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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말은 어디로 갔는가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

 

어렸을 때 맨 처음 읽은 추리소설은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모르그 가의 살인』이었다. 『모르그 가의 살인』은 여러 평론가들과 학자들이 최초의 추리소설로 꼽는 작품이다. 나중에 『모르그 가의 살인』이 최초의 추리소설로 평가받는다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뭔가 기묘한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최초로 읽은 추리소설이 역사상 최초의 추리소설이라니. 하지만 이런 정도의 일을 기묘한 우연이라고 여기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리라. 그 당시 어린이 책은 전집류가 대세였고, 추리소설 전집이라면 첫머리에 포의 작품이 오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포의 작품을 최초의 추리소설로 꼽는다고 했지만, 이것은 다수의 견해일 뿐이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되도록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뿌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 있게 마련이다. 이들은 성서, 헤로도토스, 볼테르에게서 “추리의 조각을 찾는 사람들”이다. 이 중에서 볼테르의 작품은 실제로 추리소설의 한 대목처럼 읽힌다. 『자디그』 3장에 나오는 「개와 말」 이야기다. 『자디그』는 1747년에 처음 출판된 책이다. 『모르그 가의 살인』이 1841년에 발표되었으므로 최초의 추리소설보다 백 년쯤 앞선 작품이다.

 

개와 말

『자디그』는 일종의 우화집으로 『아라비안나이트』의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자디그는 바빌론의 지혜로운 젊은이인데, “신께서 우리들 앞에 펼쳐 놓으신 위대한 책의 비밀을 읽어내는 철학자”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어느 날 숲에서 산책하고 있는데 왕비의 환관 우두머리와 여러 신하들이 몹시 근심스런 표정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가장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고는 다시 찾으려 넋을 잃은 사람들처럼,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환관장이 자디그에게 물었다.

“젊은이, 혹시 왕비님의 개를 보지 못하셨소?”

그러자 자디그가 겸손하게 대답하였다.

“수캐가 아니라 암캐이지요.”

“당신의 말씀이 옳소.” 환관장이 대꾸하였다.

“아주 작은 스패니얼 종이지요. 얼마 전에 새끼를 낳았고, 왼쪽 앞다리를 절며, 귀가 매우 길지요.” 자디그가 그렇게 덧붙였다.

“그렇다면 개를 보셨다는 말씀이오?” 환관장이 아직도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아닙니다. 그 개를 본 적은 없습니다. 또한 왕비께서 암캐 한마리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간 “운명의 변덕 탓으로” 왕의 마구간에서도 사건이 터졌다. 마구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말이 도망친 것이다. 왕실의 경비대장도 여러 관리들과 함께 다급하게 말을 찾아 나섰다. 이 우두머리의 근심도 환관장 못지않았다. 경비대장이 자디그에게 왕의 말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자디그는 아무런 설명 없이 직설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어느 말보다도 잘 달리며, 키는 5피에이고, 굽이 매우 작지요. 꼬리의 길이는 3.5피에이고, 재갈의 장식은 23캐럿 황금으로만들었으며, 편자는 11드니에 은으로 주조했지요.” [1피에=약0.324미터, 1드니에=약 1.296그램]

“그 말이 어느 길로 들어섰소? 그것이 어디에 있소?” 경비대장이 물었다.

“나는 그 말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그러한 말이 있다는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자디그의 대답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니 경비대장과 환관장은 자디그가 왕의 말과 왕비의 암캐를 훔쳤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디그는 대재판관들에게 끌려가 태형과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다행히도 형이 선고된 직후에 말과 암캐가 발견된다. 어쩔 수 없이 판결은 취소되었지만, 자디그는 “보고도 보지 못하였다고 말했다”는 죄목으로 황금 400온스의 벌금을 부과받게 된다. 일단 벌금을 내고 나서야 자디그는 변론을 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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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 7,530원으로 실업 대란이 일어난다는 호들갑에 대하여

최기원 알바노조 대변인

 

고용이 줄었다구요?

