다 자유나 행복을 증진시키고 있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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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역사의 맥락과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아 러시아혁명 다시 보기

노경덕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I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아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 등 우리 사회각계에서 이를 기념하는 크고 작은 회합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 회합들의 빈도와 규모는 불과 1년 전 이맘 때 즈음에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이른바 ‘민중의 힘’을 직접 목도하기 이전과 이후의 사회 분위기 차이 때문일 것이다. 촛불과 광장의 기억 속에 러시아혁명은 민중의 힘을 과시한 세계사적 선례로서 자리매김되는 듯하다. 자연히 러시아혁명의 현재적 의의를 찾는 작업들은 대부분 민중의 자발성, 민주주의, 대중 정치 등을 키워드로 삼는 것 같다. 현재 우리의 정치 지평에서 이는 매우 중요하고 생산적인 작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작업은 러시아혁명을 야기한 고유한 역사적 맥락에 대한 관심을 희석시키는 아쉬운 경향도 동시에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다. 이 경향은 러시아혁명을 과거의 세계사 속 여타 민중 반란들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면서, 그리고 이를 민중과 지배계급의 권력관계라는 모든 역사 시대에 적용 가능한 보편적 개념 틀을 통해 바라보면서, 더욱 강화된다. 물론 러시아혁명이 민중과 지배계급 간의 투쟁의 사례이며 대표적 민중 반란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혁명을 촉발시킨 그 시대 고유의 맥락을 경시하면서 그것의 의의를 적절히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 맥락은 로마 시대 스파르타쿠스 노예 반란, 종교개혁기 토마스 뮌처의 농민 봉기, 또는 심지어 1989년 동유럽의 반체제 운동 등을 빚어낸 상황들과는 달리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에 더욱 주목받아야 한다.

러시아혁명은 특정 국면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출현한 사건이다. 그것은 19세기 초 유럽의 자본주의 및 산업화의 대두, 그리고 그것들이 대세로 자리매김했던 이후의 사회 및 국제 관계의 변동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러시아혁명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맥락이 형성되는 시점, 즉 19세기 초반으로 먼저 시선을 돌려야 하며, 그 후 19세기 후반의 변화 역시 치밀하게 추적해야 한다.

이 글은 러시아혁명과 그 결과를 이런 유럽 역사의 변동 속에 위치시키며 넓게 재술하려는 시도다. 러시아혁명의 경험으로부터 여러 주요 사회과학적 쟁점들, 즉 민주주의와 독재, 대중과 지식인, 민중의 자발성과 지도 등을 추출해 내어 그 현재적 의의를 살피는 노력은 물론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유럽 역사의 흐름 속에서 러시아혁명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II

19세기 초 유럽은 거대한 격변 속에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으로 귀족 중심의 전통적 지배 체제였던 구체제가 몰락했으며, 경제적으로는 한때 산업혁명이라 불리기도 했던 기술혁신으로 인해 공장제 기계공업이 주요한 생산 형태로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자본주의의 핵심 축인 사유재산권 관념의 보급과 공장제 기계공업이 만들어 낸 산업화는 여전히 압도적 다수가 농촌에 살았던 유럽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급격한 변화를 몰고 왔다. 자본주의의 확대로 토지와 노동에 대한 근본 관념이 변했던 것이 이러한 변화를 강요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구체제에서 유럽의 농민들은 자영농 또는 소작농으로 토지에 대한 관습적 경작권을 유지하며, 곤궁했지만 대체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공동체 관념이 여전히 강했던 농민들은 토지를 협동 노동을 통해 함께 경작하며, 이를 공동의 삶의 터전으로 여기며 살아갔다. 하지만 이제는 사유재산 관념의 빠른 보급으로 토지 매매가 자유로이 이루어지면서 부호들이 토지를 대량으로 사들인 후 이를 양목이나 공장 부지 등 사업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이 자신들의 토지를 매각해야 하는 입장이 되거나 또는 빌린 토지에 대한 관습적 경작권을 박탈당하면서, 도시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다. 당시 도시와 그 인근에서 일어나고 있던 산업화의 물결은 이제는 노동자가 된 이런 농민 출신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밀려드는 노동자들을 감당하기에 당시 공장 상황은 너무도 열악했다. 주거, 교육, 육아, 위생 등의 기본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다수의 노동자가 한꺼번에 공장으로 몰린 탓에 저임금은 흔한 현상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농촌적 심성과 생활 방식을 그대로 몸에 지니고 있는 이 농민 출신 노동자들은 도시와 공장이라는 낯선 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자연 리듬에 맞추어 노동하고 노동과정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었던 농촌과는 달리, 공장은 기계 리듬에 따른 노동을 강제했고 노동과정 또한 경영자나 관리자들이 미리 짜놓은 일정에 억지로 맞춰져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 출신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겪었으며 그중 상당수는 이 새로운 공장제 기계공업이라는 체제에 끝내 융화되지 못하고 도시 빈민, 부랑아, 범죄자가 되기도 했다.