최저임금이 급격히 인상된다고 고용이 줄어든다는 증거는 없다. 직관에 반하는가? 적어도 지금까지의 한국에서는 그랬다.

2000년 이후 가장 높은 최저임금 인상률을 기록한 것은 2001년의 16.6%, 그 다음은 2005년의 13.1%다. 가장 낮은 최저임금 인상률을 기록한 것은 2010년의 2.8%, 그 다음은 2009년의 4.9%다. 이때의 실업률과 취업률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2001년 최저임금 인상률은 역대급이라고 말하는 이번 최저임금 인상률보다도 높다. 그런데 전년에 비해 실업이 0.4%p 줄었다. 착각이 아니다. 21세기에 가장 낮은 최저임금 인상률을 기록했던 2010년에는 전년에 비해 실업률이 0.1%p늘었고 두 번째로 낮은 인상률을 보인 2009년에는 0.4%p가 상승했다. 최저임금이 많이 오른 해에는 취업률 역시 높아졌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는 최저임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청년실업률과 노년실업률의 증감을 비교해 보겠다. 대체적으로 청년기와 노년기에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할 확률이 높으며, 최저임금으로 실업이 우려되는 일자리에 종사할 것이다. 아래의 표에서 청년은 15∼24세이며, 노년은 55∼64세다.

청년과 노년의 실업률 역시 최저임금 인상률과 상관관계를 찾아볼 수 없다. 최저임금을 16.6%나 인상했는데도 청년실업률과 노년실업률은 전년도에 비해 감소했다. 한 해 비교는 여러 요인들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할 수 있으므로,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린 5년과 별로 올리지 않은 5년을 비교해 보겠다.

평균 연간 12.2%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최저임금 인상률에도 불구하고 2001년에서 2005년 사이에 실업은 늘지 않았다. 최저임금 인상률이 낮았던 시기보다 실업률 감소 폭이 약간 낮지만, 실업이 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심지어 취업률 증가 수치는 최저임금 인상률과 상관없이 비슷하다.

최저임금 외에도 실업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이 있으므로 최저임금이 오르면 실업이 줄어든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이 실업 억제에 기여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최저임금이 급격히 상승하면 상당수가 실업자가 되어 거리에 나앉게 된다고 공포를 전도하는 이들은 이 객관적 사실에 대해 해명할 의무가 있다.

 

2년 새 최저임금 58% 올린 시애틀, 결과는?

미국 시애틀 시는 머리 시장 주도 하에 2015년부터 급격하게 최저임금을 인상시켰다. 500인 이상 기업의 경우, 2015년 시간당 최저임금 9.47달러를 2017년 15달러로 무려 58%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500인 미만 기업은 13달러로 37% 인상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캘리포니아주립대의 마이클 라이히, 실비아 알레그레토, 안나 고도이 등이 결과를 분석한 논문을 지난 달 발표했다. (이 논문은 http://irle.berkeley.edu/seattles-minimum-wage-experience-2015-16/에서 볼 수 있다). 결론의 핵심 문장을 그대로 옮겨 보자.

The evidence collected here suggests that minimum wages in Seattle up to $13 per hour raised wages for low-paid workers without causing disemployment.

시애틀에서 시간당 13달러로 최저임금이 인상된 것이 저소득 노동자들에게 실업을 야기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이 보고서는 시애틀의 최저임금 인상 후 경제 상황을 검토하면서, 모든 산업 분야에서 최저임금 인상으로 고용이 줄어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비슷한 경제 상황에 있는 다른 도시들보다 고용 효과가 더 크다는 입장을 밝혔다.

시애틀의 실업률은 2015년 1월 4.2%에서 2017년 1월 3.1%로 1.1%p하락했다. 최저임금을 급격히, 그것도 무려 37%~58%나 상승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실업률이 하락한 것이다. 이를 두고 시애틀이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최저임금의 고용 축소 효과가 상쇄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이런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 이 캘리포니아주립대 연구팀은 대조군으로 시애틀과 경제구조가 비슷한 여러 지역을 설정해서 최저임금 인상이 일어나지 않았을 상황을 추정한 뒤 이 추정치와 실측치를 비교하는 방식을 썼다. 호황이라는 외적 요인을 배제하고 최저임금 인상의 효과를 분석했다는 것이다. 결론은? 시애틀 노동자들의 소득은 대폭 올랐는데 저임금 노동자들의 고용조차도 줄지 않았다.

이 캘리포니아주립대의 보고서와 거의 동시에 나온 워싱턴주립대의 보고서가 잠깐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 보고서의 요약문은 http://www.washington.edu/news/2016/04/18/early-analysis-of-seattles-15-wage-law-effect-on-prices-minimal-one-year-after-implementation/에서 볼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시애틀의 최저임금 인상 이후 저임금 일자리의 임금은 3% 올랐지만 근로시간은 9%가 줄어서 저임금 노동자들의 월평균임금이 125달러 낮아졌다고 주장한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이 감소했다는 이 보고서를 최저임금 인상을 반대하는 국내 언론들이 대거 인용했지만 문제점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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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벌의 소유·지배 구조 개혁에 관한 쟁점들

유승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재벌 개혁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재벌이 그동안 일으킨 문제는 경제적 영역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재벌은 시장에서 독과점적 위치를 활용하여 경쟁 질서를 교란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막강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통해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근간을 위협하기도 한다.

재벌의 일탈적 행위가 민주적, 시장적 통제에서 쉽게 벗어나는 근본 이유는 재벌로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이다. 이 글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의 정도와 그 원인을 살펴보고 이를 완화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서 논의해 본다.

 

1.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

재벌의 경제력 집중도를 가늠하는 통상적인 지표는 ‘GDP 대비 재벌 자산 총액의 비율’이다. 2015년 기준으로 30대 재벌의 GDP 대비 자산 총액 비율은 90%를 상회한다. 이 지표는 절대 수준 자체보다 최근 20여년의 추이가 더 중요하다. 1997년의 외환위기 직전에 약87% 수준이었는데, 외환위기로 구조조정이 대대적으로 이뤄진 결과로 2002년에는 52.37%까지 낮아졌다. 하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12년에 94.02%에 이르러서 1997년 수준을 넘어섰고 이후 2015년 현재까지 90%를 상회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상위 4대 재벌(삼성, 현대자동차, LG, SK)과 그로부터 분리된 친족 그룹을 포함한 ‘범4대 재벌’로의 집중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30대 재벌의 자산 총액이 현재 GDP 대비 약 90%인데‘ 범4대 그룹’만 합쳐도 66%가 넘는다. 이제는 30대 재벌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분석하거나 정책을 입안하는 것이 유의미한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제 한국 경제는 30대 가문이 아니라 4대 가문 소속의 재벌들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삼성으로의 집중이 더욱 두드러진다. ‘범삼성그룹’의 자산만 해도 GDP의 30%에육박한다.

 

2.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뒷받침하는 제도

재벌 가문은 여러 대기업을 거느리고 이른바 ‘황제 경영’을 하면서 정치사회적으로도 막강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직접 소유하고 있는 지분은 전체에서 그리 많지 않다. 결국 재벌 가문은 실제적인 자신들의 소유권보다도 더 큰 경제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소유와 경영권의 괴리가 커져서 지배주주와 그렇지 않은 주주 사이에 이해가 상충하는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총수 일가가 회사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챙겨도, 분산된 일반 주주는 현실적으로 이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면 재벌 가문이 상대적으로 적은 지분으로 많은 기업을 거느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아직 상당수의 재벌이 순환출자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과 순환출자를 해소한 재벌들도 느슨한 현행 지주회사 제도에 힘입어 여전히 많은 기업을 거느릴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가) 순환출자 허용

우선 순환출자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순환출자는 전통적인 재벌의 지배 구조로서, 현재 삼성, 현대자동차, 롯데 등이 이것에 의존하여 재벌 집단을 유지하고 있다.