이런 거대한 변화는 불과 수십 년의 기간 내에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라는 당시 언론 표현이 말해 주듯 그 시대 지식인들에게 거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정치적 스펙트럼을 넘어 모든 지식인이 느끼는 것이었다. 자연히 많은 이가 이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착목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었고, 그 나름의 해결책과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 비판자들 중 가장 낙관적이었던 이들은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대세로 보면서 당대의 문제들을 과도기적 고통으로 취급하려 했다. 물론 이들 역시 현재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당장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했지만 말이다. 반대로, 가장 비관적인 시각을 가졌던 이들은 이 문제들을 훨씬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와 산업화에 대한 전면 거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두 극단파 사이 중간 지점 어디엔가 있었으며 당대에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던 사상적 흐름이자 운동이 다름 아닌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자라 자처한 이들은 당시 산업화가 전달해 주는 근본적인 혜택과 장점을 십분 인정했지만, 그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던 경제체제인 자본주의가 그 혜택과 장점을 사회의 극히 일부분에게만 매우 불공정한 방식으로 전달해 준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거부가 산업화의 장점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자본주의는 크게 두 가지 모습이었다. 첫째, 자본주의는 사회에서 생산된 재화 모두가 시장에서 거래되는 체제다. 그리고 그 시장은 이윤추구라는 개인의 계산적 동기에 의해 점철된다. 그들이 보기에 그 동기는 전통, 도덕, 사회적 보호 등의 보다 인간적이고 감성적 측면을 점차로 차가운 계산의 속성으로 대체하며 인간 세상을 경쟁의 세계로 만든다. 나아가 시장은 그 경쟁의 공정성을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시장에 입장하는 개별 주체들의 체급 제한은 없다. 헤비급과 플라이급이 모두 같은 조건에서 경쟁해야 한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일단 시장에 들어오면 그 헤비급이 스스로의 노동의 결과로 몸집을 불렸는지 아니면 단지 부모를 잘 만났거나 여타 부정한 방식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점검할 길도 없다. 둘째, 그들에게 자본주의는 이 같은 유통과 거래의 형태 말고도 생산양식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매우 지엽적인 생산방식이던 임금노동제를 사회의 주류로 만들어 놓고 있다. 자본주의는 위에서 말한 ‘경쟁’ 원칙 때문에, 인간 노동의 환경이나 조건보다는 생산성 제고에만 골몰한다. 따라서 효율성만을 잣대로 생산의 도구, 즉 기계류를 만들어 내고 그 기계를 직접 다루는 사람들의 노동과정을 통제하려 든다. 그들이 보기에, 자본주의는 이 도구와 이를 다루는 이들을 노동 현장에서는 가깝게 위치시키지만 법률적으로는 완전히 분리시켜 놓는다. 하루 종일, 그리고 평생 생산도구를 직접 만지는 이들은 이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는 대신에, 이를 시장에서 값을 주고 구입한 이들, 즉 소유권자들은 기계와의 먼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소유권을 행사한다. 법률적 차원에서 생산도구로부터 유리된 채 직접 생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그 도구의 소유권자들에게 하나의 상품으로서 팔고 그 대가로 현금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된다. 이 과정에서 노동의 위엄은 점차 사라지고, 생산자들은 대체 가능한 생산의 요소들 중 하나로 남게 된다. 이미 취업한 이들은 하시라도 교체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그리고 아직 이런 ‘직업’을 찾지 못한 청년들은 그들의 노동력을 팔릴만한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생산관계에서의 약자의 위치 탓에, 노동자들은 생산과정 내부에 은폐되어 있는 불공정한 잉여가치 분배 기작에 근본적으로 저항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거래 및 생산 구조에서 자본가의 노동력 착취는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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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과 평등선거권을 보장하는 헌법개정이 필요하다