A 기업이 B 기업에 출자를 하고 다시 B 기업이 C 기업에 출자를 했다고 하자. 이 조건에서 C 기업이 A 기업에 출자하는 것을 허용하면 순환출자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되면 재벌 집안이 A 기업의 지배주주가 되면 B 기업과 C 기업까지 지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C 기업을 통해서 A 기업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할 수 있다.

순환출자는 소유의 집중 정도보다 더 심한 경제력의 집중을 불러온다. 또한 소유 구조와 경영권 간의 괴리가 발생하여 경영의 투명성과 자기 책임성 원칙이 관철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부터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 이뤄진 순환출자는 계속 허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삼성, 현대 자동차, 롯데 등이 순환출자 구조에 힘입어 막강한 경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시점에서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고자 한다면, 아직까지 순환출자를 유지하고 있는 재벌들이 이 구조를 해소하도록 하는 것이 원칙적인 해법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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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의제를 선도하다, 김종철

안재성 소설가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은 의제를 선도하는 사람이다. 1991년에 격월간지 『녹색평론』의 창간으로 한국에서 생태주의의 문을 열었고, 2012년에는 녹색당을 창당하는 데 적극 나섰다. 이후에 제시한 기본소득은 수년 만에 이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으며, 소농 공동체를 지향하는 운동도 ‘진정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던져 주었다. 최근에 제시한 ‘추첨제 민주주의’라는 독특한 의제도 새로운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새로운 주장을 내세운다는 것은 기존의 논리에 대한 비판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생산력 발전을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보는 발전론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한국의 문화 풍토와 문학 평론에 만연한 지적 허영심에 이르기까지, 그의 날카로운 비평을 피해갈 대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가, 오해도 많다. 당면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주의적 원칙만을 강조하는 원리주의자일 거라는 선입견은 인터뷰에 나선 필자도 긴장시켰다. 발전 반대론자인 만큼 핸드폰 같은 건 안 쓸 거라든지, 원리 원칙만 이야기하며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날카롭게 지적하리라는 예상이었다.

예상은 틀렸다. 2017년 8월 8일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시작된 만남은 술자리까지 거의 6시간이나 계속되었고, 선생이 하는 이야기마다 폭소를 터뜨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보운동권을 포함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냉엄한 비평이 필자와 공감대를 이루는 부분이 많은 데다, 다른 글에서는 볼 수 없던 선생의 성장기도 재미가 있었다.

문학, 정치, 환경, 경제 등 다방면에 걸친 선생의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지면이 허락하지도 않거니와 직접 본인의 글을 읽어 보는 게 가장 정확하리라. 『녹색평론』과 여타 지면에 실리는 글들과 『시와 역사적 상상력』, 『간디의 물레』,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등의 저서들은 주제가 명쾌하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으로 이뤄져 퍽 읽기 쉽다. 요즘 지겹도록 보게 되는 번역체 문장들의 비비 꼬인 난해함이며 외래어도 아닌 외국어의 나열이 없어서 좋다. 대학을 나온 이들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문장을 쓰는 이들은 김종철 선생에게 되게 맞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시하는 의제들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특정 정책의 변화나 특정 법률의 개폐를 주장하는 소승적인 범주를 뛰어넘어, 이 사회, 나아가 인간 사회 전체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본원적인 지향을 갖고 있기에 꼭 읽어 볼 만하다.

 

1. 전쟁의 기억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이라고 하면 대구 사람일 거라는 추측도 여러 오해 중 하나다. 영남대에서 오래 교편을 잡은 결과 생긴 오해다. 지금도 영남대 교수라고 알고 있는 이들도 많지만 그만두고 서울로 옮긴 지가 13년이나 되었다.

고향은 경남 진동이다. 진동은 오늘날에는 행정구역상 창원시에 포함되어 있는, 마산에서 서쪽으로 길고 험한 진동고개를 넘어가면 나오는 아늑한 어촌 겸 농촌 마을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이 지역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머니는 딸 없이 아들만 다섯을 낳아 키웠는데, 그는 막내였다. 해방되고 이태 뒤 1947년 1월에 태어났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까지는 진주에서 살았다. 둘째 아들이던 아버지가 일제 치하에서 상업학교를 나와 금융조합에서 서기로 일하다가 진주의 한 운수회사에 회계과장으로 옮기면서 이사를 갔던 것이다.

국내에 대학이 거의 없던 식민지 시대의 상업학교나 농업학교는 아주 가난하지는 않되 일본으로 유학 갈 경제력은 안 되는 청년들이 택하던 기술학교였다. 금융조합 서기 중에는 친일파라 불릴 정도로 협조적인 사람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일상 업무에 충실한 그저 고지식한 소시민이었다. 진급이나 출세에 관심이 없을 뿐더러 자식들을 큰 인물로 만들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진주의 생활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어린애의 시선으로 본 규모지만 마당이 무척 넓은 집으로 꽤 큰 텃밭에 토마토가 주렁주렁했던 것을 그는 기억한다. 집의 한편에 있던 광에 들어가면 늘 떡이나 곶감같은 게 있었다. 전기도 들어왔고 개인집으로는 꽤 넓은 우물도 집안에 있었다.

짧은 호사는 전쟁으로 박살났다. 1950년 6월 25일 개전과 함께 밀물처럼 쓸고 내려온 인민군은 한 달여 만에 진주까지 점령했다. 진주를 거점으로 마산을 함락시키기 위한 인민군의 대공세가 시작된다. 인민군은 진동까지 진출했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후퇴하기까지 진동고개에서 국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진동고개만 넘으면 마산 시내였고, 마산에서 부산까지는 평지라 일사천리로 진군할 수 있었다. 진주에서 제법 컸던 그의 집은 인민군에 의해 징발되었다. 아버지는 식구들을 이끌고 거제 근처 무인도로 피난을 갔는데, 김종철의 기억에는 두 장면이 선명히 남아 있다.

쪽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데 미군 함정이 나타나더니 조사를 한다며 키가 큰 미군 하나가 훌쩍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거의 뒤집어질듯이 배가 한쪽으로 확 기울 때의 그 공포감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섬에 도착해 보니 이미 몇 가족이 피난 와 있었는데 샘이 없었다. 바위 틈새로 한 방울씩 흘러내리는 물을 받기 위해 온종일 바가지를 들고 줄을 서 있던 광경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야 어려서 기억도 안 나지만, 인민군은 아이들을 모아 놓고 노래를 가르쳐 주는 등 우호적으로 사람들을 대했다죠. 그래도 우리 부모님과 형들은 반공 보수주의자들이 되었어요. 어쨌든 전쟁을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으니까요. 농민들도 그랬다지요. 불완전하나마 조봉암이 주도했던 농지개혁으로 이미 내 땅이 생긴 다수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인민군이 반가울 리 없었죠. 농민은 기질적으로 원래 보수적이잖아요. 김일성은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면 농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지만, 착각한 거죠.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데 일등 공신은 조봉암 선생이었죠. 그 조봉암 선생을 나중에 이승만이 간첩죄를 씌워 처형했으니, 참 말도 안 되는 아이러니죠.”

인민군 주력은 두 달 만에 물러났으나 전쟁은 계속되었다.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부 전역에서 빨치산이 되어 3년 가까이 교전을 계속한다. 김종철의 식구가 진주를 떠나 고향 마산으로 돌아간 것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53년, 그가 국민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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