금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소장

I. 제10차 헌법개정 – 논의 현황과 이 글의 과제

30년 만에 이루어지는 헌법개정이지만 국민적 관심은 날로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헌법개정 논의가 국회의 개헌특위라는 제도적 범위로만 가두어지고 전 국민적 토론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된다. 또한 실제로 개헌이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조차 원내정당들의 합의에 달려 있다는 정치적 현실도 헌법개정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에 한몫한다. 물론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발의권은 현행 헌법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이는 법률에 대한 국민발안권이나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권 등 여타 직접민주주의 제도의 부재와 함께 1987년 헌법의 중요한 결점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헌법개정은 국민주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공화국이라면, 최고 규범인 헌법을 제정하고 개폐할 수 있는 권력은 최종적으로 국민에게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설령 실정 헌법이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발의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더라도, 30년 만에 이루어지는 헌법개정 과정은 아래로부터 시민 참여가 보장되고 촉구되는 방식이어야 한다. 이 점에서 개헌특위의 활동은 매우 미흡하다.

헌법개정의 과정뿐만 아니라 최종적인 개정 내용면에서도 국회개헌특위의 논의는 통치 구조 문제 중심으로 흐를 공산이 크다는 우려가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6월 말 국가인권위원회가「기본권보장 강화 헌법개정(연구포럼안)」을 공표한 것은 분명 생산적 개입이라고 볼 수 있다. (헌법개정안 전문은 이 안을 놓고 열린 토론회자료에 담겨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자칫 통치 구조 개편 중심으로만 흘러갈 수 있는 개헌 논의에 기본권 강화라는 큰 방향을 설정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의 개헌안은 “기본권보장 강화”라는 목표 하에 거의 모든 기본권 조항과 주요 쟁점을 망라하고 있다. 그 주요한 내용을 살펴보자면, 1) 총강에서 “인권국가” 지향(개정안 제1조 ③항)을 명확히 하고, 2) 기본권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확대하고(개정안 제43조 등), 3) 사형제를 폐지하며(개정안 제11조 ②항), 3) 평등권과 관련해서도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현행 헌법 제11조)으로 되어 있는 차별 사유를 “성별, 종교, 인종, 언어, 출신지역, 장애, 나이, 성적지향, 학력, 사상, 정치적 의견, 사회적 신분 등 어떠한 이유”(개정안 제15조 ②항)로 확장하고 적극적 평등 실현 조치(개정안 제15조 ③항)를 추가하였다. 4) 자유권과 관련해서도 망명권의 신설과 난민 보호 조항의 추가(개정안 제21조 ②항 및 ③항),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의 강화(개정안 제26조 및 제27조) 등이 돋보인다. 물론 국가인권위원회의 개정안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현행 헌법 제34조)의 개정안이다. 국가인권위 개정안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별도의 절(제2장 제4절)로 편성하고 그 아래에 10개의 조항(개정안 제30조∼제39조)을 두었다. 최저임금제 시행과 적정임금 보장의 명시화(개정안 제36조 ②항), 여성근로의 차별 금지 강화와 보호(개정안 제36조 ⑤항), 지속 가능한 발전의 원칙(개정안 제38조 ②항), 동물 보호(개정안 제38조 ③항) 등 개별적인 조항들도 주목할만하지만, 가장 획기적인 내용은 제2장 제4절“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의 첫 조항인 제30조 ①항에 기본소득을 보장할 국가의 의무를 명시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기본소득에 관한 시책을 강구하여야 한다.”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개정안은 기본소득 보장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 대응하는 총괄적인 국가 의무로 파악한다. 기본소득 보장을 국가 의무로 명시하자는 국가인권위원회 헌법개정안은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헌법개정안에 관한 더욱 진전된 논의를 촉발시켰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지난 8월 24일 “새로운 헌법과 기본소득”을 주제로 개헌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문화연대, 소박한 자유인, 알바노조, 노동당, 녹색당 기본소득의제모임, 평등노동자회, 청년좌파 등이 결성한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는 지난 8월 30일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기본소득개헌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와 같이 기본소득개헌운동이 활성화된 배경으로 국가인권위원회가 기본소득을 국가 의무로 개헌안에 포함시킨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인권위원회가 기본소득을 기본권이 아니라 국가 의무로만 표현한 것은 헌법 해석론에 따라서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을 발생시킬 수 있다. 해석상의 차이를 낳지 않으려면 기본소득은 보다 적극적으로 헌법상 기본권으로 명시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기본소득 보장을 위한 헌법 개정안의 구체적 내용을 다루는 일은 이 글의 첫 번째 과제다.

*이준일(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동석(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금민(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소장)이 발제자로 참여한 개헌토론회 자료집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basicincomekorea.org/170824forum-procee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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